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oh~No!! 비상금!
“사모님! 남편 모르게 비자금 만드셔야죠.. 하루 한 잔 커피값 아낀다 생각하시고 월 20만원짜리 10년 가입하세요~. 나중에 저한테 고맙다고 하실거에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내 직업장에서 방카슈랑스로 보험을 판매하는 우수한 직원이었다. 나에게 오는 모든 고객들에게 ‘비자금’을 거들먹거리며, 강하게 가입 권유를 했더랬다.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며 그렇게 실적 올리기에 바빴었다.
세일즈에도 전략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무기 없이 전장에 나갈 수 없듯, 나는 나만의 전략적 무기를 먼저 준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약하다는 '스토리 텔링'을 만들기 위한 집중을 했고, 내가 찾아낸 토픽은 바로 ‘비자금’이었다.
대부분 주요 고객층이 주부였던지라, 그들에게 ‘비자금’을 골자로 한 나의 스토리텔링 세일즈는 제대로 관통했다. 대다수의 고객들이 내가 만들어 낸 논리에 수긍하며 바로 가입을 했고, 이어 남편 뒷담을 한참이나 쏟아 내고는 삼 년 묵은 체증이 가신 냥 시원해진 얼굴로 자리를 떴다. 이로써 나는 회사 내에서도 ‘데일리 세일즈 릴레이(Daily Sales Relay)’에서 대상이라는 성과를 이뤄내며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참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어쩔 수 없는 회사의 이벤트에 순응하며 나는 명예롭게 퇴직을 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 현재 나는 백수 2년 차라는 말이다. 그간 그렇게 고객에게 떠들어 댔던 ‘비자금’이라고는 1원도 없이 퇴직을 해 버렸고, 몇 푼 받은 퇴직금은 순진하게도 남편과 함께 공유를 해 버렸으니, 결국 나만의 돈은 없다는 거다.
사실 맞벌이로 지난 20여 년간 살아 왔으면, 이저녁에 남편과 경제 관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고, 진작에 딴 주머니를 찼어야 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모범생처럼 집과 회사만을 오가며 오로지 ‘공동 자산 만들기‘에만 올인 했으니, 비자금이 왠말이었겠나.
물론, 이런 이유로 무일푼으로 시작한 지극한 소시민이 현재의 자산까지 이뤄냈다는 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남편 모를 나만의 돈이 진심 필요하다고 느낀 건 퇴직 후 고작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퇴직 직후, 코로나로 인해 줌수업인 아이들은 집에 있었고, 익숙치 않은 집안 일에 많이 지친 날이었다.
모처럼 달달한 커피를 급하게 수혈해야만 했다. 집앞 스타벅스의 진하고 달콤한 아이스 커피가 간절했다. 늘 마시던 아이스 캬라멜 라떼로 주문하려던 찰나, 빛의 후광을 머금고 당당히 전광판에 그 이름을 드러낸 신메뉴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아이스 슈크림라떼.
카페라떼에 달콤한 시럽이 베이스일테고, 노르스름한 커스터드크림으로 보이는 슈크림이 토핑으로 가득한, 지금 내게 딱 필요한 그 맛이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역시나 가격이 후덜덜했다. 잠시 고민했다. 먹고는 싶은데, 신경이 쓰일 정도의 금액이었고, 그렇다고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계속 찜찜할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이 교차한 끝에 나는 과감하게 아이스 슈크림라떼를 주문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혀끝을 자극하는 너무 단 시럽의 맛이 영 거슬렸다. 지불한 가격에 비해 음료의 맛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원래 주문하려던 음료로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거라는 후회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돈벌이가 없다 보니, 커피 한 잔 선택하는 데에도 작아지는 내 자신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며 이어 미래에 대한 경제적 불안감까지 엄습해 왔다. 집에 다다를 때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풍선처럼 커지면서 나의 속을 시끄럽게 했다.
잡다한 생각들로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게 현관문을 연 순간,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예고도 없이 반차를 내고 들어와 있었다. 남편의 시선은 나보다 커피에 먼저 다다렀다. 그리고는 이내,
“앞으로는 집에서 믹스나 먹어라!!”
곧이어, “이젠 애껴야 돼!”
남편은 그날 오후에 시어머니 병원을 모셔다 드리려는 이유로 반차를 냈던 거였다. 항상 어머니 댁에 가려면, 무언가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효자 스타일이다. 그러니 그는 나에게 코스트코를 가자고 제안할 수 밖에. 이미 커피로 빈정이 있는 대로 상했던 터라 마음 같아선 같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코스트코 카드 명의자인게 죄라면 죄였던 것을..코스트코에서 과일이며 고기, 어머님 간식거리까지 살뜰하게 카트 한가득 채워 계산대로 오려던 그 때, 남편이 와인 코너에서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각 1병씩을 빛의 속도로 넣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혀를 차며, 와인은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소리 질렀다. 갑작스레 나도 모르게 나온 고함이었다. 내가 사먹는 커피 한 잔은 아끼라고 잔소리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은 마음껏 플렉스 하겠다는 모양새가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했다. 남편도 조금은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세일을 많이 해서 사는 거라는 그럴싸한 변명을 대며 결국 그 와인들을 계산대에 올려 놓았다.
