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같은 인터뷰 #1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7
나는 너님의 중심을 꿰뚫어봐야 했어여. (그나저나 그 때도 키는 중요했나 보옴?)
안녕하세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초장부터 웃는 거지여? 전 항상 이렇게 어색한 인사로 시작해여. 어쨌든 인터뷰 신청 감사드려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자기소개 보낸 게 생각이 나서 되게 민망해가지고. 딱히 내 소개를 하기 애매해서 그렇게 보낸 거였어.
네네 종종 그렇게 쓰신 글을 자기소개로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어여. 근데 그 글이 무슨 주제로 쓰신 거에여?
그냥 3인칭 시점으로 쓰는 자기소개서. 수업 때 썼는데 발표까진 안하고 교수님만 읽으시는 거. (교수님 코멘트는?) 그냥저냥... 뭐 특별한 건 없었는데. (본인이 쓰고 보니까 어땠어여?) 그 수업에서 사람들한테 공개되는 글이 있고 공개되지 않는 글이 있는데 이건 공개되지 않는 거라고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어. 그래서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고 했는데도 좀 솔직하지 못한 부분이 꽤 있어서 그게 좀 아쉬웠고 머리로는 내가 이렇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잘 못 받아들이는 것 같아.(부족한 점을?) 그래서 이 자기소개에도 부족한 점을 별로 안 쓰고 최대한 뭉뚱그려서 쓴? (구체적으로 이만큼 이정도 잘못되어 있는걸 너님 스스로 아는데.) 안 쓰는 거지. 사람들이 그걸 다 아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우연한 기회로 페이스 북 친구를 통해 저희 회사를 알게 되셨다고 하시던데. 그 친구가 누군지만 몰래 알려 주세여. 개궁금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넌데. (;; 내가 너님한테 페친 신청 했나여?) 내가 원래 페이스 북 잘 안하는데 그 날 우연히 로그인 했다가 친구 신청 왔길래 수락했더니 타임라인에 그 입술 같은 게 떴어. 이게 뭐지 하고 본거지.
흠흠 민망하네여. 그나저나 자기소개로 보내준 글에 중략이 많아서 화났어여. 궁금증 유발하는 의도적 작전인가여?
인터뷰에서 말을 할 순 있을 거 같은데 글로 보여주긴 좀 그래가지고요.
‘원래 얼굴이 웃는 상이라 인상이 좋다는 주위의 칭찬도 많이 받아왔는데 그 칭찬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건 그녀 자신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을 무렵이었다.’ 이 다음엔 뭔가 ‘어느 날이었다.’ 같은 구체적 에피소드의 시작일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좀 당황했어여.
나는 지금 교회에 다녀. 원래 종교가 없다가 3학년 쯤 종교를 갖게 됐어. 그러면서 삶이 좀 많이 바뀌었어. 그 전에는 ‘나 정도면 착하지.’라는 생각으로 살아 왔는데 이젠 나의 연약한 것들을 많이 깨달았어. 자기소개에 쓴 것처럼 항상 웃고 다녔고 사람들이 선해보인다는 소리에 만족하면서 살았는데 사실 속으론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맘이 많이 불편했어. (마음에 도대체 뭘 품으셨길래?) 모든 사람이 나쁜 생각이 들어올 때가 있잖아. 또 옛날에는 별로 나쁜 거라고 생각 안했던 것들도 신앙생활하고 난 뒤로는 그게 나빴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고. ‘나 정도면 부모님한테 잘 하는 편이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 부족했던 것 같고. 뭐 지금도 그렇게 잘하고 있지는 않지만.
교회엔 누가 처음 데려갔나여?
남자친구가 교회에 다니고 있긴 했는데 그렇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어. 근데 갑자기 불이 붙은 거야. 나한테도 엄청나게 전도를 했는데 우리집은 굿도 많이 하고 제사도 꼬박꼬박 지내고 하는 분위기라 종교를 극도로 혐오하거든. 그래서 남자친구랑 되게 많이 싸웠어. 남자친구는 헤어질 각오를 하고 전도를 시작한거야.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구원은 받아야하지 않겠냐면서. 결국엔 나도 교회 다니기 시작했고 그 뒤로 엄청 바뀌었지 내 자신이.
