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같은 인터뷰 #35
128일간의 탐라 유배기간에는 단 한 건의 인터뷰 신청이 있었어요. 인터뷰이는 심하게 방황하는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저는 언제나 그렇듯 그런 인터뷰이에게 바로 찾아가지 못했어요. 륙지에 다시 온 뒤로도 보름을 조금 넘기고 나서야 커피를 두 잔 두고 마주 했어요. 오랜만이었어요. 인터뷰도, 인터뷰이를 만난 것도 오랜만이었어요. 카페가 시끌시끌한 보니 우리 말고도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지만 우리는 침착하고 느긋하게 반가움을 표현했어요. 그냥 사는 얘기나 주고 받으면서요
뭘 기대하고 오셨어요??
인터뷰.
뭐 생각하신 예상 질문이라도...?
근황 물어보고 그런 거 생각했지.
맞아! 그거야. 얘기해.
뭐야ㅋㅋㅋㅋㅋㅋㅋ 그냥 혼자 떠들어?
물어볼거야 천천히. 유배 다녀오느라 인터뷰가 늦어졌지만 너님이 신청했던 건 3학년 2학기를 다니고 있을 때잖아. 아주 죽으려고 하던데... 살려달라고 하는 느낌이었어.
그 때가 시험 기간이었는데 슬럼프가 너무 심하게 왔어. 3학년 되면서부터 하는 공부가 나랑 너무 안 맞는 거야. 나 학교 늦게 들어간 건 알지? 하여튼 공부가 너무 안 맞고 붙잡고 있어도 머리는 아프고... 원래 공대가 취업 깡패였는데 요즘은 또 아니라고 하더라. 취업이 되는 것도 힘든데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미래가 그렇게 창창하지 않아.
왜애?
엔지니어야... 뭐 사실상 거의 노예라고 알려져 있는데... 대한민국 월급쟁이들이 다 힘들겠지만 좀 심하대. 주말에도 일 나가니까 자기 삶도 없고. 지금 나름 공부를 열심히 해도 미래가 그렇다는 거야. 진짜 안 되는 머리로 따라가려고 나름 열심히 공부해도 계속 그런 걱정이나 스트레스가 누적되는 거 같아. ‘잘 풀리겠지’ 라고 생각하다가도 과제가 물밀듯이 들어오면 또 미치겠는... 그럴 때 있잖아.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때도 어김없이 과제가 밀려오더라고. 과제는 과제대로 완벽하게 해야 하니까 그거 하다가 시간을 너무 많이 쏟았어. 시험이 일주일 남았는데 공부를 그제야 시작하려니까 너무 막막한 거야. 걱정이랑 압박감이 한 번에 오니까 슬럼프가 왔던 것 같아. 아무튼 공부를 안 했어. 도서관도 안 가고.
원래 기숙사살다가 3-2부터 자취를 처음 시작했거든. 그냥 집에 혼자 있는 거야. 미치겠더라. 혼자 있으니까 외롭고 공부는 힘들고. 아무 생각 없이 페이스 북이나 눌러보다가 신청했어. 그 전에 한 번 보긴 했었어. 재밌겠다 싶긴 했는데 내가 인터뷰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힘들고 하니까 ‘아 어디 가서 신세한탄이나 하고 싶은데...’ 생각하다가 연락한 거야. 장난 반 진담 반.
근데 진짜 그때의 심경을 담았는지... ‘공부하기 싫다. 사는 게 재미없다. 살기 싫다.’ 라고 썼어.
ㅋㅋㅋㅋㅋㅋㅋㅋ 살기 싫다고 까지 썼어?
ㅇㅇ
아... 살기 싫다 까진 모르겠는데 아직까지도 인생이 노잼인 건 사실이야.
지루한 걸까?
얘기했던 삶이 계속 진행 중이야. 내가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 계속하다가... 취업을 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고... 내가 가려는 분야가 일이 힘들어서 이직도 많이 한다더라. 그런 얘기가 들리고 그게 내 삶이겠구나 하는 게 딱 보이니까...
공부하는데 의욕이 생길만한 얘기는 아니네.
