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같은 인터뷰 #18
인터뷰이에게 가방 속에서 아무거나 하나 꺼내달라고 했더니 두통약이 나왔다. “평소에 머리가 자주 아파서 들고 다녔는데 요즘에는 행복해서 그런지 꺼낼 일이 없어요.”라며 웃는다. 살만하냐는 질문엔 요즘 하고 있는 일은 업무가 많다며 얼굴을 찌푸리다가도 “그래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라며 꺌꺌꺌 댄다. 지금껏 스스로 품어왔던 삶에 대한 고민들을 다 이야기하기에는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라는 자기소개는 그저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 언니의 이야기는 진짜로 길었다. 이야기에도 관성이 붙나 보다. 여튼 오늘만큼은 이 인터뷰가 가방 속 두통약의 역할을 대체하길 바란다.
# 요즘.
일이 안 맞아요. 전공을 살리는 일이라 나중에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건데. 사실 내년에 복학하니까 짧은 기간에 돈을 많이 벌고 싶었거든요. 내년부턴 자취도 해야 해서요. 그리고 제가 독립적인 성향이 엄청 강해요. 나중에 결혼해서도 부모님께 의존할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까지 낸 등록금도 다 학자금 대출이고요. 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야 더 컸을 때,부모로부터 구속을 받더라도 당당하게 제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으로 집에서 자취 허락은 받았는데 돈이 없으니까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지인소개로 일을 시작하게 된 거였죠..
사무직이지만 아홉 시간 꼬박 일하고 일당 오만 원.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설득하길래 알겠다고 해보겠다 했어요. 기껏해야 한 달에 육십만 원이잖아요. 얼마 못 버는 일인데 쉽겠지 하는 생각에 가볍게 생각했어요. 주말에는 따로 일을 하고요. 근데 근무가 월, 수, 금 이런 식으로 고정적인 게 아니라 막 바뀌니까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쉬기도 애매해요. 집이 멀어서 일 가려면 아침에 7시에 일어나야 하고 일을 나가면 생각보다 일이 너무 많아요. 출장도 막 서울부터 대전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출장비도 하나도 안 나오고요. 원래 복지 분야가 페이가 짜긴 해요. 그런 스트레스에 잘 하지도 못하는 워드, 엑셀 작업하고 계속 전화는 돌리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호의적이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냥 일 자체가 힘든 건 아닌데 머리가 계속 복잡한 상태랄까 그래요.
# 나는.
성장 배경으로 시작한 자기소개는 익숙했다. 첫째와 막내에게 위아래로 치이고 사는 전국의 둘째들이 격하게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고충이 잔잔히 묻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자라면서 느낀 건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는 거였죠.’라는 문장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유난히 강조한 ‘평범’이라는 단어도 조금 거슬렸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자기소개는 갈수록 위태위태했고 자신을 가볍게 소개하려는 노력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 했다. 뭔가 내용이 끊겨버린 듯한 찝찝한 기분에 재차 물었다. 만족스럽게 소개하셨어요?
네. 전 만족스러운데. 저는 너무 어릴 때부터 심각한 면이 많아서. 솔직히 말하면 친구들이 너는 따뜻한 가정 속에서 잘 살았는데 왜 너는 그렇게 항상 뭔가 안 좋다는 얘길 많이 하느냐고 했어요. 그중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가장 노릇을 하던 친구들도 있어서 그 친구들 입장에선 진짜 안일한 생각이다. 네가 배가 불러서 하는 소리다. 하는 얘길 많이 했죠. 제 생각에도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근데 제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저는 저만의 예민함을 가졌는데 부모님이 그걸 캐치하지 못하고 자라게 했던 거죠. 가뜩이나 위아래로 남자형제가 있으니까 치이고 산 것도 영향이 커요. 여자애들만 있으면 좀 감정적으로도 다가가기도 하는데 남자애들하고 있으면 때리고 이러잖아요.
