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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그늘 Aug 08. 2020

페어 러브(fair love)

평범하지 않은 듯 평범한 연애 얘기

    나이 50줄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형만. 그는 친구 기혁에게 사기를 당해 모은 돈도 다 날리고, 집도 차도 없이 카메라 작업실 하나를 운영하며 살고 있습니다. 카메라 수리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맞이하며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던 그에게 예기치 못한 로맨스가 찾아옵니다.

    간암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혁의 소식을 듣게 된 형만은 오랜만에 그를 찾습니다. 그런 그에게 기혁은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자기 딸을 가끔 돌봐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염치없는 삶을 마감합니다. 형만은 너는 항상 그런 식이였다며 기혁을 원망하지만, 부탁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의 딸 남은을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오래전 기억 속 꼬마 숙녀는 부쩍 커버려 스물다섯 대학생이 되어 있었고, 아버지에 이어 기르던 고양이까지 세상을 떠나며 쓸쓸한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빨래 가지가 어지럽게 놓여있는 집이 대변하듯 힘들게 살아왔을 그녀에게 형만은 측은함을 느낍니다. 남은도 아빠 때문에 돈을 잃어 형편이 변변치 않지만 묵묵하고 진실 되게 살아가는 형만에게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호감을 느낀 것은 남은이 먼저였습니다. 그녀는 이유 없이 형만의 작업실에 들르는가 하면, 빨래를 대신해주겠다며 만날 구실을 만들어갑니다. 형만은 친구의 딸을 어찌할 수 없어 그녀의 마음을 모른척하지만, 청춘의 한창을 달리는 아름다운 그녀를 누군들 거부할 수 있었을까요. 형만 또한 점점 남은에게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커져가는 마음을 도저히 숨길 수 없던 날, 형만은 그녀에게 달려가 고백합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피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연애하자고요.


    삼십 해의 나이 차이도,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도 이들의 사랑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수업 내내 형만을 생각하며 설레는 남은, 오빠라고 부르기를 수줍게 권하는 형만. 이들은 함께 사진을 찍고, 책을 보고, 입을 맞추며 행복한 날을 보냅니다. 이 귀여운 연애의 배경이 되는 2000년대 옛 홍제동의 풍경은 능숙하지도, 풍요롭지도 않지만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는 이들과 잘 어울립니다. 여기에 초록이 절정이 되는 5월의 풍경이 더해지며, 장면 장면마다 싱그러운 풀빛이 묻어납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모든 연애가 그러하듯 이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납니다. 남은은 형만에게 사진작가가 되라고 권하지만 나이가 들면 변하는 게 힘들다는 그의 대답에 실망합니다. 형만도 남은에게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생각해야 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이들의 얘기는 서로에게 이해되지 않은 채 허공을 맴돕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아직 젊기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성장하고 싶은 남은과, 사는 게 대단치 않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중년의 형만 사이의 간극은 쉽게 좁혀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남은이 이별을 통보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녀의 집 앞에 찾아가 애원도 해보았지만 소용없습니다. 형만은 슬픔에 못 이겨 작업실 후배들 앞에서 아이처럼 울어버립니다.

    이별의 후폭풍이 잦아든 어느 날, 병실에서 잠이 든 형만에게 남은이 찾아옵니다. 언젠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영롱한 풍경 소리와 함께 그녀는 환영처럼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읊조리는 남은과 잠든 형만이 교차되던 화면은 이들이 함께 했던 추억 속 바닷가와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형만의 모습으로 전환됩니다. 그날 형만이 사진기에 담았을 법한 노을 진 하늘과 석양에 일렁이는 잔물결, 카메라를 든 형만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남은의 모습이 보입니다. 멀찍이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주문처럼 말합니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실제로 남은이 돌아온 것일 수도, 형만의 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꿈이건 현실이건 간에 마지막 장면 속 남은의 대사 한 대목이 마음 깊이 와 닿아 자꾸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변할 수도 있고, 내가 무뎌질 수도 있고 오빠가 변할 수도 있고,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백 프로는 아니니까. 매 순간, 매 순간, 뭐든지, 어떤 면으로는 오십 대 오십이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관계를 이어감에 있어 내 어려움이 상대의 것보다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 사람과의 만남이 손해인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요. 영화 속 형만도 친구의 딸과 사귀는 것에 대한 사회적 비난에, 남은도 나이 많은 아저씨에게 청춘을 바치고 있다는 생각에 이 연애가 억울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간의 관계란, 영화의 제목처럼 많은 경우 페어(fair)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연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어떤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서로에 대한 마음의 크기도 항상 같을 수는 없으니까, 결국 누구 하나 크게 억울할 것 없이 50 대 50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은이 남긴 말은 당신이 희생하는 절반의 부분에 대해서도 내 것처럼 여기고 존중하겠다는 의지로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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