그냥 당장의 시험점수를 위해서만 공부하는 거지. 별 목표의식 없이.
전공은? 전공은 원래 생각했던 게 아니야?
고등학교 때 대부분이 이렇게 공부하지 않을까. 성적 나왔으니까 이거 맞춰서 학과 이름만 보고, 어 이 학과 괜찮을 거 같은데... 결국엔 취업 잘 되는 학과. 이과는 전화기라고 해서 전자, 화학, 기계가 취업 잘된다고 하잖아. 난 원래 컴퓨터에 관심 있었어. 근데 또 컴공은 노예라는 소리를 들어가지고. 밤새 코딩만하면서 담배 두 갑씩 피고.
그래도 전자공학과는 좀 넓은 범주니까 선택했거든. 첫 수능 때도 전자공학과를 붙었는데 고3 때 약간 그런 거 있잖아. 아 내가 어느 학교 정도는 가야하지 않나. 그래서 재수했지. 당당하게. 결과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더 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한 학기 다니다가 결국 다시 반수해서 왔어.
그래도 전보다 만족스러웠나 보네.
처음엔 좋았지. 아 그래도 어느 순위 안에 드는 학교에 갔다는 게. 그리고 어쨌든 입학을 해서, 대학에 와서 다행이다 정도의 마음도 있었고. 근데 가서 공부는 거의 안 했어. 연애에 미쳐가지고. (행복?) 행복했지 그땐. 학점 2점인데도 만족했어. 사는 게 행복하니까. 지금은 학점이 4점대가 나와. 근데...
오 행복하진 않아?
전혀. 오히려 부담스러워.
고민해결!
뭐. 연애해야 한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요즘 재미없다. 행복하지 않다. 살기 싫다. 느끼면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거 아니야. 콕 찝어서 물어본 건 아니지만 결국 그때랑 지금이 뭐가 다른지 보면 되지 않을까.
답인 것 같기도 하면서도.. 내가 계속 연애를 했다면 공부를 이만큼 했을까. 지금 나한테 유일한 무기는 학점이거든. 아무것도 없어. 대외활동도 안 하고 그냥 저냥 앞에 놓인 거만 하고 있어.
너님이 한 말대로 별 목표의식이 없어서 의욕이 안 생기는 거 아닐까. 미래를 그려도 힘이 빠지니까... 후회한다고도 썼던데.
어떤 걸?
그건 나도 몰라. 그냥 후회한다고 써놨어 너님이.
너무 막연하게 산거지. 초 중 고등학교 생활부터해서 막연하게. 내가 나중에 뭐하고 살까 이런 고민을 어릴 때부터 했으면 조금이라도 방향이 잡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 아니면 기억이 안 나는 걸까.
계속해서 현실이랑 타협했던 것 같아. 어릴 때는 막연하게라도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하고 싶었어. 사실은 게임 좋아해서 프로게이머가 하고 싶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더라고. 게임으로 밥 먹고 살 자신도... 그래서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가 되고 싶었는데 점점 들리는 거지. 그 삶이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다는 게. 아 그럼 딴 거 해볼까? 근데 딴 거 하고 싶은 게 없어. 그렇게 범위를 넓혀가면서 결국엔 성적 맞춰서...
아까 전공을 선택할 때도... 그 듣는다는 게?
여러 가지 많이 알아보지. 주위에 물어도 보고.
결국 너님 스스로 알아보고 판단 한 거지 외부의 영향이 특별히 있었다는 건 아니네. 그럼 뭘 후회하는 걸까.
근데 그때 하고 싶은 걸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걸 얼마나 열심히 했을지는 모르겠어. 뭐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답은 없네.ㅋㅋㅋㅋ 정확하게 뭘 후회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생각 없이 살았다는 느낌이 계속 들어. 연애할 때도 연애하더라도 공부를 좀 챙겼어야 하는데 공부를 너무 안 했고. 2학년 때부터는 너무 공부만 해서 연애든 운동이든,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도 있고. 방학 때마다 뭐 준비한다고 여행도 많이 못 다녀봤어. 해외도 한 번도 안 나가봤거든. 이번 방학 때도 아무것도 안 하고 토스 하나 땄다 지금.