별거 아니지만 아직도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그게 충격이 꽤 컸나 봐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학교 끝나면 주로 오빠랑 같이 있었어요. 집이 2층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래층에서 가게를 하시고 있었어요. 그날 오빠가 저랑 싸우다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배를 친 거예요.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장난으로 여겨져도 전 여자애였잖아요. 갑자기 너무 서러워서 막 울었죠. 오빠가 내 배 때렸다고 아프다고. 그랬더니 오빠가 저를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으면서 우려면 들어가서 울라고 시끄럽다고 그러는 거예요.자기 딴에는 그게 장난이라고 한 건데 저는 그것도 너무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뛰어 내려와서 할머니한테 일러바쳤죠. 오빠가 배를 주먹으로 쳤는데 너무 아프고 이런 말까지 했다, 너무 충격이지 않느냐고 얘기를 하는데 할머니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니가 동생이니까 참아. 오빠가 너 이뻐하는거야.” 하시더라고요. 너무 억울했어요. 그래서 아빠 엄마한테도 전화했는데 부모님도 바쁘시니까 애들 싸움이겠거니 하고 그냥 두신 거죠. 어떻게 보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인데 어린 나이엔 그게 충격이었어요. 내가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어떻게 어른들이 아무도 듣지 않지. 근데 이게 사실 집안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남을 괴롭히는 걸 보면 나중엔 나한테 다가올 것 같은 마음에 왕따 당하던 친구들을 감싸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제가 왕따가 되더라고요. 내가 감싸줬던 아이들이 나를 외면해도 그냥 ‘그래 쟤는 애들이 괴롭힐까 봐 그런 거겠지.’라고 이해가 됐어요. 근데 정말 충격적이었던 건 왕따를 시키는데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재밌잖아’라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저를 괴롭히던 남자애 한 명이 있었어요. 덩치도 저보다 두 배 정도 컸고 키도 컸어요. 가정환경이 좀 안 좋았는지 거칠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좋아해서 괴롭혔다는 생각을 해요. 어린 나이에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몰랐던 거겠죠. 둘이 같이 쓰는 책상이 이만큼 있으면 요만큼 남겨두고 선을 그어요. 넘어오지 말라고. 어릴 때 그런 장난 많이 하잖아요. 선 넘어오면 때리고 그런 거요. 저는 걔랑 짝이 돼서 너무 싫지만 죽어도 지지 않겠다는 생각에 모서리에서 책을 잡고 공부를 했어요. 선생님들이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물으면 “얘가 그랬어요.”라고 대답했거든요. 근데 하지 말라고 혼을 내야 하는데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거예요. 애가 책상 모서리를 잡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애가 왜 저러지?’하고 지나쳐요. 저에겐 충격이죠. 나중엔 괴롭힘이 심해져서 그 남자애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는데 근데 그게 앞니에 맞아서 앞니가 깨졌어요. 걔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죠. 부모님한테는 그냥 놀다 그랬다고 하고요. 근데 그 남자애가 한 학년 올라가더니 반 친구들한테 자랑을 하더라고요. “쟤 내가 때려서 이빨도 깨졌어.” 이러면서요. 저는 다시 한 번 뜨악하죠. ‘나는 그냥 이해한다고 넘어갔지만 쟤는 어쩜 그걸 자랑으로 생각할 수가 있지?’ 그런 생각도 했었고요. 자라면서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심지어 담임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더는 학교에 못 있겠다, 전학 가겠다는 말을 했어요. 9살, 10살 먹은 애가요.
부모님한테도 여기 못 있겠다, 살려달라, 쟤가 너무 괴롭힌다 그런 말도 했는데 부모님이 일이 바쁘셨어요. 담임선생님한테 전화해서 애가 이렇다는데 어떠냐고 물어보면 “애들이 서로 싸우고 그런 거 같은데 애가 유독 예민한가 봐요.” 이런 식의 답변이 왔어요. 애가 유독 예민해서 별거 아닌데 크게 만든다는 식으로요.
계속 이어지는 어린 날의 이야기는 무지무지 생생했다. 도와달라는 울음 섞인 목소리는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엄마의 말로 마무리됐다. 도움을 요청해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결국 스스로 헤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자신은 독립적이라는 말에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절친했던 친구가 뒤에선 자신의 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도 이젠 놀라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저 계속되는 일들이 익숙해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했다.
