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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Dec 16. 2024

일본 인터넷에서 1933년에 나온 책을 샀다

90년 전에 쓰인 책을 살 줄은 나도 몰랐네



어느 날 편집자님 가라사대

"작가님 목차 좋은데요, 지금은 목차 중에서 일부로만 들어가 있는 '문화예술 살롱으로서의 킷사텐'에 대한 내용을 책 전체로 확장해 보면 어떨까요?"

라고 말씀하셨지어다.




3대가 공유하는 킷사텐, 나고야 킷사텐 봉봉 BonBon




막연히 킷사텐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은 그저 일상적인 공간으로서의 킷사텐이었다. 


- 60년 전 시부모님이 데이트를 하던 노포에 아들 삼 형제를 낳아 데리고 가고, 그 아들이 가정을 꾸린 후에는 3대가 다 함께 드나드는 곳. 

- 오전 시간에 커피를 시키면 삶은 달걀과 단팥 토스트를 무료로 주는 문화가 있는 곳. 

- 도시의 변화 속에서도 제 모습을 바꾸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곳. 

내가 생각했던 킷사텐은 딱 그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마치 파리의 카페처럼, 문화예술 살롱으로서의 킷사텐을 조명해 다룬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킷사텐이 지닌 노포 감성과 그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상만 기술해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반전은 내 안에 있었으니, 무언가를 깊이 파내려 가기 시작하면 정신줄을 놓고 달려드는 호기심과 대한민국의 교육으로 단련된 엉덩이 힘 덕에 나는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온갖 자료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재미에 붙들려 마음을 온통 저당 잡히고 말았다. 


비록 방대한 양의 자료를 꼭꼭 씹어 내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내 언어로 풀어내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론적으로 출판사의 제안은 더없이 훌륭했다. 알찬 책을 만들면서도 저자인 개인을 성장하게 했으니 말이다. 만약 제안이 없었다면, 지금 당장 쓰기 편한 방식의 글 속에 나를 계속해서 놓아두지 않았을까.




사서님이 도서관 서고에서 꺼내준 책 




하지만 세상에 쉽기만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학창 시절 학교에서 하던 공부에는 무엇을 배우면 좋을지를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교과서가 있고, 그 교과서의 내용을 알기 쉽게 전달해 주는 길잡이인 선생님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내용을 배우고 나면 또 다음 교과서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서서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그냥 정해진 것을 잘 익히기만 하면 끝.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 하는 공부는 망망대해에서 조개를 파는 것 같은 막막한 기분이 들게 했다. 문제를 내는 사람도 나 자신이고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도 나 자신인. 내가 어디서 무엇을 찾아 배우고 그 속에서 어떤 발견을 하는지에 따라 책에 실리는 내용도, 독자에게 전해지는 내용도 달라지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 망망대해에서 반짝, 하는 등대가 되어준 것은 역시 책. 과거의 책들은 미래의 책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서 '킷사'를 검색해 나오는 책과 논문 등의 자료 수는 11,305건. 그중에는 도쿄 국립국회도서관을 직접 찾아가야지만 열람이 가능한 책도 있었고, 지역 도서관 서고에 잠들어 있어 사서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열어볼 수 있는 것들도 있었으며, 가까운 도서관에서는 방출되어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책도 있었다.




진보초에 가면 선배 책의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도서관 서고에도 없는 책들이 모이는 곳은 바로 진보초. 

서울 청계천 헌책방거리나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처럼 고서로 가득한 거리에서는 50년 전, 100년 전에 나온 책들이 손에서 손으로 유통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사실상 소멸된 헌책방 문화가 진보초에는 활발하게 살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책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무덤 같은 곳이자 동시에 새로 태어나는 곳이라고 느낀다. 고서가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책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채 새 주인을 만나는 현장이니 말이다. 


하지만 도쿄에서 350km나 떨어진 나고야에 사는 나는 진보초를 제집처럼 드나들기는 어려웠는데, 놀랍게도 진보초에는 도쿄도 고서적 상업협동조합(東京都古書籍商業協同組合)이라는 협동조합이 있고 이 조합이 온라인 헌책방(https://www.kosho.or.jp/)도 운영하고 있었다.


영세한 고서점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온라인 몰을 운영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힘을 합친 고서점들은 하나의 유통경로를 만들어 각 서점이 보유한 책 정보를 올려놓고, 주문과 출고 등 일련의 과정을 공동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결제 측면에서도 꽤 자유로워서, 해외 발행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에도 무리가 없었다. 




