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같아. "
대만에 살기 시작하면서 이 말을 참으로 많이 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전혀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본디 말이 아주 많지도 그렇다고 아주 적지도 않은 적당한 정도의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만에 살게 되면서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유는 바로 중국어. 물론 지금에서야 비즈니스 중국어도 꽤 무리 없이 하지만 아직도 나의 모국어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대만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집중'이 있어야 원활한 대화가 가능하다. 만약 멍을 때린다거나, 딴생각을 하며 듣는 순간 순식간에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미안한데 다시 말해줄래?'를 부탁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대만에 살게 되면서 나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거의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중'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나에게는 꽤나 스트레스도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정은 차라리 듣기만 하고 말을 하지 말자! 였다. 그 결과 술자리를 가거나 모임을 나갔을 때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혹시 이 자리가 피곤한지, 아니면 이해를 못 하는 건지 등등. 처음에는 괜한 오해를 살까 열심히 나름의 변명을 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냥 '나 원래 말을 잘 안 해'라고 퉁 쳐버리곤 한다.
그렇다고 완전 대화 자체에 참여를 안 하는 건 아니다. 열심히 듣고 어느 정도의 리액션도 날려준다. 그 결과 대만 친구들에게 나는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나답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말을 할 때는 하는 사람인데 왜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표현을 꽤나 좋아하게 되었다.'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다 보니 수많은 친구들이 평소에 잘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게 된 것이다.
평소에 나누기 어려웠던 그 친구들의 속사정을 들으며 내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 친구들의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다. 정말 아무 문제 없이 행복해 보이는 친구들도 사실은 남 모를 수많은 고민들을 하고 있다는 것, 나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나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면서 겪게 된 진귀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평소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하던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그전까지 너무나 빠르게 남을 함부로 판단하던 버릇이 있었는데 그 경험을 겪은 이후로 마음대로 주위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애쓰고 있다.
그동안 나 스스로도 몰랐던 수많은 소통의 부재, 그리고 섣부른 판단들로 가까웠던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떠나보내곤 했다. 그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라며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때의 내가 조금만 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너무나 손쉽게 서로의 오해를 풀고 더 좋은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의도치 않게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교훈 하나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