근데 그때의 제게는 신경 안 쓰는 게 아니었나 봐요.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담긴 느낌인데여?)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서 부모님한테도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만 이야기했죠. 근데 그러다 거울을 보니까 이제는 제가 웃는 모습이 이쁘지 않고 웃는 소리도 싫은 거예요. 사실 저 지금은 엄청 크게 웃거든요. 소리 내서 남자처럼 웃는데 그때 당시에는 웃는 소리도 안 냈어요. 웃는데 항상 입을 가리고 웃었어요. 어느 순간 스스로 나를 절제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조절하는 거죠. 분명히 ‘나’이긴 한데 드러내는 외면적인 모습들에 대해 너무 욕을 해대니까 나름대로 좀 욕먹지 않게 노력을 한 거라고 보면 될까요. 왜냐면 상대가 나를 보는 게 싫다 하면 내 모습을 안 보여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상대에게 뭔가 거슬리지 않게 노력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제가 자라면서 한 번도 속 썩여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세요. 최근에서야 속을 썩인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오빠랑 동생은 키우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저는 특별한 일이 없대요. 왜냐면 지금껏 한 얘기들이 부모님이 생각했을 때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었고 제가 이야기하길 포기해버리고 나서는 표현을 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몰랐던 거죠.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들이 다 물갈이가 됐어요. 어떻게 반에 순진하고 순수한 애들이 다 모였던 것 같아요.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애들이 똘똘 뭉쳤다는 이미지를 가진 반이었어요. 너무 재밌었죠. 한 번도 그런 친구들이랑 지내 본 적이 없으니까. 애들이 다 착하기도 했는데 그 착한 애들을 나쁜 애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그게 뿌듯했어요. 내가 누구한테 힘이 되는 게요. 노는 애들이 한 명을 찝어서 괴롭히는데 얘네는 너무 착해서 화도 못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당해왔던 거에 대한 답답함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착하게 굴고 어리숙했어도 부당한 거에 지지는 않았거든요. 그 애를 보면서 상황에 너무 화도 났고 “걔네랑 놀지마. 그런 애들 니 친구 아니야.” 이러면서 같이 감싸주고 그랬어요. 제 자신은 친구들이 나쁘게 굴어도 상처 안 받으려고 신경 안 쓰는 척 노력했으면서. 동병상련이란 건 가봐요. 누군가 내게도 그렇게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랄까? 그렇게 친구들이 생긴 거 같아요. 착한 친구들. 그 친구들을 지금까지 만나요. 고등학교도 같이 가서 각자 대학을 와서도 지금까지 모임을 유지하고 있어요. 지나고 보니까 그 관계가 젤 소중하더라고요. 그 친구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늘 바쁘셨다는 부모님과 경직되어 보일 정도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를 묘사한 그녀는 가정에 대한 스트레스를 굉장히 받았다고 했다. 가정에서부터 학교까지 거듭되는 마음속 충돌 때문에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생길 정도였다. 어른들이 무서워 그들에게 잘 보여야 했고 잘 보이기 위해선 항상 절제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행동에는 자기검열이 생겼고 어른에 대한 동경, 자유에 대한 기대는 커졌다.
기대가 엄청 컸어요. ‘난 어른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근데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고등학교 진학하는 타이밍에 살이 갑자기 쪘어요. 중학교 때 지금 키에 42kg 정도였어요. 말랐었죠. 근데 고등학교 가면서 인생 최대 몸무게 58kg까지 찐 거예요. 다른 애들은 예뻐질 시기에 갑자기 살이 찐 거죠. 고민 정말 많이 했어요. 그때 그래서 폭식증하고 거식증이 같이 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미쳤었구나 싶은데 그때는 그렇게 무서운 건지도 몰랐죠.
스트레스받으니까 막 먹어놓고선 살이 찐 모습이 싫으니까 다 토해내는 거예요. 손가락 집어넣어서. 근데 아무도 몰랐어요. 애들 앞에서 일부러 많이 먹어요. 그리고 혼자 화장실 가서 다 토했죠. 조용히 구석진 화장실에 가서. 다 토하고 나오면 개운하더라고요. 살이 안 찔 테니까. 그러다 보니 위는 다 망가졌고 한 번 아프면 일주일씩은 밥을 못 먹었어요. 음식이 안 들어가니까 1주 동안 사탕 몇 개로 견딘 적도 있어요. 1년을 그랬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조금 습관처럼 남아있긴 해요. 지금도 살이 찐 게 엄청 먹고 토하고 싶은데 아 토하지 말자 해서 참다보니까 이렇게 찐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적당히 먹으면 되는 건데 토할 생각으로 막 먹어 놓고선 참으니까 살이 돼버리는 거죠.
