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이야기...
등대가 꾸는 꿈...
대포항을 보호하듯 바다로 길게 뻗은 두 개의 방파제 끝에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바다를 향해 장승처럼 서 있었다. 먼바다를 지나는 배들에게는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항로표지가 되고,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에게는 대문의 역할을 하는 등대들... 그들은 긴 세월 동안 말없이 그저 깜빡깜빡 어두운 바다를 향해 불을 켜 왔다.
때로는 먼 북쪽에서 날아오는 철새들에게도, 조류를 타고 오는 명태들에게도, 남에서 올라오는 고래들에게도 길잡이가 되어주지 않았을는지...
파도가 부딪쳐오는 방파제를 따라 등대 가까이 가보았다. 아직 해가지지 않아서 등대는 불을 켜지 않고 낮잠에라도 빠진 듯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대, 우리는 등대 몸통에 써져 있는 많은 낙서들을 발견했다. 아마도 페인트인 것 같은데, 누가누가 여기에 왔다 갔음. XXX ❤ YYY, 사랑이니 영원이니 하는 글자들이 주홍글씨처럼 새겨져 있었다.
만일 저 X와 Y가 영원한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헤어진다면 다시 여기에 와서 자신의 이름을 지울 수 있으려나... 불타는 사랑의 낙서도 잘 생각해보고 할 일이 아닐는지... 나는 그 낙서들을 바라보며, 혹여 우리도 연애시절에 어디엔가 저런 사랑의 기록을 남기지나 않았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어느 산골짝 바위에 돌멩이로 긁어 이름이라도 남겨두었는지 몰라도, 있다면 한번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저런 사랑의 낙서를 한 커플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듯도 하다.
방파제에 놓인 벤치에 앉아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해보았다. 뜨뜻미지근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다지 시원스럽지는 않았다. 남녘에서는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강원도 속초의 하늘에도 구름이 낮게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국민학교 시절, 1학기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국어 교과서의 마지막 단원을 펼쳐보곤 했다. 거기에는 대부분 여름 방학과 바다와 물놀이 이야기가 나왔다. 한 번도 바닷가에 살아보지 못한 내게 바다는 언제나 가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파도와 갈매기, 모래밭과 빵게, 불가사리, 소라껍데기가 그려진 삽화를 보며 시원하고 푸른 바다를 떠올려보곤 했다.
여름이 오면 늘 바다를 꿈꾸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배낭과 기타를 어깨에 둘러매고 동해 바다로 많이도 떠났다. 바닷가에는 늘 싱싱한 젊음이 돌고래처럼 뛰어올랐고, 거센 파도에 몸을 던지며 더위와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멀리 갈매기가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면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트이는 것 같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바다가 있는 곳에 사는 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결국 나는 부산에 사는 여자와 인연을 맺었다. 어부의 딸도 아닌데 그녀에게서는 늘 바다를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그녀는 나에게 그리운 바다의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나를 조금씩 끌어당긴 게 분명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푸른 바다에 첨벙 빠지고 말았으니...
나는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를 바라보며 곁에 앉은 아내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았다. 서른대여섯 해 전, 해운대 바닷가에서 잡아보았던 그 여린 손은 아니었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거 같았다. 저 등대에 새겨진 사랑의 낙서처럼 우리의 그것은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손등 주름살로 새겨진 게 아닐까... 우리는 그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편안한 마음을 파도에 실어 바다로 가만가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지금은 휴가 중이니까...
나는 하얀 등대, 아내는 빨간 등대가 되어 삶의 바다에서 비가 오나 폭풍이 몰아치나 어두운 밤바다에 불을 밝히며 우리 가족의 항로를 비추며 살아왔다. 한때는 한쪽 등대의 불이 꺼져서 홀로 불을 밝혀야 했던 적도 있었지만, 두 개의 등대는 서로 마주 보며 끝까지 함께 거친 폭풍우를 이겨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어린 배들을 위해 길잡이가 되고, 방향을 잡아주기도 했다. 이제는 낡아서 여기저기 부서지고 상처 난 자국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뚝 서서 자리를 지키려 애를 쓰고 있으니... 나름 가슴이 뿌듯해도 괜찮지 않을까...
역할을 다하고 나면 등대에게는 마지막 꿈이 있을 게다. 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저 너머 바다를 지나 더 먼 곳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육지의 끝자락, 바다의 시작점에 서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끝나면, 가루가 되어 바다에 뿌려져서라도 해류를 따라 흘러가며 드넓은 세상 구경을 하러 가고 싶어 하지나 않을는지...
점점 바다가 어두워져 갔다. 머지않아 등대는 다시 불을 켜겠지. 아직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꿈에서 깨어나 눈을 부릅뜨고 캄캄한 바다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