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의 그늘 Sep 18. 2020

동요가 전해준 시간

    누워만 있는 2개월 아기와 딱히 놀아줄 방법은 없고, 언어 발달에 도움이 될까 하여 동요를 들려주기로 했다. 유튜브에는 좋은 동요 모음이 많았다. 그중에서 재생 시간이 두 시간이 넘어 멈춤 없이 오래 틀어둘 수 있는 것을 골랐다.

    듣다 보니 제법 아는 노래가 많았다. '열 꼬마 인디언', '꼬부랑 할머니' 등 누구나 알 법한 노래가 들렸다. '예쁜 아기곰', '아이들은'과 같이 창작동요제를 무척 좋아했던 초등학생 시절 즐겨 듣던 노래도 들려왔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고 생각지 못했는데 대충 가사를 알고 따라 부르게 되는 노래들도 있었다.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쌩쌩 불어도 괜찮아요. 난난난 나는 괜찮아요...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내가 좋구나. 파랑 머리 천사 만날 때는 나도 데려가 주렴...


    노래를 들으며 함께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워킹맘이셨던 엄마가 퇴근 전까지 를 맡겼던 'oo 미술학원', '선아', '민경', '민영' 등의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xx이네 집'으로 불리던 구멍가게 등등. 나의 여섯  시절을 대표하는 것들이었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혀 있던 동요를 어렴풋이 따라 부르는 내 자신과, 노래와 함께 줄지어 떠오르는 옛 이름들이 신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전율처럼 밀려왔다. 나를 둘러싼 상황이 낯설면서도, 먹먹하고 조금 슬퍼지는 묘한 느낌이었다. 




    폭 튀어나온 이마에 눈도 얼굴도 동그란 아이, 눈물이 글썽인 듯 커다란 눈이 촉촉한 아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작고 마른 아이, 사진을 찍을 때 웃어야 하는 것을 몰라 항상 무표정인 아이. 어린 시절 사진들이 말해주는 내 모습이다. 여기에 부모님의 전언을 더하면, 조용한 아이, 웬만해서 조르지 않는 아이, 주사를 맞아도 울지 않고 참던 아이. 여기에 내 기억을 더하면, 좁은 골목길에 맞닿은 작은 연립주택에 살던 아이, 그곳에 살던 아이들과 함께 후레쉬맨과 아기천사 두두를 즐겨 보던 아이, 그렇게 마냥 놀 수 있는 시간이 좋았던 아이. 사진과 전언과 내 기억이 말하는 대여섯 살의 나는 이런 아이였다.


    하지만 폭 나온 이마는 온데간데없고, 세파를 겪은 눈은 예전만큼 빛나지 않는다. 때로는 거짓 웃음을 지을 줄 알게 되었으며 세상은 너무 참아서도 조용히만 살아서도 안 되는 곳임을 깨달은  오래되었. 그 옛날 작은 연립주택은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아버렸고, 나는 지금 장방형으로 뻥 뚫린 도로와 맞닿은 아파트에, 이웃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다.

 

   순간 두 가지 내 모습의 간극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모습에 비춰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니 너무 낯설어 우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난다 해도 "안녕", 인사도 못하고 당황하며  달아날 것 같았다. 만큼 어린 시절이 아득히 느껴지면서도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삼십여 년이 덩어리처럼 뭉텅 지나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동요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노래를 내 아이에게 들려주고 있는 상황에 다시 한번 울컥해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초등학생 시절이, 좀 더 지나면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이 낯설어질 때가 올 것이다. 비교적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20대의 날들과도 어색해지고, 저 조그마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지금 이 순간도 희미해질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나에게 젊고 빛났던 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니 지금 시간이 소중하고 애틋하다가도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이 쓸쓸하게 느껴진. 그렇게 동요가 전해시간의 무게감은 너무도 묵직했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작고 전 쓰신 산문 중 '시간은 신이었을까'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여기서 선생님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느낀 신으로서의 시간은 경외의 대상에 가깝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과거를 돌이켜볼 때 너무 많이 변해버린 모습에, 성큼 지나가 버린 시간에 놀라고 애달파한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간 앞에 무력하다. 그러한 시간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가는 것.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모습은 티끌만큼이라 할지라도 미래의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될 것이기에, 미래의 내가 부끄럽지 않도록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  미래에, 동요 같은 무언가가 지금의 나를 부를 때,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 그것이 시간이라는 신을 마주하는 유일한 자세일 것이다.


( 사진 : 픽사베이 )

매거진의 이전글 우주를 만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