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눈 쌓인 밤 산중 오두막처럼 세상의 빛도 소리도 미약한 적막에 있던 날. 깊은 적막 속 찬란한 무엇을 발견하고는 황홀에 넋을 잃고 마음이 울렁이던 날. 눈 떠보면 어느덧 시간은 멀리 흘러가 있고, 가슴속 충만함이 향기처럼 가득 남던 날. 꿈길을 걷던 것일까, 환상 속에 있던 것일까.
너를 처음 만날 때가 그러했다.
추운 겨울 저녁,너를 만나러 분만실로 향했다. 의사 하나, 마취과 의사 하나, 간호사 네다섯. 이렇게 최소 인력만 남아 병원은단출했다.거기에산모도 하나,보호자도 하나,그리하여 예닐곱개의 분만실 중 사람이 있는 곳도 하나.다른 산모들의 비명에 질겁하게 된다는 얘기에고성 가득한분만실광경을 상상하곤 했지만그 날 병원은 겨울밤처럼 차분하고 조용했다.
입원후 상황은 빠르게 진전되었다. 촉진제를 투약한 뒤 바로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시작됐다.진통 중 간호사가 들어왔다. 네가 진통을 견디기 힘들어해 심박이 약해진다고 하였다. 간호사의 지시대로산소마스크를 쓰고 왼쪽으로 돌아 누워 깊게 숨을 쉬었다.배를 강하게 수축하는 아픔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침대 봉을 꽉 쥔 내 손바닥이 하얗게 질렸다. 너의 심박도진통과 함께자꾸만 약해졌다. 그럴 때마다 입가에 채워진 산소마스크 안에김이 잔뜩 서렸다.그렇게고통과 이완, 짧고 깊은 숨이반복되던한밤,너를 꺼내기 위한수술이 결정되었다.
수술실은 모든 것이 차가웠다. 살갗에 닿는 저온의 공기,수술 도구가 내는 금속성(聲), 척추를 찌르는 마취 주삿바늘의 느낌, 차갑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러고는 하반신에 퍼져가는 마취 기운과 수술 도구들이배를 찌르고 가르는 묘한 감각을 차례로 느꼈다.
그렇게 일 분, 이 분, 몇 분이 지났을까. 배가갑자기가벼워지며너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네 울음소리도 멀찍이 들렸다.그 순간 수술대를 비추는 커다란 조명이 처음으로 황홀하게 느껴졌다.가슴이 뜨거워졌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그리고간호사 품에 안긴 너를 처음 만났다.
오른쪽 한 번, 왼쪽 한 번.
오른쪽으로는 핏덩이인 너를, 왼쪽으로는 초록색 수술 천에 예쁘게 싸인 너를 보았다.
왼쪽의 너를 보고는 나는 "안녕." 인사했다.
그러고는 기억나지 않는 깊은 잠에 들었다.
진통의 영향일까, 고요했던 병원 분위기때문일까.겨울밤의 나른한정취 때문이었을까. 병원에 도착한 저녁부터 잠에서 깬새벽까지의시간에 현실감이 없다. 잠시 꿈을 꾼 듯찰나처럼느껴졌는데 현실에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깨어나고몇몇장면이 스냅숏처럼 떠올랐다.하지만그중 가장 선명한 것은 너를 처음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그때의벅찬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자주 떠올린다.
광속 단위로 달리는 우주선에서는 지구와 다른시공간이 흐른다지. 네가 태어난 밤, 나는우주선을 타고멀리여행한 것만 같다.정적이 흐르는 어두운공간을 지나도착한 곳은새로운 우주가 태동하는현장.나는 그 모습을숨죽여 바라본다.그렇게기다림이 이어지던순간, 너의 울음소리와 함께작고 새로운 우주가창대히열리기시작했다. 나는폭발적인빛으로검은세계를 밝히는 너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우주와 만났다. 경이로움으로 너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