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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엘 Apr 11. 2020

U2 영접

2018년 하반기에 큰 화제가 되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마지막 약 20분 동안 밴드 퀸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무대를 완벽하게 재현한 것으로 찬사를 받았다. 라이브 에이드는 1985년에 열린 에티오피아 난민을 돕기 위한 자금을 모으는 자선 콘서트로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랐던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에서 밴드 퀸의 재현 무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는데 여기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구름 떼 같은 관객 속에서 날리던 U2의 깃발이었다. 이 장면을 보고 당시 현장을 꼼꼼하게 재현하려고 했던 제작진의 노력에 감탄했고, 이미 그때 월드스타였던 U2가 아직까지, 아니 오히려 이제는 더 이상 높이 오를 데가 없는 경지에 이른 밴드로 현존하고 있다는 것에 더 감탄했다. 그래서 영화에서 퀸의 (재현) 무대에도 무척 감동했지만 U2 깃발이 보일 때마다 더 소름이 돋았다.


1985년 실제 라이브 에이드 퀸의 무대. 오른쪽에 붉은색 글씨로 U2라고 쓰여 있는 깃발이 보인다. 페스티벌은 역시 깃발이지.

사진 출처 : 유튜브 채널 'Live Aid'의 영상에서 캡처.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0ORIoUohBUc


내 평생 꼭 보고 싶은 밴드 중 U2는 0순위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해왔다. 그저 막연한 꿈으로만 여겨왔던 U2가 작년에 꿈같은 내한 소식을 전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1976년에 결성, 스쿨밴드로 시작한 네 명의 아이들이 단 한 번의 멤버 교체 없이 노인이 된 전설의 밴드, 아일랜드의 상징이자 전 세계에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는 밴드, 자선 단체를 결성하고 각종 단체를 후원하며 정치계의 거물이 된 보노. 이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콜드 플레이 내한에 이어 나의 꿈이 이렇게 또 한 번 쉽게 실현된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내한은 1988년 U2에게 첫 그래미 수상을 안겼던 앨범 조슈아 트리(The Joshua Tree)와 동명 타이틀을 가진 월드 투어로, 이 앨범이 워낙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으로 큰 뜻을 품고 있고 무엇보다 수록곡이 하나같이 너무 레전드여서 이 앨범 트랙리스트로 꾸미는 투어를 간다는 것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근데 그것을 고작 내 나이 30 중반에 이룬다고? 이렇게 일찍? 그래도 되나 싶었다.


친구와 일찌감치 예매를 마치고 장장 6개월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 저녁에 U2를 영접하게 되었다. 나의 종강파티를 U2와 하게 되다니. 조슈아 트리는 거대한 스크린을 주목해야 한다기에 좌석으로 갈까 하다가 또 고척돔은 좌석 시야가 개판이라는 악평이 많아 고심 끝에 스탠딩으로 갔다. 처음 가본 고척돔은 생각보다 매우 좁았다. 전국에서 U2를 영접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페스티벌이나 내한 공연 때 늘 생각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평소에 어디에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 내 주위엔 한 명도 없는 것 같은데 공연만 하면 몇 만 명이 운집되니 신기할 따름이다.


스탠딩 맨 뒤 널널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거대한 나무 모양의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조명이 꺼지고 Sunday Bloody Sunday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Sunday Bloody Sunday는 피의 일요일 참사의 잔혹함에 대항하는 곡으로 영국군에 의해 희생된 북아일랜드인을 추모함과 동시에 영국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이 담겨 있다. 이걸 내가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듣는다고? 꼭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었다. 첫 곡이 나오자 주위 관객들이 미친 듯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 감동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첫 곡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건 내가 예상한 U2 사운드가 아니었다. 분명 세계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투어라고 알려져 있는데.. 단순 하울링 정도가 아니라 음향사고 같았다. 공연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사고 같은데.... 그냥 진행되는 건가 의문을 가진 채로 지켜봤다. 무대는 하나도 안 보이고 앞사람들의 스마트폰 촬영 화면이 수백 개 보였다. 환한 조명일 때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으나 아주 깜깜한 조명에서도 보란 듯이 스마트폰을 켜고 촬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내 바로 옆 남성의 스마트폰 조명이 너무 강해서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사운드에 놀랐고 관객들의 스마트폰 테러에 또 한 번 놀랐다. 어쨌거나 U2는 1980년대의 명곡을 부르고 있었고 2019년의 관객들은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타임슬립인가 싶었다.


이 투어에서 가장 기대하고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는 울트라 바이올렛(Ultra Violet)을 부를 때 과연 스크린에 누구를 띄울 것인지 여부였다. 이 곡에서 이번 조슈아 트리 월드 투어를 돌며 각 나라의 여성인권신장에 기여한 인물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스크린에 출연할까 기대되던 참이었다. 부제 Light my way를 읊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차례로 인물이 나타났다. 서지현 검사, 이수정 교수,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얼마 전 안타깝게 숨진 설리 등, 한 명씩 나올 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와 탄식이 섞여 나왔다. 물론 국내 주관사 스탭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프로젝트였겠지만 U2의 방향성이 여실히 드러난 무대였다.



역시 조슈아 트리는 소문대로 스크린 잔치였다. 미국의 무기판매 비판을 암시하는 미국 컨트리 목장인들의 매서운 눈빛,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자연환경 속에서 끝없이 펼쳐진 도로를 천천히 내달리는 자동차 등, 스크린에 펼쳐진 장면은 자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매가 선명했고 강인한 어깨를 가졌다. 그 어떤 탄압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그들의 입매에서 드러났다.


시험도 끝났겠다 레전드 끝판왕 One 이 나오면 그동안의 설움을 씻으며 오열하려고 만발의 준비를 했지만 스마트폰 테러와 음향 덕분에 눈물은 쥐똥만큼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공연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정리가 하나도 안 되는 혼란 속에서 허무하게 끝났다.




혹자는 보노가 대놓고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한 행보를 걷는다고 한다. 목적이 득표든 여론을 얻기 위함이든 이미지 개선이든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국민의 안위를 챙기는 국회의원에게 마음이 가는 것처럼,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본인들의 북아일랜드와의 분단 경험을 나누고, 모두가 평등할 때 까지는 평등한 게 아니라고 노래할 수 있는 U2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곡이 훌륭함은 뭐 말할 것도 없으니. 결국 나는 아일랜드에서 다시 U2를 보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내한보다는 훨씬 실현 가능하지 않을까. 더블린, 다시 가야 된다.


 

역사적인 현장에 있었다. 저 나무가 바로 조슈아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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