어떻게 자신이 변화했다는 건지 자세히 얘기해봐여.
난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써왔는데 스스로 엄청 몸부림치고 있었어. 삶의 목적을 못 찾아가지고.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내가 학점 따고 취업준비해서 남들이 좋다는 기업에 가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건가? 그럼 내가 왜 살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이 예상되잖아. 그래서 무지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랬었어. 당시에 연애를 재밌게 잘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게 어떻게 채워지지가 않더라고. 그 와중에 남자친구가 전도를 한 거고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내가 이렇게 혼자 힘들 바에야 한 번 믿어보면 어떠냐는 식으로 교회에 갔어.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내 중심, 그 마저 온전한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좋다, 괜찮다고 하는 걸 내가 해야겠다는 식이었어. 신앙을 가지고 부턴 그 중심이 예수님으로 바뀐 거지. ‘예수님이 좋다는 걸 내가 해야겠다. 내가 세상 사람들 말보다 예수님 말을 들어야겠다.’ 이게 말로하면 되게 간단한데 실제 삶에 적용되면 아예 세상을 보는 안경이 달라지는 것 같아.
말씀하신 ‘중심’이라는 건 한 사람이 자신의 밖에서 찾아내는 이상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여. 너님의 경우 생각하던 이상적인 삶의 기준을 종교에서 찾았다는 얘기고여. 근데 비슷한 뉘앙스로 이해하면 될 까여. 예를 들면 ‘롤모델’ 것도 자기가 정한 기준에 따라서 그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본받는 삶을 그리면서 산다고 생각하는데여.
음 완전히 비슷하진 않고. 롤모델은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말하려 하는 건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도 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지키고 싶다’는 거야. 그 사람들은 자기 롤모델을 사랑하진 않잖아. 부러운 거잖아.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거든.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거든. 왜냐면 나한테 너무 좋은 것만 주시니까. 감사하니까. 그런 걸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달라지기 전의 삶에 대해서 좀 자세히 얘기를 해주세여.
모범생 콤플렉스가 약간 있었어. 겉으로는 쿨한 척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고. 쉽게 말해 학점도 잘받아야 하고 부모님한테도 잘해야 하고, 욕심이 되게 많았어. 그래서 일단 1학년 땐 신명나게 놀고 2학년부턴 7과목씩 3학기 연속 꽉꽉 채워들으면서 알바도 하고 공부도 하고 동아리 임원도 하면서 연애도 시작했어. (ㄷㄷ 미친듯여) 엄청 욕심이 많아요. 다 가지고 싶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게 많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거야. 뭘 해도 완전히 만족이 안 되고 다시 또 원하는 게 생겨서. 예를들어 공모전 하나 해보면 좋을 거 같아서 시작했어. 근데 하다보니까 이걸 꼭 붙어야 할 것 같아. 붙었으면 또 ‘공모전 하나를 어디다 내밀어.’ 하면서 계속 욕심이 커지는 거지. 남친 없었을 땐 남친이 있으면 되게 좋을 것만 같았는데 생기고 나니까 남친이 나한테 이렇게 하는 건 제발 고쳤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만족을 못 얻는 거야. 한마디로 감사를 못하는 거지. 자기가 받은 거에 대해서.
누구나 그렇잖아여.
근데 사람들은 몰랐어. 내가 되게 만족하고 사는 줄 알았어. (의도적으로 너님이 숨긴걸까여?) 그런 척하고 살았지. 그러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무계획으로 그냥 휴학을 결정했어. 5월 쯤이었을거야. 아 그 땐 다이어트에도 되게 집착했었는데 그즈음 너무 힘들어서 빼려 해도 안 빠지던 살이 3kg나 빠진 거야. 그정도로 몸과 마음이 다 너무 힘들었어. 근데 6월 되면서 남자친구가 점점 전도하면서 압박을 하는 거야. 그 때 남자친구가 고향에 있어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렇게 전화로 강요를 하는 거야. 자주 만나지도 못했는데 매 번 볼 때마다 싸우다 내가 어떻게 영접하게 돼 가지고. 그 뒤로는 어떻게 그렇게 된지 모를 만큼 신앙이 많이 자라났어.
