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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Mar 04. 2022

슬픈 가족사진

나에게는 슬픈 가족사진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때 아이 둘 남매와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나는 이사진을 볼때마다 슬퍼진다.


삼십 중반경 나는 군에서 전역을 다.평생 직업군인을 꿈꾸었는데 자의 반,타의 반에 의해 군에서 전역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맨땅에 헤딩을 하듯 청춘의 한시절을 군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온실 화초처럼 생활하다가  아무런 준비없이 사회라는 큰 바다에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였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전역은 나를 인생의 굴곡점 밑바닥을

알게 하였다. 사회에서 처음 취업이 된 회사는 회원권을 판매하고 판매 건수별 인센티브를 받는 형태였는데 잠시 두달정도 다녔나 싶다. 두번째 회사는 정상적인 회사였으나 한번도 해 본적없는 영업직에서 중장비를 팔러 다녔다.

당시 회사에서 받는 대우는 군 경력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사회 초년생이라고 하면서 신입사원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

어린아이 둘과 아내,어머니까지 함께 살면서 그 월급으로  살기는 집안 사정이 말이 아니였다.

 "당시 아이들 운동화는 왜 그리 빨리 헤어 졌던지..."


전역 당시 퇴직금과 군인공제기금을 받으니 서울에서 집을

살수 있는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목돈이 되었다. 보통의 전역자는 그 돈으로 살림집을 구하지만 나는 어머니 집에서 살고 있어서 당장은 돈이 필요치 않았다. 은행에 예금을 하고 이자를 받으면서 살림에 조금의 보탬을 하고 있었다. 크게 그 돈을 쓸곳도 없고해서 한 일년 정도 이자만  받고 있을때 갑자기 처제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돈을 굴려서 이자를 더 높히 주겠다"

"가족간  형제간이니 믿고 겨라"

몇번이고 끈질기게 계속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그돈이 전 재산이지만 별히 쓸데는 없었다 또 내 월급이 시원치 않아서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인지라 처제의 부탁이고 조금 면도 고해서 조금이라도 높은 이자를 준다는 처제에게 돈을 맡기자고 했다.


돈을 받아간 6개월 정도는 이자가 잘 들어왔다. 돈을 보낼때는 전화까지 친절하게 와서 돈을 잘쓰고 있다고

"걱정말라"까지 했다.


전역할때 주위으로 부터 "군 전역자의 퇴직금은 먼저 보는 자가 주인이다" 말을 참으로 많이 들었다.

세상에 높은 이자를 주고 하는 일이 정상적으로 잘 되어갈 수

있는 사업이 있겠는가? 너무나 쉬운 세상의 순리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가 나면 그때야 자책을 하게 되나 보다. 그렇게 믿으라고 했는데 사고가 났다. "가족간 형제간"을 외쳤처제는 도망을 갔는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동서를 붙잡고 물으니  동서는 퉁퉁한 배를 내밀고 "나는 모른다,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두껍이처럼 눈만 껌뻑거렸다.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고요하고 오늘은 어제처럼 지나가는데 나와 내처, 우리집 만은 눈앞을 한치도 볼수없는 깜깜한 어둠과 절망 속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가족사진을 한번 찍자" 말을 꺼낸다. "이런 상황에서  족사진이야" 않된다고 말렸지만 "교회의 아는사람이라 저렴하게 할수있다"

아내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고집을 부렸다. 나는 아내의 고집에 어쩔수 없이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시 아내의 고집에는 비장한 결의도 느껴진 듯 다.


함께 사는 어머니에게는 말씀을 드리지않고 우리가족만 찍자고 해서 남매 아이 둘과 아내와 찍은 가족사진이 있다. 요즘은 가족사진을 찍으면 옷도 통일하고 머리도 을 보고 찍지만 우리는 평상복 차림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진속 가족들의 무표정의 얼굴에서 무언가 쫓기듯 급하게 찍은  긴장감이 있는듯 . 사진을 찍을때 아내는 사진사에게 작은 사진 한장을 더  부탁 했다. 지갑에 편하게 갖고 다니기 위해 지갑크기의 작은 사진을 몇번이나 당부를 했다.


그후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이리저리도 못하는 상황이라 가만히 숨을 죽여 있으니 세월은 우리의 머리 위로 지나갔고 그때 날이 시퍼렇던 아픔도 미움도 점차 무디어 다.


이제 아내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많은 나이 되었다.  따스한 볕이 스며드는 거실에서  아내가 옛 사진정리를 하다가  작은 사진을 들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때 찍은 우리가족의 사진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울먹였다


"이때는 너무나 힘들어서 이 사진 한장을 들고 집을 나가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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