그런 일들을 겪으니까 ‘아 왜 살면서 내 인생이 한 번도 평탄하지 못하지?’ 하는 생각도 했어요.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더라고요.기숙사 생활은 빡세고 내가 좋아하는 책은 못 읽고 몸은 완전히 병이 나서 조금 앉아있으면 허리가 아파서 앉아있질 못했어요. 너무 아파서 데굴데굴 구를 정도니까 밤에 잠을 못 자요. 몸 전체가 총체적 난국이니까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기숙사 살면서 일주일마다 집에 갔는데 잠들기 전엔 맨날 목매다는 상상을 했어요. 어렸을 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어떻게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거든요. 제가 전공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데 그냥 죽고 싶다는 건 힘듦의 과정인데 어떻게 죽을 건지 생각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거래요. 우울증 테스트를 해봤는데 매 번 고위험군이라고 나오더라고요.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삶이 힘들었어요. 혼자 이겨 내야 하는 삶이잖아요. 힘들면 엄마한테 의지하고 싶고 아빠가 해결해줬으면 좋겠고 했는데 혼자 고민했으니까요. 그 와중에 오빠랑 동생은 보살핌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부모님의 잘못이 아닌 게 성격적으로 저는 알아서 촥촥촥 알아서 하는 스타일인데 오빠랑 동생은 챙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했거든요.
“방문을 걸어놓고 밤마다 죽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의젓해 보이셨는지 저에게 힘든 걸 이야기하는 아빠와 우리 가족은 항상 탄탄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만 났어요. 내가 죽으면 그렇게 살아가는 내 가족마저도 망가지니까요.”
# 자유.
대학에 가면 자취도 하고 밤새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해보고 싶은 걸 다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대학에 갔는데 웬걸 학교가 미션스쿨이라서 기숙사도 굉장히 엄격하고 1학년 때 A, B 반으로 시간표가 만들어져 나오더라고요. ‘대학교는 자유로운 곳이지 않나?’라는 생각에 시간표를 다 바꿨어요. 다들 반 안에서 친구를 사귀는데 저는 A반 갔다 B반 갔다 이리저리 다녔죠.잠깐 왔다 사라지곤 하는데 누가 저랑 친구가 돼요. 그래도 혼자 밥도 꿋꿋이 잘 먹고 그랬어요.
그러다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제가 언니들을 되게 무서워했어요. 하도 여자들한테 욕먹었던 기억이 있어서요. 근데 남자 사이에서 자랐으니까 오빠들은 편했어요. 동아리에서 친해진 오빠들이랑 같이 다녔는데 쟤는 남자만 좋아한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학과 내에서요. 나는 끼리끼리 친해져버린 무리에 낄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친한 사람도 없는데 밥같이 먹자는 사람하고 밥 먹으러 간 게 그렇게 소문이 난 거죠. 학교라는 게 나랑 안 맞는 거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근데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하다 2학년이 되면서 동아리 임원이 됐어요. 임원을 하니까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특히 여자애들이랑 많이 친해지게 됐어요. 다 같은 과 친구들이었는데 그때 애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너가 누구한테나 성격이 좋은데 단지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고. 그 친구들 지금 다 친해졌어요. 그렇게 친해진 친구들끼리 똘똘 뭉쳐 다녔어요. 그제야 대학이 재밌었던 거 같아요. 진짜 대학이 조금 더 자유로운 곳 같다는 것도 느꼈어요. 마음도 편했어요.
영원히 좋을 수는 없는 건지 분위기가 답답했어요. 150명이 여자라고 생각해봐요. 많은 건 둘 째 치고 여자끼리 경쟁이 엄청 치열한 거 아시죠.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휴학을 했어요.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다. 동아리 활동은 재밌었지만 난 이제 좀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휴학을 했죠. 여행 갔다가 학교로 돌아가기 싫어지면 그만두고 말자는 마음으로요.