휴학한 기간은 어떻게 보내셨어여?
1년 휴학했는데 우리 집에서 기독교를 엄청 싫어하니까 마찰이 심했지. 처음 말 꺼내기 전까지는 너무 겁이 나서 덮어 놓고 기도만 했었어. 반응은 예상대로였고, 짐을 왕창 싸가지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을 나오게 됐는데 본의 아니게 이틀만에ㅋㅋㅋ돌아갔어. 돌아가고 나서도 몇 달 간 전쟁을 했지. 지금은 내가 성경 읽고 교회 다니는 거에 대해서 막지 않으셔.
전쟁이 일단락 된 뒤에는 시험 준비를 했었는데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으시면서 공부를 중단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더라고. 그 때부터 치료시작해서 지금 1년 반 정도 됐어. 휴학의 나머지 한 한기는 거의 아빠한테 할애했는데 진짜 아빠 치료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될 일들이 많았어. 수술할 당시에도 거의 못 깨어난다고 했는데 지금은 식사도 하시고 활동을 하시니까. 수술 한 이후로 하루하루 아빠랑 있는 시간이 다 보너스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신앙을 안 가질 수가 없지 내 옆에서 기적들을 많이 보니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부딪히는 게 고민이시라고.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 생각이었어. 매일 매일 마주하는 것들 있잖아. 매일 아침에 잠을 더 자고 싶은데 일어나야 하는 상황도. 또 마음속으로는 엄마한테 잘하고 싶은데 나만 생각하다보면 잘 안 되는 상황도. 정말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요즘 들어 가끔씩 내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아무래도 집에다 많이 신경을 써야 하다 보니까. 사실 이렇게 친구 만나러 밖에 나온 것도 되게 오랜만이야. 그리고 내가 욕심이 되게 많았다고 했잖아. 그런 본능들이 아직도 좀 있단말야.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들이. 아빠를 돌봐드리고 엄마를 도와드리고 하는 게 싫은 건 아닌데 근데 좀 마음속에 그런 건 있는 거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아쉬울 때도 있고 그런 거지.
너님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자신의 기준이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기.’ 라고 써놨는데 무슨 좌우명처럼 느껴졌어여.
그게 내 삶에서 되게 중요해. 자꾸 성경 얘기해서 미안한데 난 성경기준으로 삶을 사니까 말해볼게. 성경말씀 중에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거든. 그 외모는 겉모습 뿐 아니라 명예, 권력, 물질을 포함한 것들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이야기야. 영혼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얘긴데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나도 모르게 판단을 많이 하는 거야. 그래서 그런 것들을 고쳐야한다고 계속 생각을 해왔어. 근데 조금 나아졌다 뿐이지 많이 나아지진 않았어. 왠지 가난한 것보다는 그래도 돈이 좀 있는 게 낫고. 정말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그런 학교보다는 그래도 이름 난 학교가 좋고. 이런 마음이 생기잖아. 너무 답답한 거야. 처음에 신앙을 가졌을 땐 정말 자유로웠거든. 진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을 정말 체감했어. 무지 자유롭고 문제가 될 게 없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러면서 나 자신도 그런 기준으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도 부러워하는 걸 보면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거지.
너님이 그렇게 크게 변화를 했다고 하는데 십년지기 친구들의 반응은 어때여?
우린 매 년 생일 때 서로에게 편지를 써주는데 친구들이 내가 종교를 가진지 1년만에 내 생일 편지에 이렇게 썼더라고. ‘사실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네가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엄청 무서웠어. 근데 이제 적응했고 네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도 감사하고 있어...’ 내가 만날 때 마다 맨날 전도하거든. 조금씩 열리고는 있는 거 같아서 급하게 생각하진 않으려고. 사람마다 때가 다 있잖아. ‘우리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너 따라서 교회 가겠지?’라는 식으로 말해주는데 그 날 감동의 쓰나미가.. (친한 친구가 그렇게 말해주면 느낌이 다르겠지여) 그 땐 거의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 얘기를 했어. 사람들이 ‘쟤 언제부터 저렇게 예수쟁이 됐냐.’ 했는데 이젠 다 적응했지. 오히려 가족들한테는 너무 심하게 전쟁을 하고 나니까 못 꺼냈는데 최근에는 엄마한테도 좀 두드려보고 있어.