쓰키지소극장 기관지 1933년 11월호




1933년에 발간된 쓰키지소극장 기관지를 구입한 것도 이 사이트에서였다.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일본에는 지금 우리가 아는 '연극'이라는 것이 없었다. 전통극인 가부키와 통속적인 유행만을 좇던 신파극만이 있었다. 

가부키도 신파극도 아닌 연극. 민중의 오락성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관객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연극. 도쿄에는 그런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청년들은 쓰키지소극장에서 '신극'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개하며 암흑의 시대 속에서도 창작을 해나간다. 


그런 쓰키지소극장은 일제로부터의 탄압도 참 많이 받았다. 사상 검열 때문에 대본을 마음대로 삭제당하거나 공연금지가 내려지는 일이 숱했고,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나 배우를 체포해 징역을 살게 하는 일도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극으로 치달을 무렵에는 '결전비상조치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하고 연극, 영화, 음악 공연 모두를 금지하기까지 하는데, 일본 전국에 있는 대극장 19 개관 (도쿄극장, 오사카 가부키자, 나고야 미소노자 등) 모두가 폐쇄당하고, 도호극장과 니치게키, 고쿠사이극장만큼은 남겨 군대가 통제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쓰키지 소극장의 구성원들은 일제의 일부라기보다는 조선 연극인들과 연대감을 갖고 함께 창작활동을 해나가는 존재였다. 우리 연극인 김우진은 쓰키지 소극장을 모델로 신극론을 수립했고, 홍해성은 쓰키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한국 근대 연극의 기틀을 쌓아 나갔다. 


바로 이 쓰키지 소극장 멤버들이 모여 연극을 논하고 창작을 하던 공간이 긴자에 있는 킷사텐이었던 것. 


고서적의 세계를 접하기 전 내가 알던 킷사텐은 그냥 '아침에 커피 시키면 공짜로 빵 주는 곳'이었는데, 고서적이 이끄는 대로 책장을 넘기는 시간 속에서야 비로소 "킷사텐의 예술가들이 이토록 치열했구나!" 하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내가 만약 고서를 만날 수 없었더라면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길어낼 수 있었을까.


 


이제는 내가 개인 소장하게 된 사진을 책에 싣다





그 후로도 나는 책에 필요한 자료를 진보초 고서점에서 구했고, 쓰키지소극장의 상연 모습을 담은 사진도 이곳에서 구입해 책에 실을 수 있었다.

그저 킷사텐이 좋아서 킷사텐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진보초에서 100년 전 자료 찾는 데에 매달리게 된 것인지. 내가 무슨 고서를 연구하는 학자도 아닌데 인생 참 알 수가 없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고서점이 나의 교과서이자 스승처럼 느껴지는 지금. 단 하나 아쉽고 아쉬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2023년 가을부터 불거진 울산대 장서 폐기 사건이다.

 

지난해. 울산대에서 '미래형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장서 94만여 권 중 절반에 가까운 45만 권을 폐기하겠다고 나섰다는 뉴스는 멀리 있는 나에게도 참으로 충격이었다. 

신간은 늘어가는데 옛 책을 언제까지 이고 지고 살 수는 없다는 도서관 측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폐기 대상 도서 중에 보존가치가 뛰어난 문화재가 섞여 있었던 것과, 책이라는 것이 내용을 디지털화해 보존하는 것 이상의 물성을 지녔음에도 그 특성을 고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오래된 책일수록, 대출 실적이 낮은 책일수록 폐기 우선순위가 되었고, 구출되지 못한 27만 권은 결국 재활용을 거쳐 초코파이 과자상자가 되었다는데.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이룬 베스트셀러가 아니더라도, 도서관 서고나 고서점에서나 간신히 살아남은 책이라 할지라도 영영 쓰임이 없으리라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학이 말하는 미래형 도서관이란 무엇일까. 

<도쿄 킷사텐 여행>이 출간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 지금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면서도 미래에 가장 가까운 책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은 누런 헌책 더미 속에서 탄생했으니, 책에게 있어서 무엇이 과거이고 무엇이 미래인지,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를 꼭 내다 버려야만 하는 것인지 잘 몰라 혼란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 책은 누구의 손을 거쳐 9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왔을까.

 

그 누군가가 이 책을 진보초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킷사텐에서 빵이나 뜯던 내가 편집자의 제안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고서를 뒤적일 이유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고서를 사고파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1933년에 발간되었다는 이 책도 과자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24년 11월 

존 레넌부터 하루키까지 예술가들의 문화 살롱

<도쿄 킷사텐 여행>을 펴냈습니다

우리의 도쿄 여행을 넓고 깊고 향기롭게 만들어주는 책이 되길 바라며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73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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