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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그늘 Sep 11. 2020

우주를 만났다

    그런 날이 있다. 눈 쌓인 밤 산중 오두막처럼 세상의 빛도 소리도 미약한 적막에 있던 날. 깊은 적막 속 찬란한 무엇을 발견하고는 황홀에 넋을 잃고 마음이 울렁이던 날. 눈 떠보면 어느덧 시간은 멀리 흘러가 있고, 가슴속 충만함이 향기처럼 가득 남던 날. 꿈길을 걷던 것일까, 환상 속에 있던 것일까.

    너를 처음 만날 때가 그러했다.


    추운 겨울 저녁, 너를 만나러 분만실로 향했다. 의사 하나, 마취과 의사 하나, 간호사 다섯. 이렇게 최소 인력만 남아 병원은 단출했다. 거기에 산모도 하나, 보호자도 하나, 그리하여 예닐곱 개의 분만실 중 사람이 있는 곳도 하나. 다른 산모들의 비명에 질겁하게 된다는 얘기에 고성 가득한 분만실 광경 상상하곤 했지만  날 병원겨울밤처럼 차분하고 조용했다.

    입원  상황은 빠르게 진전되었다. 촉진제를 투약한 뒤 바로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시작됐다. 진통 중 간호사가 들어왔다. 네가 진통을 견디기 힘들어해 심박이 약해진다고 하였다. 간호사의 지시대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왼쪽으로 돌아 누워 깊게 숨을 쉬었다. 배를 강하게 수축하는 아픔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침대 봉을 쥔 내 손바닥이 하얗게 질렸다. 너의 심박도 진통과 함께 자꾸만 약해졌다. 그럴 때마다 입가에 채워진 산소마스크 안에 김이 잔뜩 서렸다. 그렇게 고통과 이완, 짧고 깊은 숨이 반복되던 , 너를 꺼내기 위한 수술이 결정되었다.

    수술실은 모든 것이 차가웠다. 살갗에 닿는 저온의 공기, 수술 도구가 내는 금속성(聲), 척추를 찌르는 마취 주삿바늘의 느낌, 차갑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러고는 하반신에 퍼져가는 마취 기운과 수술 도구들이 배를 찌르고 가르는 묘한 감각을 차례로 느꼈다.

    그렇게 일 분, 이 분, 몇 분이 지났을까. 배가 갑자기 가벼워지며 너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도 멀찍이 들렸다. 그 순간 수술대를 비추는 커다란 조명이 처음으로 황홀하게 느껴졌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리고 간호사 품에 안긴 너를 처음 만났다.


    오른쪽 한 번, 왼쪽 한 번.

    오른쪽으로는 핏덩이인 너를, 왼쪽으로는 초록색 수술 천에 예쁘게 싸인 너를 보았다.

    왼쪽의 너를 보고는 나는 "안녕." 인사했다.

    그러고는 기억나지 않는 깊은 잠에 들었다.


    진통의 영향일까, 고요했던 병원 분위기 때문일까. 겨울밤의 나른한 정취 때문이었까. 병원에 도착한 저녁부터 잠에서 깬 새벽까지의 시간에 현실감이 없다. 잠시 꿈을 꾼 듯 찰나처럼 느껴졌는데 현실에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 깨어나고 몇몇 장면이 스냅숏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그중 가장 선명한 것은 너를 처음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 그때의 벅찬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자주 떠올린다.


    광속 단위로 달리는 우주선에서는 지구와 다른 시공간이 흐른다지. 네가 태어난 밤, 나는 우주선을 타고 멀리 여행한 것만 같다. 정적이 흐르는 어두운 공간을 지나 도착한 곳은 새로운 우주가 태동하는 현장. 나는 모습을 숨죽여 바라본다. 그렇게 기다림이 이어지던 순간, 너의 울음소리와 함께 작고 새로운 우주가 창대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폭발적인 빛으로 검은 세계밝히는 너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우주와 만났다. 경이로움으로 너를 만났다.


(사진 :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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