민감한 종교얘기에 그렇게 깊게 파고들고 싶지는 않지만 너님도 다 커서 신앙을 갖게 된 거고 원래 무신론자였던 거잖아요. 좋은 마음으로 전도를 한다고 해도 무신론자의 경우에는 전도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여?
완전 많지. 지금도 있고. 그런데 세상에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얻기 힘들어서잖아. 만약 복음을 전했는데 전하자마자 사람들이 다 믿어 그러면 전하는 행위를 강조하지도 않았을 거야. 믿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그렇게 강조를 했던 거고 이렇게 전하는 게 힘들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들의 입술이 가치가 있는 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일한만큼 보답을 주시니까.
아니 너님 기준으로 말고 듣는 사람 기준으로여. 너님이 말 하는 의도에 상관없이 이야기를 전달 받는 당사자에게 그렇게 좋게 안 들릴 수도 있잖아여.
아무래도 맘에 걸리지. 내가 그런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게. ‘하나님은 평화를 말했는데 내가 복음을 전하는 순간 여기는 싸움터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했었어. 근데 나도 처음 접할 때 남자친구한테 화를 냈잖아. 그 때 남자친구가 나한테 그렇게 갈등을 무릅쓰고 전하지 않았으면 나에겐 아직도 평안이 없었을 거고 헛된 것들 사이에서 발버둥치고 있을 거야. 결국엔 난 너무 고맙단 말이지. 설사 이 친구들이 영원히 거부해서 나랑 절교를 하게 된다하더라도 난 양심적으로 그 친구들을 사랑한다면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는 거니까.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마약을 해. 근데 자기는 그냥 죽어도 좋대. 지금 이 마약의 쾌감이 너무 좋다는 거야. 근데 넌 그 친구가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잖아. 그 친구가 너를 욕하고 절교한다고 해도 너는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마약 표현은 너무 극단이라고 생각 해여. 전 가지를 싫어 해여. 근데 그 가지라는 게 그렇게 몸에 좋은 음식이라면서여. 주위에서 먹으라 해서 억지로 그걸 먹었어여. 근데 난 기분이 졸라 나빴어여. 이것 때문에 화가 날 정도로. 그렇게 되면 나에겐 이게 더 이상 좋은 음식이 아니잖아여. 가지가 아니라 하다못해 마약이라 하더라도 스스로가 결정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여. 근데 실제로 절교한 친구도 있나여?
가까운 친구들 중에 멀어진 사람은 없어. 그냥 연락이 뜸해지는 사람은 조금 있지. 그리고 또 나도 그 사람들이 나를 불편해할 것 같은 자리는 피하지. 술자리 같은데 가서 ‘저 기독교라서 술 안 마셔요.’ 하면 안 되잖아. 사실 가족들하고는 많이 싸웠는데 외부 사람들하곤 싸움까지는 안 갔던 것 같아. 가족들은 가족이니까 너님이 말한 것처럼 ‘아무리 좋은 거일지라도 내가 싫다는 데 왜 그걸 강요하냐.’ 솔직하게 말은 해. 그 이후로 나도 깨달은 것도 많아. 초반에는 혈기왕성해서 ‘믿어야 돼. 믿어야 돼.’ 하고 다녔는데 이제 알았어. 그 사람이 끝까지 거부하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 벌을 받는 거잖아. 벌을 받는다는 건 책임이 있다는 거고 그 책임이 있다면 자신의 선택에서 오는 건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건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고 봐.
저는 그 말씀도 극단적이라고 생각이 드는 데 그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실수라고 봐여. 표현하셨듯 혈기왕성하게 전도는 해도 똑똑하게는 전도를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냥 무작정 좋다고 하니까 반발감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래서 오히려 맘이 가다가도 벽을 쳐버리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해여.