그래서 물어 봤던 게 해야 할 일이 없으면 하고 싶은 일이야. 해야 할 일에 밀려서 하고 싶은 일이 막혀있으면 고민도 생각도 쓸데없이 불어나서 피곤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여유가 필요하다고 썼더라고. 그냥 음악 듣고 싶다. 책 읽고 싶다. 커피 한 잔 하고 싶다.
진짜 아무 것도 할 일 없으면 책 보고 영화보고 운동하고 하지. 근데 그게 너무 욕심이지. 말도 안 되는.
오! 왜!
일을 해야지 사람이.
조급하니? 난 쉬 마릴 때 빼곤 괜찮던데.
난 엄청 조급하지. 삼수까지 했으니까. 학교 다니면서 보는 애들 동생들이야 전부 다. 얘들이랑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아 더 늦기 전에 빨리 취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급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래서 학점에 더 목매게 되는 것도 있겠다.
학점에 대한 압박 때문에 인간관계가 좀 망가지는 것 같기도 해. 예를 들어 어떤 팀 프로젝트에서 친한 동기랑 같이 실험을 하다가 나랑 안 맞는 부분이 있으면 얘가 좀 싫어지는 거. 분명 내가 봤을 땐 이렇게 해야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생각이 다른 거지. 진짜 친한 동긴데 같은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 성적이 나는 일찍부터 미친 듯이 공부했는데 걔는 하루 이틀 공부해서 나보다 성적을 잘 받아. 그럼 또 싫어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 솔직해.
아 무슨 고등학교 때도 이런 생각은 안 했었는데. 그냥 미친 거야. 성적이 뭐라고 친구를 미워해. 한창 슬럼프라고 할 당시에는 진짜 미쳐있으니까. 시험 끝나고 술 한 잔 할 때 동기 한 명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형은 시험만 끝나면 정상인이 된다고ㅋㅋㅋㅋㅋㅋㅋㅋ 시험만 끝나면 멀쩡한데 시험기간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도냐고. 그런 상황도 후회되는 거지. 왜 좀 더 여유를 못 가질까 싶고. 무슨 의미가 있니. 학점 잘 받는 게. 근데 이제 다시 개강하지? 그럼 또 안 그래ㅋㅋㅋㅋㅋㅋ 취업해야 하니까...
상상해보자! 가고 싶은 회사에 가면 어떨까.
가도 와~! 자부심! 뿌듯함! 이런 건 없을 거 같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명히 없을 거고. 아 다행이다. 됐구나. 이정도. 이 땅에서 돈은 벌 수 있겠구나. 그 이상은 없을 거 같아. 사실 일해보지 않고선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그래. 나름대로 상상을 해보자면.
너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지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게 최선이긴 해. 다른 걸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대기업이잖아. 취업은 해야겠는데 대기업이니까. 중소기업은 못 가겠고. 자존심이...
자존심 때문에 못 간다고?
자존심이지 당연히. 부모님 눈치도 많이 보이고. 삼수까지 해서 등골 휘게 하면서 대학 갔으면 더 좋은 데 가야지.
그러면 너님이 원하는 ‘비 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는 생기려나.
소소한 행복은 느낄 수 있겠지. 근데 그 여유가 필요할 만큼 일상이 무너지잖아. 그리고 내가 예상하는 업무랑은 다르대. 지금까지 공부한 전공지식을 써먹고 계발하고 연구한다기보다 그냥 시키는 거 하고 잔업무하고. 남들한테는 잘 갔다는 얘기 들으면서 살 수 있는데 행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러니까 빌어드실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거 말고 다 초월한 상태에서 하고 싶은 건?
사실 그것도 문제였어. 하고 싶은 게 없는 거. 하고 싶은 걸 못 찾았다는 것도 후회하거든. 뭐 지금 당장 생각해보면... 고생 안 하고 돈 벌 수 있는 거 있잖아. 책을 하나 읽었었는데 부의 추월차선이라고...
뭔가 말이 멋있다.
