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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Jul 16. 2022

국수 한 그릇에 담긴 말들

심심하고 담담한 맛...

                 국수 한 그릇에 담긴 말들...



  날씨가 후텁지근하니 시원한 냉국수 한 그릇이 생각난다. 한 젓가락 크게 한 입 가득 물고, 나머지 국수 가락을 후루룩~~ 쩝쩝... 별로 씹을 여유도 없이 금세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리는 국수는 내가 즐겨 먹는 음식이다.


  국수의 종류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물국수, 소위 잔치국수라고 하는 국수를 제일 좋아한다. 멸치 다신 물에 그저 채 썰은 오이나 김치가 고명으로 올려진, 좀 더 신경 쓴다면 계란이나 호박 같은 것들이 올라가면 좋겠지만,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아도 나는 국수를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국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릴 적부터 국수를 많이 먹어서였던 것 같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쌀보다 가격이 저렴한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많이 먹었다. 


  커다란 대접에 하얀 밀가루를 넣고,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반죽을 만들든 어머니는 이내 호박만 한 덩어리를 밀가루가 묻어 하얗게 된 손으로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곁에서 구경을 하며 신기해하던 우리도 한 번씩 어머니처럼 하얀 밀가루 덩어리를 조그만 손으로 치대는 흉내를 내보기도 했지만, 금세 재미가 없어지고 한 조각 떼어내어 찰흙놀이를 하듯이 장난을 치며 뭔가 만들려 주물럭거렸다. 


  어머니는 발효가 되어 부풀어 오른 하얀 밀가루 덩어리를 굵은 나무 방망이로 조심조심 밀어가며 얇고 넓게 만들었다. 서로 달라붙지 않게 밀가루를 살살 뿌려가며 점점 더 하얗고 넓은 보자기처럼 밀어나갔다. 힘겨운 삶에 지쳐 덩어리로 뭉쳐진 마음을 밀고 밀어서 넓어지고 가벼워지게 만드는 마음수련 행사처럼 국수가 되어가는 밀가루 덩어리를 보며 차츰차츰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밝은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가족들이 먹을 맛있는 한 끼를 위해 어머니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가며 정성스레 국수를 밀었다. 


  하얀 도화지처럼 얇게 된 것을 둘둘 말아서 칼로 썰면 비로소 국수가락이 되었다. 칼국수... 칼로 썰어서 만든 국수라고 해서 칼국수란다. 처음과 끝에 떨어져 나온 국수가락은 모양이 어색하였다. 우리는 그 끄트머리 조각을 얻어 연탄불에 올려 구워 먹기도 했다. 그것은 바싹한 과자처럼 맛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 식구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칼국수 대접을 앞에 놓고 뜨거운 국수가락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국물에 퉁퉁 불어 터져 더 커져버린 멸치가 하얀 눈을 부릅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생선이니 싶어 한 잎 물어보았지만, 이미 육수로 생을 다한 멸치는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그저 한 조각의 장식물일 뿐이었다. 나는 국수를 먹다가 멸치를 만나면 슬쩍 젓가락으로 집어내어 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왜 아깝게 버리냐고 타박을 하고는 당신이 가져가 먹었다. 대개 우리 자식들은 멸치를 대부분 먹지 않았고, 부모님들은 그걸 대신 다 먹었다. 나는 맛없는 멸치를 열심히 씹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저게 맛있는 걸까? 나는 맛이 없는데... 


  지금처럼 더운 여름에는 뜨거운 칼국수보다는 역시 물국수가 시원하니 좋다. 냉국수라고 해서 차가운 얼음조각을 넣어주는 식당도 있다. 국수만큼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사도 적지 않다. 미리 삶아놓은 국수 한 타레를 대접에 담고 멸치가 목욕한 육수를 부어 그 위에 초록의 나물 고명을 올려주는 국수 한 그릇... 이 덥고 습한 여름 날씨에 잠깐이라도 기분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음식이라 하겠다. 예전에 어느 행사에 갔다가 먹어보았던 국수 한 그릇은 반찬이라고는 그저 김치 한 조각뿐이었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국수를 말아주는 이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한창 연애할 때, 부산 남포동에 있는 회국수 집을 자주 가곤 했다. 찌그러진 양은 대접 안에는 벌겋게 비벼진 국수가 몇 개의 생선회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약간은 뜨거운 육수가 같이 나왔다. 입술 주변이 빨개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그때야 둘이 함께 먹는다면 무엇인들 맛이 없었겠는가 만은... 


  세월이 많이 흘러 오래전 연애시절이 생각나  그 남포동 회국수 집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때 그 장소에 여전히 회국수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전의 그 나이가 지긋했던 아주머니 대신에 젊고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주문을 받았다. 우리는 회국수를 시켰고, 여전히 아가씨는 육수 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잠시 후 나온 회국수는 한 군데도 찌그러진 흠이 없이 깨끗한 양은 대접에 담겨 있었다. 같은 장소, 같은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도 대를 이어 장사를 하는 듯싶었다. 


  잔뜩 기대를 하며 한 젓가락 입에 물고 그리움을 씹으며 눈을 감았다. 분명 주인아주머니의 기술과 맛을 전수받았을 터인데, 예전의 그 회국수 맛은 아닌 거 같았다. 손맛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내 입맛이 달라져서 그런 걸까? 역시 세월이 흐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더니... 나는 변하였으면서도 추억의 맛은 변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무리였을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찾을 수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게 되는 가 보다. 그리운 국수 맛은 여전히 과거에만 남아있었다...


  늘 먹을 만한 반찬이 없다며 노래하는 아내에게 오늘 저녁에는 국수 먹자며 은근히 말을 건넸다. 아내도 그다지 귀찮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내는 자기가 좋아하는 비빔국수를 만들고, 내게는 물국수를 만들어주었다. 아내 말대로 대충대충 만든 국수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젓가락에 건져 올라간 하얀 국수가락에는 함께 지나온 세월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심심하고 담담한 국수 맛은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는 장년의 모습과 어느 정도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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