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드, 블로그, 인스타그램 - SNS 속 자기서사의 상품화
요즘 우리는 사람보다 ‘이야기’가 더 빨리 소비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의 상처와 실패, 부끄러움과 취약성까지도 플랫폼 위에 올려지는 순간 타인의 관심의 도마에 오르고 클릭의 대상이 된다. 어떤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한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사를 생산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이 구조를 스레드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으로 실감했다. 퇴사하고 백수인 내가 올해 돈만 7천만원 대기업 연봉만큼 썼다는 글은 조회수 10만, 좋아요 229개, 댓글 105개를 기록했다. 성인이 부모에게 손을 벌리고 부지런히 망했다는 고백은 솔직히 부끄럽고, 누군가에게는 도덕적 결함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런 글이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화려한 성공보다 조금 망가진 이야기, 꽤 부끄러운 고백, 어딘가 비틀린 자아에 더 오래 머문다.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자극성과 취약성이다.
또 다른 글에서는 “씻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썼다. 우울증 때문에 씻기가 너무 힘들어서 쓴 이 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고백인데도 조회수 7.5만, 좋아요 1.4천 개, 댓글 312개를 기록했다. 내가 씻는 데 오래 걸린다는 사실 하나로 이토록 많은 관심이 몰리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구나 우스우면서도 어딘가 서늘해졌다.
일상과 존엄, 사생활과 콘텐츠의 경계는 이미 흐려져 있었다. 특히 여성의 서사는 플랫폼 위에서 더 빠르고, 더 격렬하게 소비된다. 어그로를 끌만한 주제는 많다. 정치, 젠더, 소수와 약자 등 물어뜯을 먹이를 던져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걸 알면서도 나는 자기 선언을 하고 싶었고 단순히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쓴 글이 4.7천 명에게 읽히고, 379개의 좋아요를 받는 경험을 했다.
지지와 공감도 있었지만 그 관심의 밀도 자체가 낯설었다. 여성의 정체성, 감정, 고백은 유독 빠르게 논쟁과 감시의 대상으로 번진다. 그리고 그 관심은 종종 여성에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방향을 튼다.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외모 품평과 인신공격이 달렸다.
논쟁도, 비평도 아니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얼굴은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여성의 서사는 더 잘 팔리지만, 동시에 더 쉽게 침식된다는 것을.
악플러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그렇다 나도 충분히 알고 인지한 사실이고 감수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 글들을 올리면 어그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악플이 달릴 수 있다는 걸, 팔로워는 떨어져나갈지언정 조회수가 붙을 거라는 걸.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이상한 팔로워들은 한 번 걸러지고 내 사상을 존중해주는 팔로워가 늘어나길 바랐다. 나 역시 플랫폼의 규칙을 알고 있었고, 그 규칙을 아는 순간 이미 그 안에 갇힌 사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럴 거면 왜 올렸냐, 관심 받고 싶었던 것 아니냐
맞다. 어느 정도는, 아니 실은 많은 관심을 받고 싶었다. 글이 읽히고, 읽히는 과정에서 ‘나도 존재한다’는 어떤 살아있는 감각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 욕망조차 플랫폼이 인간에게 주입하는 방식이다. 결국 나는 타인의 소비를 위해 글을 올린 것이 아니라, 타인의 소비를 피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글을 올린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내 삶을 팔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가난과 실패는 분명 내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소비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가난조차 조회수와 반응으로 환원되는 순간, 나는 내가 살아낸 현실을 시장에 도둑맞은 듯한 감각을 느꼈다. 정말로, 가난도 도둑맞은 것 같았다.
그런 지점에서 최근의 스레드의 가난밈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이야기가 상품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삶의 무엇을 잃고 있는가. 서사는 원래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다리이자 연결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야기가 이제는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한 장치가 되었다.
우리는 사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포장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을 매개 삼아 이야기를 팔아먹는 자기서사의 상품화 시대. 그럴 수록 나는 이 모순을 끌어안은 채 어떻게든 나의 서사를, 삶을 붙잡고 싶다. 그것만이 내 고유하고 온전한 이야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