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차단하고 내 편 만들기

글쓰기로 타인과 연결되면서 끊기고 싶은 모순적인 시대

by TalChuRee
“남편이 스레드 해서 차단했어."
"가족이 스레드 해서 차단했어."

"잘했어."



요즘 SNS에서는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간다. 스레드(Threads)나 인스타그램 같은 사적인 SNS 공간은 어느새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과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철저한 500자 속 ‘나만의 방’이 되었다.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걸러내지 않고, 일상의 체온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곳. 한두 줄의 문장이 조회수와 공감을 휩쓸고, 짧은 고백들이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친구를 만들고 싶어하고 새로운 연결을 반복해 시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관계와의 연결은 끊어내고 싶어 하면서.



나 또한 한때 친동생이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를 때마다 어쩐지 힘이 되고 고마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좋아요’가 나의 숨소리를 따라붙는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동생의 호흡이 그 공간에 스며드는 느낌. 결국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레 동생을 차단했다. 그 마음은 죄책감보다도, ‘이 공간만큼은 침범당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에 가까웠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내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배우자를 차단했다는 사람들, 가족이 보지 못하도록 부계정을 만든 사람들, 모르는 사람은 괜찮으나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은 안 된다는 사람들.




우리는 왜 이렇게 연결과 단절을 동시에 욕망하는가.



나는 그 이유가 단순히 프라이버시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 중 하나는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나’가 아니라,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순수한 나’로 존재하고 싶은 욕구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들의 한마디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박힌다. 악플보다 가족의 무심한 한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말의 무게가 다르고, 말의 출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낯선 이들의 말은 가볍다. 어떤 말도 나를 규정할 힘이 없고, 얇은 연결의 끈으로만 유지되는 관계는 언제든 쉽게 끊어낼 수 있다. “차단하면 그만”이라는 말이 가벼운 농담으로 쓰일 수 있는 이유다. 낯선 이들과의 연결은 일시적이고 안전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나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엄마도, 누군가의 딸도, 누군가의 형제도 아닌 채로.



결국 이 시대의 연결은 단순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정체성의 조절 장치다. 원하는 만큼만 연결하고, 원하는 만큼만 노출하며, 감당할 수 없는 말의 무게는 미리 차단한다. 가까운 관계에서 오는 상처는 크기에, 우리는 가까움을 더 조심스럽게 다루고 먼 거리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



역설적으로 이건 관계의 붕괴가 아니다. 요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균형이다. 우리는 이제 ‘가까우니까 모든 걸 공유해야 한다’는 오래된 기대를 버리고 있다. 사랑해도 거리가 필요하고, 가족이어도 방해 받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으며, 관계가 깊을수록 때로는 더 많은 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독한 개인주의가 아니라 건강한 관계의 거리다. SNS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연결을 시도하지만, 그 연결은 이제 예전의 그것과 다르다. 관계의 무게를 덜기 위한 가벼운 연결, 나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거리두기,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온도만 유지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오늘도 연결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끊어지고 싶어 한다.



이 모순은 퇴행이 아니라, 삶의 여백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감각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관계의 시대에서 ‘존재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지 모른다. 빠른 변화, 너무나 다른 개인의 접점 속에서 이 역설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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