그 책에선 취업해서 월급 받으면 평생 못 번다고 돈이 열리는 나무를 만들어야 한대. 그 저자는 무슨 웹 사이트를 만들어서 일하는 건 별로 없는데 광고 수익 이런 걸로 돈이 그냥 벌리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돈을 벌고 싶어. 그게 임대업인가. 돈이 저절로 벌리는 동안 난 그거 가지고 공부하고 놀고. 아니 공부란다. 책보고 운동하고 놀고. 얼마나 행복하겠냐. 근데 막 얘기하니까 재밌긴 한데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얘기해도 되냐.
이 인터뷰는 알아서 저절로 정리 돼. 걱정 마.
거의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맞아. 잘 하고 있는 거야. 근데 인터뷰 신청서 쓰고 네 달 정도 지났잖아. 그때랑 비교해서 지금은 좀 달라진 게 있어?
아까 내가 시험만 끝나면 달라진다고 그랬잖아. 모르겠어. 지금 이야기한다고 해도 계속 이럴 것 같지도 않고. 또 학기 들어가면 ‘인터뷰 한 번 더 하자...’ 할 수도 있고. 그 당시에는 약간 한탄하고 싶었어. 짜증은 나는데 동기들한테 얘기하자니 걔네는 나랑 같은 삶을 사는 애들이고, 부모님한테 얘기하기엔 너무 걱정하실까 봐 불편하고.
동기들은 다들 너랑 비슷한 생각인 거 같아?
동기들이랑 항상 하는 얘기가 뭐냐면... 여기다 욕해도 되니?
ㅇㅇ
“아... 진짜 ㅈ같다 사는 거.”
“아 맞아 ㅈ같애.”
이게 끝이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로 응원해주는 게 아니라 무한루프로 ㅈ같다는 얘기만 주고받으니까 계속 기분도 다운 되는 거 같아. 내가 언제 기분이 좋냐면 고등학교 동창들 만날 때. 걔네 만나서 옛날 고등학교 때 이야기하면 걱정이 사라져. 내가 거기서 ㅈ같다고 얘기해도 걔네들은 각자 다른 길 가는 애들이잖아. 왜 그런 걸 걱정 하냐고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거야. 그런 반응이 오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지지. 동기들하고 얘기하면 다 ㅈ같다고 하니까 마냥 심각해지는데 동창들하고 얘기하면 다른 사람들한텐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싶어서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아. 걔네들도 나름대로 힘든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 중에 졸업한 놈이 한 놈도 없거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등학교 친구들은 보통 어떤 반응인데?
한 번은 혼났어.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부정적이라고. 학점 좋은데 만나서 또 죽겠다 ㅇㅈㄹ 하니까. 그런 게 좀 위안이 됐지. 내 고민이 별거 아닌 것 같아지고. 무슨 얘기하다 이 얘기하고 있냐. 원래 질문이 뭐였지.
아니 그때랑 지금이랑 다르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근데 중간고사 끝나고 부터는 좀 풀렸어. 원래 중도휴학까지 할 생각이었는데 아빠는 또 반대하시고...
그때 휴학해버렸으면 뭐 했을 것 같아?
해외여행 좀 길게 갔다 오지 않았을까.
가보고 싶은데 있어?
그냥 딱히 생각한 데는 없는데.. 뉴욕에 가서 홈리스들이랑 얘기도 해보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물 안에서 나가야되는데 우물 안에 나 같은 개구리들이 좀 많은 것 같아. 현실에 치여 사는 사람 많으니까 나도 안심하고 같이 치여 사는 거지 그냥. 굳이 나가려고 하지 않고.
휴학 한 번쯤은 추천해볼만한데. 난 사실 6개월 휴학 한 번 했는데 정신 차리니까 또 1년째 놀고 있네.ㄲㄲㄲ 그나저나 지난번처럼 슬럼프에 안 빠지려면 어떤 상황이 달라져야 돼?
일단 학점은 좀 만들어놨기 때문에 학점의 부담은 이제 좀 덜어도 될 것 같아. 근데 아직 개강을 안 해봐서 모르겠어. 왜냐면 또 개강해서 경쟁자들을 보면 또 맘이 달라지거든. 근데 이제 최소한 내 친한 동기들은 경쟁자로 안 보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사나워져서?
