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학원행.
-바로 아이들 모두 내려보내주세요! 친구들이 함께 집으로 가지 않으면, 저희 애도 학원에 안갈거에요!!
며칠 전, 둘째 아이 생일 파티에서 내가 받은 황당한 문자였다. 보낸이는 일면식도, 연락한 번 제대로 주고 받은 적이 없는 둘째 아이 친구 엄마였다.
호스트는 당연히 나와 내 딸아이이고, 파티를 파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 몫이건만,
주관자는 전혀 게의치 않은,
온전히 자신의 딸이 학원으로 등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경우 없는 엄마의 카톡.
그 한 명 친구 때문에 이 날만을 기다려온 내 딸의 기분을 송두리째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 그러시면, A만 내려보내겠습니다. 저 역시 저희 딸아이 기분을 망칠 수는 없겠네요. 다른 친구들도 지금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요.
정중히, 하지만 단호하게 답장의 문자를 보냈고, 그녀는 그 짧은 시간 안에서 몇 번의 문자를 추가로 보냈다.
자신의 딸이 지금 사춘기라 힘들다는,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의 지독한 난투극이 지긋지긋하다는,
반항적인 아이를 컨트롤할 수 없어 속상하다는 쉴 새 없는 문자 폭탄에 이미 상해질대로 상한 나의 마음은 둘째치고, 내 머릿속에선 순간 빨리 저 아이를 그녀에게 돌려보내야만 일방적인 카톡 폭탄의 끝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을 뿐이었다.
나는 내 딸아이 방문을 열고, 그아이에게 지그시 말을 건넸다.
-지금 너희 엄마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네. 학원가야할 시간이라면서.. 지금 내려오라고 아줌마한테 연락이 왔단다. 아쉽겠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다음 번에 시간 괜찮을 때 또 놀러오렴.
아이는 성난 고양이 같은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선, 인사도 없이 현관문을 쾅닫고 내려가 버렸다.
그렇게 한 친구가 중간에 빠진 둘째아이 생일 파티는 곧 끝이 났고, 그 날 저녁.
-엄마! 아까 A네 엄마 진짜 무서워. 맨날 A는 집에서 지 엄마랑 싸우나 보더라고.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대치동의 꽤나 이름 있는 학원에서 매우 타이트한 스케쥴에 맞춰 수강을 이어가고 있었다.
최근 초등 고학년 여자 아이라면 찾아온다는 1기 사춘기가 찾아왔고, 늦게 아이를 낳은 갱년기 시즌이 도래한 엄마와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는 듯 했다.
학원을 빼먹거나 학원 숙제를 안한다거나, 잠만 계속 쿨쿨 잔다거나 숙제를 밍기적거리면서 엄마 속을 있는대로 긁은 후에 글쓰기 숙제 한 편을 하는 데에 일주일이나 걸린다고 했다.
며칠 후,
그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무례했던 점이 신경쓰였기에 연락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차 한 잔 마시자며 카톡이 왔다.
교류할 맘이 식었던 터여서 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명의 아이들이 그룹지어져 있었고, 피하기 애매한 상황이기도 하여 잠시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순박하고 약간은 공격성이 느껴지는 말투.
사투리의 억양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같은 성향의 사람에게는 한발 주춤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예상한대로 거침없고, 지향한대로 밀어붙이는 적극성 때문에 오해의 여지를 다분히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역시나 뒤끝없고 쿨한 스타일이었다.
물론, 나와 다른 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는 일방적인 학원 얘기로 시작하여 학원 얘기로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중간 중간 아이의 사춘기로 공부를 등한시하고 반항 한다는 넋두리만을 늘어 놓았을 뿐.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건 각 학원의 장단점 분석과 정보.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현시점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대화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9월의 초입,
나는 결국 학원 설명회를 듣기 위해 대치동 학원가를 다시 배회하게 되었다.
모든 학원을 끊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공부를 시킨 지 딱 6개월이 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지난 여름,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 후, 아이의 공부 태도는 무너져 버렸고, 그 여행 시기를 전후하여 홈스쿨에 대해 지속해야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터였다.
초등 고학년으로 진입함과 동시에,
아무 생각없이 당연한 국룰과 같이 여기며 보냈던 수가지의 학원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고, 학원 대신 집에서 공부를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둘째 아이의 학습.
지난 6개월은,
영어는 수년간 해외교육을 받아오며, 자기주도학습으로 완벽하게 영어를 마스터한 나의 큰 아이가,
수학은 인강으로 선행 진도를 나가면서, 주말에 심화학습 문제지로 다양한 문제 유형을 풀리며 관리 했던 남편이,
국어는 문학과 비문학을 아우르며 도서와 문제집 등의 자료를 모아 꾸준히 풀리고, 글쓰기를 생활화 시켰던 내가 맡아 둘째 아이와 함께 했던 학습 시간들이었다.
나름 우리 가족이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아이의 만족도가 더 컸다.
학원 안에서 벽이 높은 문제들에 한껏 위축되어 있던 둘째는 집에서 자신의 수준에 맞는 공부로 하나 하나 작은 목표를 이뤄 내며 성장한다는 기분을 맛본 후에는, 그간 무너져 버렸던 자신감을 한껏 채울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학원 의존 없이 오히려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기 효능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런 걸 간절히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선행이 늦었던 아이가 늘상 이 곳의 아이들보다 뒤쳐져 있다는 패배 의식에 덮혀 쭈그러져 있는 그 모습에 한없이 맘이 아리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바랐던 대로 되었지만, 또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의 단계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려면 또다른 큰 에너지를 요구하게 되는데, 아이는 편하디 편한 가족들과 공부를 하다보니,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더 어려워져도 꾀를 부리며, 앓는 소리를 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우리 또한 홈스쿨이 지날수록 나태해졌고, 급기야 우리도 편하려고 아이의 요구조건을 한없이 허락해 주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학원으로 다시 돌아갈 시점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를 위해 가을 학기 프로그램을 열렬히 광고하는 학원가의 설명회와 상담을 시작하며 대치 사거리의 배회가 또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다음 주에도 벌써 학원 레벨테스트가 3개나 잡혀 있다. 이 과목이 정확하게 확정되면, 다음 과목의 학원을 또 알아봐야 할것이다.
6개월만에 나의 둘째를 또다시 학원의 정글로 들여 보낸다.
단지, 이전과 다른점이라고 한다면, 아이가 학원을 보내 달라고 먼저 요청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곳을 꼭 집어 말하기까지 한다. 이유를 들어보면, 나름 아이의 말이 타당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말이다.
학원을 가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는 것은, 본인이 학원에 가서 자기 의지로 공부해 보겠다는 뜻도 포함된 것일테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태도임엔 분명했다.
학원행 선택의 또다른 이유는, 큰아이의 의견이기도 했다.
큰아이는 가르치는 것과는 별개로 더 좋은 자료와 시스템을 이용해 볼 시점이라고 넌지시 말했다. 둘째의 베이직 토대는 이제 마련 되었고, 여기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는 학원의 막강하고도 방대한 자료와 시스템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젠 나 또한 아이를 학원으로 몰아넣고 더이상의 방치는 없을 것이다.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가며, 이를 위한 또 다른 방안을 찾아볼 적극적인 마음이 채비되었다.
다시는, 정말 또다시는 학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이를 이용하는 태도로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정도의 변화라면 그래도 지난 6개월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위안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학원가 어느 골목에서 가을이 느껴지는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며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