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일상처럼 들어온다.
아침에 일어나는 이유가
달라지는 순간부터.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해서 움직이게 될 때,
책임은 이미 시작된 상태다.
결혼을 하면
관계가 책임이 되고,
아이를 낳으면
시간이 책임이 되고,
직장을 다니면
하루가 책임이 된다.
그 책임들은
각각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몸 위에
겹겹이 쌓인다.
그래서 어느 순간
사람들은
자기 감정의 출처를
헷갈리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지친 건
사랑이 식어서인지,
일이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계속 책임지고 있어서인지.
책임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잘 해내고 있을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만 놓치면
바로 드러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애쓴다.
잘 버티고 있다는 증거를
스스로에게 남기기 위해서.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다들 이렇게 사는 거잖아.”
그 말들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말에 가깝다.
책임 속에서의 하루는
대단하지 않다.
눈부신 성취도 없고
확실한 보상도 없다.
다만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 하나로
다음 날을 시작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고 있어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비극도 아니고
미담도 아니다.
그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다.
나는 지금도
이 책임의 일상 속에서
가끔 묻는다.
이게 내가 선택한 삶인지,
아니면
선택할 수 없게 된 삶인지.
하지만 아직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로
오늘을 끝낸다.
그리고 내일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