안 친한 동기들은 경쟁자로 보고. 당연히 경쟁자지 이 힘든 사회에서 살아남아야하는데. 아 경쟁하는 사회인 것도 싫어. 같이 사이좋게 살고 싶은데.
그럼 판에서 벗어나는 것도 방법 아니야?
그걸 못하겠다. 그걸... 용기 있는 애들은 하잖아. 뭐라도 도전해보고. 그런 사람들 중에 성공하는 사람들 많잖아. 난 그런 사람은 아니야.
선택 앞에서 신중해지는구나.
걱정이 엄청 많아. 수년간 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느낀 건데 걱정이 너무 많아. 근데 알면서 못 고쳐. 하나하나 다 불안해 그냥.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ㅋㅋㅋㅋ 옛날엔 이 정도까지 아니었거든. 아니 삼수할 때까지도 걱정을 그렇게 안 했던 것 같아. 수능 볼 때도 긴장을 안 했는데 토익 스피킹 15분짜리 시험, 그거 본다고 잠을 못 잤어. 너무 긴장돼가지고. 못 보면 어떡하지 쩔쩔매느라.
난 그럴 때 문명을 해. 문명의 주인이 되어보면 내 인생이 별거 아니거든.
근데 그게... 도피더라고. 걱정을 안 하는 방법을 찾아야지 도피는 하기 싫어. 원래 휴학도 고민하다가 안 한 게 도피 같아서. 엄청 하고 싶은 게 있거나 뜻이 있으면 하면 하겠는데 그냥 난 공부하기 싫어서 도피하는 거 같으니까.
준비를 하면 걱정이 없지~
준비할 게 많지 아직.
너님의 걱정을 없애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절에 들어가야...ㅋㅋㅋㅋㅋㅋㅋㅋ (도피잖아.) 다른 방식으로 도피지. 아예 속세와 연을 끊는 거니까ㅋㅋㅋㅋㅋㅋ 그냥 해 본 소리고 그걸 알면 내가 걱정을 했을까...
그러게... 어떻게 보면 나한텐 인터뷰가 도피 방지책인 것 같아. 비슷한 고민을 듣다보면 툭 와 닿는 게 많아서 다시 끄집어내 생각해볼 수밖에 없거든. 여튼 고생스런 3학년 2학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봅시다.
재수할 땐 자신감이 있었어. ‘1년 더 하는데 스카이 못 가겠어?’ 하는 생각으로 도서관이랑 독서실 병행하면서 독학으로 공부해서 자신있게 수능 봤어. 근데 수리 5등급... 나 이과인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채점하고 계속 울었어. 방문 밖에 엄마 아빠 있는데 미치겠는 거야. 두 달 동안 집 밖을 안 나갔어. 우울해가지고.
그래도 원서는 써야 되니까 썼어. 그렇게 간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되게 재밌게 놀았지. 맘에 들던 안 들던 어쨌든 첫 대학생활이잖아. 오티도 가고 술도 먹고 토도 하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사람들은 정말 좋았는데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휴학하고 세 번째 수능 봤어. 괜찮았어. 수도권은 가겠다 싶었어. 다 전자계열 전공으로 써서 간 거야. 근데 그 과정들을 돌이켜보면 막연히 공부한 거 같아. 그냥 남들이 인정하는 대학 가야겠다 싶어서. 알바도 동아리도 하면서 평범하게 살다가 1학년 땐 계속 연애만 했어. 4월부터 만나서.
그래서 1학년 땐 신나게 논 거야?
그치. 연애가 70%. 술이 20%. 10% 공부? 이런 식으로ㅋㅋㅋㅋ 그러다 군대를 가. 13년에.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쯤 이별통보를 받아. 진짜 아무것도 못 했어. 사람이 죽어. 거의 자살위기야.
그래도 어느 정도 슬픈 예감을 하고 가지 않나?
