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3 토로하다 제 0장
항상 처음은 어렵다. 사실 내가 '도전'이라는 단어를 싫어한 탓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든 처음은 막막하고 손은 머리를 쥐어뜯는다.
주변에서 블로그를 업로드할 때마다 의구심이 들었다. 특히 일상을 기록하고 감정을 새기는 것에 말이다. 이런 과정에 무슨 의미가 있으며 시간 낭비 같다고까지 생각해봤다. 그렇기에 책상에 앉아 블로그 화면을 앞에 두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 자신이 익숙하지 않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될 줄 몰랐음과 더불어 시작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이 처음이다.
2022.03.03. 이모부가 별세하셨다. 일주일 전에 운동을 끝내고 핸드폰을 보니 엄마에게 부재중 전화가 2통 와있었다. 엄마와는 매일 전화를 하는 편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그치고 3초. 정확히 3초였다. '여보세요'라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전화기 뒤로 울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생각이 멈췄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무슨 일이 있냐고도 물어보지 못했다. 약간의 정적은 엄마에게 숨을 고를 시간을 준 것 같았고 엄마의 첫마디는 '이모부가 곧 돌아가신대'였다.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자, 엄마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줬고 '밥 잘 챙겨 먹어'라는 말과 함께 뚜 뚜 뚜 소리는 나를 불안감으로 감쌌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얼어붙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내 귀에 에어팟이 없었던 적은 처음일 것이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았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분명히 이틀 전에 영상통화로 안부를 물었던 이모부인데 갑자기 돌아가신다니, 계속해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말해준 이모부의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자세히 글에 남길 수는 없지만 사고였다. 뇌가 다치신 상태로 2시간 이후에 발견되셨다고 했다. 골든타임을 훌쩍 넘긴 탓에 뇌사를 판정받으셨고 기적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시간을 비워놓으라는 엄마의 말에 곧바로 4일 정도의 일정을 깨뜨렸다. 무능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장 포항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엄마는 반대했고, 이모와 친척 형의 슬픔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어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로부터 4일의 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일정을 비울 수 없었고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가 쌓여있던 일을 처리했다. 일하는 동안은 절망과 슬픔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잠깐이었다.
저녁 9시였다. 원래 엄마는 7~8시 정도에 이른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8시를 넘겨서 연락을 해 본 적은 극히 드물다. 저녁 9시에 엄마에게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는 알람을 확인했다. 곧바로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위의 이유로 이모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제발 아니기를,, 머리를 감싸며 문자를 확인했다. 원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이모부가 별세하셨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문자를 보자마자 넋이 나갔다. 30분 동안은 그 문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자취방의 정적을 깨준 건 다름 아닌 엄마의 전화였고, 장례식장의 주소와 함께 내일 저녁쯤에 포항에 도착하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바로 기차표를 예약했으며 그날 밤 내내 장례식 예절에 대해 알아봤다. 장례식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했고, 더욱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던 밤이 지나가고 오지 않았으면 했던 아침이 밝았다. 평소 아침밥을 반드시 챙겨 먹는 편이지만, 이날은 달랐다.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자기 전에 준비해둔 양복을 입었고 검은색 양말을 신었다. 지원실에 들러 넥타이를 챙기고 급한 발걸음으로 지하철을 탔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포항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탔고, 장례식장에 도착하기 10분 전이었다. 이때부터였다. 평소 수족냉증 때문에 차운 손은 더욱 차갑다는 것을 느꼈고 다리를 엄청나게 떨고 있었다. 점점 긴장했고 떨렸다. 택시에서 내려 장례식장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내부 전광판은 나를 무너뜨렸다. 이모부의 성함이 보였고 내내 참아왔던 눈물이 조금 흘렀다. 장례식장에 있을 이모와 친척 형, 그리고 이모부에게 눈물을 보이며 인사할 수 없기에 급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부조금을 부조함에 넣고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이모와 이모부의 가족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그 후 이모부에게 절을 드렸다. 2번 절을 하고 목례했다. 이모부에게 절을 드리고 친족분들과 절을 나눠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목례하고 고개를 들어 이모부의 사진을 보니, 지금까지 쌓아왔던 슬픔이 찾아온 것이다. 목례 후 이모부에게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이모부의 빈소에서 한참을 울었다. 이모가 꼭 끌어안아 줬고 눈물을 닦아주시며 일단 밥을 먹자고 하셨다.