조급함을 버려야하는 것 같아. 빨리 내가 원하는 기한 안에 믿겠다는 답을 내놔라는 식으로 달려드는 게 아니라 약간 녹아들게 전도를 해야 하는데. 내가 믿게 된 것도 남자친구가 나를 사랑해서 헤어짐을 불사하고 전도를 했고 동시에 나도 남자친구를 사랑해서 한 번 믿어보자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내가 처음 전도한 친구도 나를 정말 사랑해주는 친구였어. 그래서 내가 얘기를 꺼냈을 때 그 친구가 받아들이기도 쉬웠다고 생각해.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전도가 안 되는 구나. 그걸 알고 나서는 일단 많이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아까 표현하신 녹아든다는 말대로 가장 힘센 방법은 자신이 보여주는 게 아닐까여?
응 행동으로. (너님이 더 노력하셔야겠어여.) 사소한 일들이 왜 나한테 중요하냐면 가족들한테 하는 사소한 행동이 크리스찬의 대표되는 행동으로 보일거란 말야. 그래서 내가 더 갈등이 큰 거지. 적어도 가족 내에선 영향력이 세니까.
낭만적이고 싶다는 저를 응원해주셨는데 너님은 평소에 낭만을 어떻게 지켜내시나여?
낭만을 보존한다기보다 그냥 난 깊이 생각 안하고 지금 하는 어떤 행동이 나중에 나에게 어떤 성과를 가져다 줄 거라 기대하지 않고 해. 그게 낭만의 속성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너님이 하는 이 개똥같은 인터뷰도 성과를 내겠다는 야심을 갖고 쌓아가는 건 아니잖아. 꽃잎 휘날릴 때 산책하는 것도 물론 낭만이겠지만. 낭만이라는 게 개념자체가 애초에 절대적으로 정의할 순 없는 거라 생각해서.
마지막 질문만 남았네여.
이 질문이 매 인터뷰마다 있길래 내가 약간 생각을 해오긴 했어. (ㄷㄷ 나보다 준비를 많이 하신 듯) 최근 인터뷰에 그런 뉘앙스는 없는데 초기에는 이 인터뷰가 가야할 방향을 모르겠다는 말도 했었잖아. (아직도 모르긴해여.) 일단 인터뷰에 대한 나의 느낌은 부러웠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다는 것도 부럽고. 인터뷰이가 20대 대학생에 국한된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사람마다 개성이 있으니까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잇다는 것도 부럽고. 그런 실천력과 여건이 된다는 것도 부럽고.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하니까. (사실 시간밖에 없어서 시간을 팔아 푼 돈을 만들고 있어여.) 되게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제가여?) 응 재밌지? 재미없어? (재미없으면 때려쳤겠져.) 회사의 모토가 ‘들어줄게 니 얘기’ 잖아. 그래서 내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얘기를 들어준다 했으면 누가 뭘 듣는가를 생각해봐야 하잖아.
첫 번째 너가 인터뷰이의 말을 듣는다. 두 번째 독자가 인터뷰이의 말을 듣는다. 세 번째는 독자가 너의 말을 듣는다. 이 세 번째가 어떻게 성립하냐면 이게 니가 쓴 인터뷰가 아니면 안 읽은 독자들이 있거든. 만약 너가 아니라 다른 누가 나를 인터뷰를 했다면 그걸 안 읽을 사람들도 분명 있단 말이야. 너가 인터뷰했다니까 읽는거지. 이 세 가지 경우를 생각을 해봤어. 이 세 가지가 모두 작용을 하겠지만 너는 그 중에 뭐에 비중을 두고 진행을 하고 있느냐는 거지. 그걸 좀 고민해보면 앞으로 이 인터뷰가 갈 방향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 소오름;; 고마워여.
'나의 하느님. 너의 하나님.'
결국 한 분을 지칭하는 말일 텐데 그 모음 하나의 차이를 구분하고 있는 내 마음은 너무 힘들었어.
니 얘기를 들어 주겠다고 큰 소리는 뻥뻥쳤는데 솔직히 그 날의 나는 생각만큼 너의 얘기를 잘 들어주지 못한 거 같아. 내겐 종교가 말하는 절대성보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상대성이 가까워서인지 솔직한 말로 종교의 절대적 교리가 가지는 배타성이 불편했거든. 근데 그렇게 불쾌하다고 느꼈던 절대적 교리는 내 속에도 있더라.너가 말했던 것처럼 나도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못 보고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