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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그늘 Mar 31. 2019

지슬-끝나지 않는 세월 2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에서부터 한라산 중산간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된 1954년 9월 2일까지 벌어졌던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일련의 무력 충돌 사건입니다. 좀 더 정치사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광복 이후 첨예한 이념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아 양 진영 간 죽고 죽임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을 영상물로 다루는 방식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것입니다. 학살의 흔적을 보여주거나 피해자들을 인터뷰함으로써 사건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할 수도 있고,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기승전결이 뚜렷한 큰 줄기의 전개를 토대로 끔찍했던 당시를 간접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은 조금은 특이하게 제의(祭儀)의 형태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신위(神位, 영혼을 모셔 앉힘)-신묘(神廟, 영혼이 머무는 곳)-음복(飮福, 죽은 자가 남긴 음식)-소지(掃地, 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와 같은 네 개의 제의 용어를 시간별로 나열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형식을 통해 당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혼들을 위로하려는 숙연함이 느껴집니다.

  영화는 토벌당하는 자와 토벌하는 자를 번갈아 보이며 전개됩니다. 토벌당하는 자, 즉 영문도 모른 채 살던 마을을 떠나야 하는 주민들은 도대체 왜 피신을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빨갱이 폭도로 명명되고 있다는 것도, 이 토벌작전이 일제 강점기 때의 공습과 무엇이 다른 지도 모르는 채 마을을 떠나 한라산으로 피신을 갑니다.

  허리를 제대로 펼 수조차 없는 동굴에 비좁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이들의 은신처가 얼마나 열악한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동굴 속에서도 불평하기는커녕 지슬(감자)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정겨운 대화를 나눕니다. 이를 테면 ‘돼지 밥을 주지 않고 여기 와버렸다’, ‘서로의 돼지를 접시켜주자’, ‘그렇게 나온 새끼 돼지는 누구의 것이냐’ 얘기하며 곧 동굴에서 나와 다시 마을로 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런 선량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자명한 결말을 생각하면 더 이상 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먹먹하고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영화의 다른 한 편에는 토벌하는 자, 즉 제주의 폭도들을 무력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있습니다. 감독이 그리는 군인들은 무자비하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악인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차마 주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어 배식을 금지당하기도 하고(박상덕), 탈영 후 주민의 편에 서서 투신하기도 합니다(김동수). 이렇게 끝까지 살육의 현장을 거부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 누가 이 사건의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모호해지면서 그저 처한 입장과 역할이 달랐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편 박일병(박상덕)과 김이병(김동수)과 상반되는 인물로 항상 마약을 찾고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김상사’가 있습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김상사를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집되어 전장에 끌려갔다가 아편에 중독되고 살인에 무뎌진 인물로 상정했다고 말합니다. 명령에 동원되어 원치 않게 사람들을 죽여야 했던 군인들만이 아니라 전쟁을 겪은 뒤 살인광이 되어 돌아온 김상사까지도 슬픈 역사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감독은 제주도라는 공간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심상들을 영화 속에 구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섬을, 세속과는 다소 동떨어진 초월적인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자욱한 구름과 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초가집으로 이어지는 첫 장면은 마치 토속신들이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은 태초의 원시성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감독은 ‘정길’을 통해 제주의 신을 형상화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정길은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인물로 처음에는 김상사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부하 군인쯤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러다가 영화 후반부 정길이 불붙은 솥에 부채질을 하면서 ‘이제 그만 죽여요’라고 읊조리고, 김상사의 ‘살려 달라’는 목소리가 오버랩되며 그를 단죄하는 듯 보이게 합니다.   

  이처럼 감독이 생각하는 제주의 신은 인간 세상에 직접 참여하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辨)을 읽고 영화를 보아도 정길이 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군인 무리 속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서식만 했지 아무 개입도 하지 않는 방관자의 모습인지, 아니면 인간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 하는 모습인지 애매합니다만, 만일 그 당시 진정 신이 함께 하고 있었다면 후자의 모습이었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전쟁을 목도한 한 작가가 그 참담함을 고발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처럼, 감독도 사랑하는 고향을 핏빛으로 물들게 한 지난날을 여럿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단 감독뿐만이 아니라 배우, 스텝들 모두 혼연의 힘을 다해 이 영화에 몰입했었던 흔적이 영화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애국반공이든 공산주의든, 그 당시 핏줄 세우며 외쳤던 대의들은 몇몇 사람들의 이기(利己)로 얼룩진 채 치졸한 구호로 전락해 버리고 의미 없는 희생만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도처의 끝나지 않는 싸움과, 학살, 그리고 죽음들을 바라보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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