# 행복
올해 3월까지는 화장품 가게에서 일했어요. 1년 조금 넘게 직원으로요. 마침 새로 오픈하는 가게였어요. 원래는 6개월만 일하고 떠나야지 하는 생각이었죠. 1년 휴학해서 반은 돈을 벌고, 나머지 반은 여행하려고 했거든요. 해외여행을 꼭 한 번 가고 싶어서요.근데 사장님이 1년을 하면 퇴직금을 주신대요. 그것도 많이. 월급이 150 정도 됐는데 월급보다 조금 더 얹혀 주시겠다는 거예요.그 말 들으니까 그만두기 좀 아깝더라고요. 조금만 더 일하면 내가 200만 원을 그냥 받는 데. 사장님도 좋았고 일 시작해보니까 잘 맞고 재밌더라고요. 그거 하면서 살도 7킬로 빠지면서 한창 예뻐졌어요. 하루 종일 자기관리만 했던 것 같아요. 출근 네 시간 전에 일어나서 씻고 계속 팩을 했어요. 몸이 잘 붓는 체질이라 냉장고에 넣어놓고 차가운 팩을 몇 개씩 해요. 화장도 몇 시간에 걸쳐 화장하고 출근해요. 삶이 재밌었어요. 근데 직원 언니랑 잘 안 맞아가지고 그냥 그만뒀죠. 원래 여행을 하려고 휴학을 한 건데1년 내내 돈만 벌다 끝낼 순 없잖아요. 그래서 1년 휴학을 더 했어요. 여태 번 돈으로 놀았어요. 펑펑 쓰면서 놀고, 먹고, 여행도 가고 그렇게 탕진했어요. 다시 돈이 없으니까 지금 일 구한 거예요.
지인들은 제가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정말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전에는 남들한테 보이는 걸 참아왔는데 그건 보여주는 직업이에요. 관리도 많이 해서 예뻐지고 하니까 남자들이 번호도 많이 따가고 고등학생부터 아줌마까지 “언니 예뻐요 뭐 써요?” 하기도 했어요. 얼마나 자신감이 붙었겠어요. 가게 오픈 멤버니까 딱히 위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요. ‘내 인생을 이렇게 개척하는구나!’ 하고 느꼈던 것 같아요. 자신감도 많이 생기고 웃음소리도 커졌어요. 스스로를 표현하지 않고 살다가 봉인 해제되듯 더 해맑게 웃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요. 진짜 많이 변했죠.
마냥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별별 진상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속은 쓰렸지만 비위를 맞춰가며 웃음으로 상대했다고 했다.그때마다 단순히 속상해 하기보단 내가 이런 일도 해봤는데 세상에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며 자신감을 붙여갔다. “하루에 700만 원 넘게도 팔아봤어요. 저랑 알바생 둘이서. 로드샵 화장품은 단가가 몇 천 원대인 거 알죠. 어마어마해요 매장에 사람이 꽉 차있었어요.” 그렇게 그녀는 많이 변했다.
열심히 번 돈으로 여행을 했고 더 많은 사람들 만나면서 많이 배웠어요. 마음에 있는 게 많이 정화가 됐다고 할까. 좋은 풍경 많이 보면서요. 그래서 지금도 제주도 되게 좋아해요. 지금은 그전에 비해선 너무 생각이 없을 정도로 개운해요. 아직도 내 미래에 대해서 생각은 많이 해요. 그래도 그 생각들의 기본이 되는 건 ‘내가 과연 행복할까?’에요. 앞으로 남은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저는 한 번도 그런 얘기해본 적이 없어요. ‘왜? 나한텐 더 행복한 미래가 있는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미래에 대한 고민은 많지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요. 나는 언제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요. 저는 제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날들을 꼽으라면 그 2년이에요. 정말 행복했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방향도 제시해준 순간이에요. 인생을 행복하게 즐길 생각을 한다면 그 무엇을 해도 저는 행복할 거 같아요.
# 앞으로
전 민감한 아이였어요. 제가 교육을 배우면서 느끼지만 민감한 아이는 민감한 아이에게 맞는 행동이 필요해요. 교사와 부모는 아이가 허투루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해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제가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는 않아요.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만 좀 아쉬운 마음은 들죠. 그래도 제가 만약에 부모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저는 이 순간 없었을 수도 있어요. 저는 자살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게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힘들 수 있어요. 남들은 왜 그렇게 힘드냐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들 스스로는 벅찰 수 있잖아요. 다들 살면서 내가 젤 힘들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런 걸 케어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쉽죠.