당시의 상황은 나를 참 서글프게 만들었다.
내가 20여 년 힘들게 직장 생활하며 살아온 댓가가 결국 커피 한 잔도 눈치 보며 사먹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그래서 결심을 하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나만의 비자금을 만들기로 말이다.
ISFJ유형답게 나는 나름 철저한 계획에 맞춰 ‘비자금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하게 되었다.
먼저 주변의 친구들에게 물었다. 비자금의 유무와 만드는 방법에 대해.
그런데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고 했던가. 내 주변의 친구들 또한 비자금이 거의 없었다. 참나.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방법들을 말이다.
그래도 나름 첫직장인 은행권에서 20여 년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까짓 거 못해내겠나 싶었다.
신용카드로 생활비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이 틈을 노리는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실 요즘은 온라인 쇼핑몰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의외로 방법을 찾아내기가 쉬웠다.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사이트는 쿠팡과 마켓컬리, 그리고 SSG. 장을 볼 때마다 2~30만원 가량 구매하기 때문에 금액 한도 내에서 월 1~2회 정도 생활비에 녹아드는 품목을 쟁여 놓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식재료 품목 이외의 돈이 될 만한 바로 그것. 매의 눈으로 집요하게 검색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내 눈에 걸려 든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금(Gold)'이었다.
유레카~~!!
금이라면 내 비자금을 만드는 용도로 더할나위 없는 자산이었다.
금은 반돈도 살 수가 있었다. 금액 면에서 무리하지 않고 모을 수 있는 만족스런 방법이었다. 이렇게 나는 금 한 돈 가량의 실물을 상황에 맞춰 매월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모든 자산은 가격이 변동한다. 이 변동 주기로 인해 돈을 벌 수도 잃을 수도 있는 기회가 생긴다. 매월 분산으로 매입하게 되면 자연스레 매입 가격의 리스크가 헷지될 것이고, 매도 타이밍을 잡을 때까지 잘만 보관하며 기다린다면 나에게 분명 훌륭한 재테크 수익으로도 보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내가 마냥 생활비를 빼돌려 비자금 만들기에 혈안이 된 ‘빌런’이기만 한건 아니었다. 고객들에게 틈만 나면 외쳐 댔던 그 '커피값'을 아끼며 모으기로 결단했다.
퇴사 후에도 절대 양보할 수 없었던 스타벅스 커피. 나의 최애 기호 식품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금을 모아가는 재미가 생기다 보니, 놀랍게도 스타벅스 커피에 대한 갈구가 사라졌다. 그러면서 늘상 나를 괴롭혀 왔던 불면증도 점차 호전 되었다. 또한 귀찮으면 시켜 먹던 배달음식 횟수도 줄였다. 대신 부지런을 떨어 SNS를 참고하여 여느 레스토랑 못지 않게 맛있고 멋스런 음식을 흉내내다 보니, 급기야 요리 솜씨도 늘며 아이들이 잘 먹게 되는 기대 이상의 효과까지 발현되었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지 않으며 절약하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 내게는 굉장히 유의미했다. 비자금을 도모하는 것 이전에 내 심리 건강을 되찾게 된 계기가 되었다. 퇴직 후 소득이 없게 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늘 자리 잡고 있었고, 소비를 하면서도 뭔가 모를 스트레스에 마음이 조급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비를 하면서도 즐겁다. 아낀 만큼의 돈으로 다음 달 금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렇게 ‘있음’을 느끼면서 생활 하니까 오히려 불필요한 소비는 아예 없어졌고, 지갑에 돈은 늘상 두둑하게 채워져 있는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정말 ‘더해빙(The Havings)’이 실현되는 것일까.
아직도 무언가 내가 작아져 보이는 상황이 되거나, 혹은 ‘돈’으로 인한 남편과의 마찰이 있을 때, 나는 나만의 보물 창고로 달려 가서 흐뭇하게 그것들을 바라 본다. 그러면, 어느샌가 마음이 풍족해지고,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역시 돈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좋은 도구이다. 그래서 나는 돈이 좋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돈은 생활을 편리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미래를 담보해 주리라 믿었다. 그래서 열심히 달려 왔다. 그 자본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그런데 막상 그 돈을 채우고 났는데도 정작 나 자신에겐 인색해 하며 쓰질 못했고, 가정의 한정적 자원에서 나는 항상 최 후선으로 밀려났다. 대신 슬금슬금 아이들이나 남편, 혹은 공동 자산을 형성되는 곳으로만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미래를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 왔건만, 내가 바라던 그 미래는 없고, 나의 노고를 알며 고마워하는 사람도 없다. 꼭 바란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서글퍼지고 허무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 값진 나만의 보물 창고가 있지 않은가.
차곡차곡 모아져 내게 큰 재테크 자산으로 보답해 줄 ‘금’을 바라 보며, 오늘도 새롭게 힘을 내보련다. 이 보물 만큼은 오로지 내 자신을 위해, 지금껏 앞만 바라보며 정직하게 살아온 나를 위해 꼭 쓰여지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 존재 자체가 나에겐 무엇보다 든든한 나의 마지막 보루이며, 내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