밥을 먹으며 이모와 대화를 나눴다. 며칠 동안 밤잠 설치신 이모의 눈 밑에는 눈 그늘이 가득했다. 위로의 말을 건네며 조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아빠가 도착했고 이모와 아빠가 대화를 나눌 때,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이모부에게 아무런 인사도, 말도 전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빈소에 들어가서 이모부를 만났다. 일반적인 영정사진과 달리 이모부의 사진은 밝았다. 밝아도 너무 밝았다. 이모부의 환한 웃음 뒤로 바다가 보였다. 사진을 보니 아까보다 울음이 더 터져 나왔다. 계속 흐르는 눈물을 뒤로하고 이모부에게 다시 인사를 드리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했다. 진심으로, 몇 번이고 다시 말했고 그곳에서 편하게 쉬시기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다 전하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태어난 뒤로 가장 많이 울었다. 아무리 참아도 눈물은 새어 나왔고 마스크를 다 젖게 했다. 다시 이모와 아빠가 있는 자리로 돌아가서 괜찮은 척을 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한 없이 울었다. 이모 앞에서는 정말 울고 싶지 않았다. 이모의 슬픔을 덜어주지 못할망정 더 슬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평소 눈물이 없는 내가 계속 울고 있던 탓일까, 이모와 아빠가 애써 눈물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아빠의 눈가는 이미 촉촉했지만, 눈물을 흘리시지는 않았다. 이모부의 직장 동료분들이 계속해서 오셔서 아빠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고, 구두를 신으며 이모부의 사진을 계속해서 봤다. '다시 올게요, 고생 많으셨고 푹 쉬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장례식장을 나왔다.
다음날이 이모부의 발인 날이었기 때문에 하룻밤을 이모 집에서 보냈다. 이모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눈물이 계속 나왔고 조금 진정하고 들어가겠다고 아빠에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아파트 구석진 곳으로 가서 찬바람을 맞으며 계속 울었다. 그러던 도중, 형이 다가와서 어깨를 잡으며 위로해줬다. 형은 '형은 아까 울지 않았는데 네가 우니까 눈물이 난다' 하며 안경 사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형이랑 대화를 나누고 집에 들어와 엄마를 꼭 끌어안았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잠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모부의 발인이 진행되었고 다시 돌아오시지 않는 여행을 떠나시는 이모부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모부의 직장이셨던 포항공대를 형과 함께 한 바퀴 돌았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김제 화장터까지 따라가고 싶었지만 다른 어른분들이 너무 많으셨고 엄마와 아빠의 만류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장례식장.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경험했고 그렇게 오랜 기간 슬픔에 잠겨본 것도 처음이었다. 후에 들었지만, 이모부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날 승진을 하셨다. 이모부가 사고 당일 출근하실 때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도 꼭 생긴다더라' 하며 이모와 친척 형에게 조심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출근하셨다고 한다. 이 말은 슬픔을 배로 해주었다. 그런 말을 직접 하신 이모부가 사고를 당하셨고, 끝내 돌아가셨다.
지나온 일에 대해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이모부는 정말 좋은 분이셨다. 경상도 특유 말투와 재치 있는 농담으로 항상 명절 때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해 주셨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자주 뵙지 못했지만, 항상 보고 싶은 분으로 마음에 남아있었다. 사고를 당하시기 이틀 전 영상통화에서 더 대화를 나눌걸, 더 시간을 보낼걸,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안아볼걸. 이모부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 정말 많이 후회했다. 이렇게 우울한 생각도 가득하지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소중한 이보무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 배우고 느낀 점이 정말 많다. 처음 경험해보는 '죽음'은 나에게 앞으로의 삶에 대해 물음표를 던져 주었다.
순간은 나에게 별로 소중하지 않았다. 그 순간이 추억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순간의 소중함에 대해서 깊이 공감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기보다는 내 인생에 대해 항상 고민했고 우선시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도 잘하지 못할뿐더러 나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때 힘든 일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 자체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모든 일을 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했고 나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 과감히 쳐냈다. 앞에서 나는 말했듯이 지나온 일에 후회를 많이 편이다. 그렇지만 이 문단의 가치관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이 없다. 이렇게 살아오며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 안 되지만 내 주변에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남아있으며 그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아깝지 않다. 그러나 내가 틀렸던 것 같다. 전부를 틀렸다고 생각할 순 없지만, 순간의 소중함에 대해 간과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서로 시간을 공유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소중한 일이었다. 그게 가족이라면 더더욱. 가까운 사이일수록 소중함에 대해 무뎌질 때가 많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고 싶다.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짧은 시간, 조그만 추억 하나하나 내 눈에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둘 것이다.
이모부와 짧은 영상통화에서 마지막 말은 '이야, 민규는 점점 더 멋있어지네'였다. 이 말을 난 마음속에 꼭 새기려 한다. 우리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게 멋있는 막내아들이 되어서 엄마, 아빠, 형뿐만 아니라 이모, 친척 형에게 도움이 되고 자랑이 되고 싶다. 사실 이모부에게 드린 마지막 인사는 ' 다음에는 더 멋진 민규가 돼서 이모부 찾아올게요.'였다. 이모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다시 찾아가서 인사드릴게요. 그때는 더 많은 대화 나눴으면 좋겠어요.
처음 브런치에 써내려 본 글이라 두서없이 글을 써 내려갔던 것 같다. 다음 글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도전'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토로하지 못한 역설을 토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