전공 공부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데 내 아이는 정말 똑바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제주도 다녀와서 꿈이 바뀌긴 했지만 꿈이 한동안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였어요. 나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늙어서도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얼마 뒤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개봉해요. 알아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삶의 마지막까지. 그러면 자식은 그걸 보며 배우겠죠. 사람을 사랑하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요. 꼭 이성이 아니더라도 내 아이가 앞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을 때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인간적 매력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나도 우리 부모님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꿈꾸는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전공 공부를 잘하진 못했지만 수업은 굉장히 열심히 들었어요. 단순히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이렇게 키워야 할까 고민하면서요.
살면서 내 인생이 정말 우울하다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예민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는 상처가 저에겐 너무 컸어요. 불쌍하고 싶진 않았지만 불쌍하게 된 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남들한테 티도 안 내고 말도 안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들한테는 올바르게 정석대로 산다는 얘기 들으면서 살았어요. 근데 그때 제 인생이 젤 불행하다고 생각했고 나만큼 힘든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지나고 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날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거겠죠. 이런 생각들도요. 저는 제 삶에 지금 굉장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 힘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에요.
# 인터뷰를 마치며
너님이 좀 자유롭게 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독특하잖아요. 뭔가 평범하고 억눌러만 살아왔던 저에게는 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아직까지 되게 억눌려 있거든요. 여행 갔을 때는 좀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돌아오면서 다시 현실로 와야 하니까요. 아직까지 부모님 밑에 있기도 하고. 저렇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어요. 이런 말하면 기분 나쁘실 수도 있는데 너님도 고민이 있겠고 심각하겠지만 뭔가 되게 너님은 심각하지 않게 넘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도 너님처럼 너무 깊이 내 인생과 누군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한 발 떨어져야 하나 생각도 했고요.
연애는 간접경험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보고선 나도 저렇게 가벼운 느낌으로 사랑을 대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말랑하고 무미건조할 정도로 사랑을 느끼긴 하는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는 그런 삶이었다면 내가 쪼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요. 왜냐면 감정을 깊이 공유하는 건 너무 행복하지만 너무 불행하기도 하니까요.
오늘 사실 오기 전에 같이 일하는 팀장님한테 인터뷰한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왜 신청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재밌잖아요! 하고 말았는데 왜하느냐고 거듭 물어보시기에 계속 생각을 했었는데 그냥 지금 딱 생각이 났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정말 행복한 순간에 과거를 회상하면서 ‘아 그때 정말 힘들었었지?’ 생각하는 순간. 저한텐 인터뷰가 그런 순간이 됐던 거 같아요.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그런 얘기들도 한 번쯤은 하고 싶었어요. 최근에서야 많이 느낀 건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무게가 덜어지더라고요. 완벽한 타인에게 내 얘기를 하니까 그냥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되게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누가 나를 또 인터뷰하겠어요. 유명한 사람이 되면 모를까. 솔직히 다른 인터뷰 글들을 많이 못 봐서 딱히 조언할 점은 없지만 그냥 이런 취지가 좋다는 생각. 누군가한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것 자체가 좋았던 거 같아요.
대화 내내 솔직해보였던 인터뷰이에게 인터뷰 초반 느꼈던 나의 불안함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인터뷰가 그저 자기 불쌍한 맛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갈까 불안했고,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 억지스러운 자기최면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고. 물론 이야기를 다 듣기 전까진 그랬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터뷰이는 고민을 거듭해오며 자기 정리가 된 사람 같았다. 다만 굳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무게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울면서 했던 이야기, 그 때 누군가는 꼭 들어줬어야 하는 이야기를 이제야 조금 들어준 것 같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스스로일 테지만 나는 러닝타임 110분짜리 너님 이야기를 좀 들어본 사람 중 하나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쁘지 않았다.
심심해서 소제목 앞에 해쉬태그를 달아봤다. 인터뷰이가 진짜 이렇게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무지무지 #자유 롭고 #행복 해요. 그리고 #앞으로 도 그럴 거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