왜 그런 건 긍정적인 마인드였는지 모르겠네. 내가 헤어지겠냐. 서로 이렇게 좋아하는데ㅋㅋㅋㅋ 그렇게 생각했지. 입대하기 전에 다들 무조건 헤어지고 가는 게 낫다고 하는데 한편으론 그게 맞을 거 같으면서도 난 아니거든 하고 간 거야. 후반기 교육 끝나면 바로 자대 가잖아. 이등병 생활 적응도 하기 힘든데. 이별도 극복해야 되고...
너님 그때 늙었나보다.
그때 한 번 늙고. 군대에서 다들 겪는 스트레스로 다시 한 번 늙고.
그래도 복학학기에는 의욕이 솟잖아.
진짜 생각으로는 스티브 잡스인데 막상 나오면 또 안 해. 2학년은 학점 메꾸느라... 그래서 2학년은 학점 되게 좋아 4.2, 4.3 이래. 3학년 되면서 하기 싫은 공부하는 스트레스가 누적이 되어서 쌓이다가 터졌던 거지. 돌이켜보니까 그렇게 임팩트 있는 사건 사고는 별로 없었네. 근데 난 니 얘기도 들으려고 했는데.
내 얘기는 녹음 안 해도 되니까 이따가. 아직 봄도 안 왔으니 17년의 목표가 있다면?
목표는 취업인데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이전과는 좀 다르게 하고 싶어.
어떻게?
주변사람들한테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고 싶어. 지금까진 공부 때문에 막 버리고 살았는데 이젠 형으로서, 선배로서, 친구로서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 되고 싶어. 전부터 스스로 느끼던 싫은 내 모습도 바꿔가고.
괜찮은 사람이라. 너님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장점을 모아보면 너님이 생각하는 괜찮은 사람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괜찮다는 생각의 기준은 나니까 스스로 안 좋은 부분이라고 자각하는 것 고치고 있어. 일단 1차원적으로 인상이 좋은 사람? 내가 공부할 때 전혀 안 꾸며. 맨날 추리링만 입고 다니고. 대학생활 얼마 안 남았는데 계속 이러고 다니기가ㅋㅋㅋㅋ 아 그리고 나 그런 소리 엄청 많이 들어. 얼굴에 그늘지고... 말라가지고...
또 내가 발음도 안 좋아. 지금도 말 빠르게 하면 부정확하고. 허리도 굽어가지고 운동하면서 교정도 하고 있고. 성격적인 부분에서 보완하려고. 관계에서도 주변에 다 동생들이니까 애들이 나한테 어느 정도는 존경하는 부분이 있었으면 해. 그동안 신경 못 써서 잃어왔던 걸 유지하면서 취업을 하고 싶다는 게 목표겠다. 아니 취업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니까 하고 싶다는 게 맞을 거 같다.
‘해야 되니까 하고 싶다...’
얼마 전에 스무 살 때부터 쓰던 스케줄러를 뒤적거려봤어요. 부지런히 쓰지는 않아서 빈틈도 많고 알아보기도 힘든 글씨지만 내가 뭐하고 살았는지 궁금해져서 그 뒤로부턴 자꾸 들춰보게 돼요. 그 스케줄러에는 내가 해야 하던 일과 하고 싶던 일들이 뒤섞여 적혀 있었어요. 그 중 내가 한 일들은 빨간색 줄로 슥슥 지워져 사라졌지만 하지 않은 일들은 다음 날에도, 다음 달에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내 머리를 아프게 했어요. 난 지금도 여전히 내 능력 이상으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놓고선 빨간 줄을 긋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어요.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다짐 덕분에 기껏 해낸 일에는 무감각해지고, 실체도 없는 것들에 반성하고 있는 내 꼴이 안쓰러워요.
너님은 나에게 살아 온 얘기, 살아 갈 얘기를 하자고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막상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옮기고 나니 서로의 살아 온 얘기에 비해 살아 갈 얘기가 무척이나 빈약하네요. 해야 하는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이든 사실 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나 봐요. 머릿속에서 두둥실 떠다니던 다짐들이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이야기로 바뀔 때쯤 다시 만나서 서로 살아 온 얘기를 물어봐주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