30대 청년 시절에 IT서비스를 주 업무로 하는 중견기업에서 근무했다. IT서비스 회사는 고객사가 요청하는 정보기술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회사이다. 나는 고객사 전산실에서 운영업무를 했지만 때때로 고객사 전산화를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일하기도 했다.
내가 하는 업무는 고객사 현업의 요구를 파악하여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거나 유지보수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현업과의 소통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이 중요했다. 나는 둘 다 잘하지 못했다. 현업의 요구사항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고 프로그래밍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전산화를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막강한 인맥이 있어서 프로젝트 업무를 편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총괄팀장이 동창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프로젝트 일을 편하게 할 수 있을 텐데!'
퇴근 후 숙소에서 혼자 있을 때면 가끔은 이런 상상을 할 때가 있었다. 즐거운 상상이었지만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았다. 나는 특별한 인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이도 마흔 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회사에서 중간관리자급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따라서 프로젝트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고객사의 최종의사결정권자가 동창생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도 꿈일 뿐이었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렇듯 일어나기 어려울 것만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프로젝트를 하러 고객사에 갔는데 사업을 총괄하는 팀장이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것이다.
15년 전, IT서비스 회사 개발팀에 근무할 때였다. 서울에 위치한 고객사인 P회사의 온라인 쇼핑몰을 개발하기 위해 일부 직원들이 P회사에 파견 가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젝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하여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잡음이 많았다. 이렇게 되자 회사에서는 나를 포함한 여러 명의 직원들을 P회사에 추가로 파견하게 되었다. P회사에 방문하기 전 프로젝트 분위기에 대한 내용을 들었다. 그런데 들은 내용 중에는 P회사 사업총괄팀장인 K부장이 내가 아는 동창생이랑 이름이 똑같았다.
'사업총괄팀장이 중학교 때 우리 반 친구였던 K일까? 설마 아니겠지'
중학교 때 친구였던 K가 P회사의 사업총괄팀장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회사 직원들과 함께 P회사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번에 여러분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문제가 많은 프로젝트인 만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을 해야 해요.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온 거지 대충 시간 때우러 온 갓이 아닙니다"
함께 P회사로 파견 나온 L부장이 말했다. L부장과 몇몇 직원들이 맡은 임무는 현재 개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고객사의 현업, 기존에 참여하던 우리 회사 직원들과 함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협의하는 것이았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상사의 지시대로 업무만 해 와서 그런지 프로젝트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문서를 작성하여 프로젝트 개발자와 고객사에게 알려주는 일은 나에게 어렵고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식사를 하러 구내식당으로 걸어가던 중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야 너 K 아냐? 잘 지내니? 반가워"
"반갑다. 너 어떻게 지내니? 여기는 왜 왔니?"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K를 보고 놀랐다. 설마 했는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K는 본인이 온라인 쇼핑몰 개발 프로젝트 사업총괄팀장이라고 말했다. 사업총괄팀장은 사업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직위였다. 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나려면 K의 최종 승인이 있어야 했다.
K는 자신이 근무하는 사무실을 알려주었고 생각나면 한 번 놀러 오라고 말했다. 잠시 동안의 짧은 대화였지만 기분이 좋았다. 나는 프로젝트에서 별 볼일 없는 위치에 있지만 K는 가장 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동안 어려움을 겪더라도 K의 배려로 편하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수행 중인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내 동창생인 K가 프로젝트의 사업총괄팀장이라고 말이다.
"P회사 K부장님이 제 중학교 친구더라구요. 몰랐는데 어제 우연히 식당 앞에서 마주쳤어요"
우리 회사 직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말했다. 프로젝트를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꿈 깨. 그렇다고 봐 줄줄 알아? 너는 우리 회사의 일개 직원일 뿐이야. 니가 갑(甲)이 아니라구"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L부장이 나를 째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인맥을 이용해서 회사 일을 게을리할 생각하지 말라고 내가 일을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볼 거라고 오히려 경고하듯 말했다. 이런 분위기라서 그런지 내가 K와 동창생이라는 사실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런 점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했다.
5년 전 중소기업에 근무할 때는 회사 밖에 인맥이 있으면 인맥을 적극 활용하려고 했다.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중요한 인맥을 알고 있으면 회사 대표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15년 전 P회사 프로젝트에서는 프로젝트 수행 직원들이 많고 고객사와 수행사라는 미묘한 갑을관계 때문이었을까. 나로서는 사업총괄팀장 K와 두세 번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을 뿐 'K가 동창생'이라는 인맥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에 그다지 의미 없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