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6,25 전쟁을 참전하여 금화전투에서 다리를 다쳤다. 전투중 총상으로 왼쪽다리를 부상을 입고 앉을때 다리를 평생 접지 못하셨다. 항상 왼다리를 편채로 앉아야 하고 걸을때도 절룩거려야 만 했다.
청춘의 나이에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말은 절망 이였을것
이다. 아버지는 두번이나 삶을 끊으려고 시도했으나 삶은
모질게 이어졌고 아버지의 간절함을 알았는지 당시의 의술로는 어려웠지만 9번의 수술 끝에 다리를 겨우 살렸다. 아버지는 제 역활을 못하고 붙어만 있는 다리 때문에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야 했다.
나의 어린시절은 아버지 같이 전쟁중 부상을 당해 불구가 된 상이용사들이 모여사는 용사촌에서 살았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불구가 된 사람들이 사회의 적응이 쉽지 않고 격리가 필요해서 모여사는 곳이다.
어릴적 친구 영학이 아버지는 양쪽 발목이 없어서 의족을 하고 걸을때는 오리걸음처럼 뒤뚱거렸고 달석이 아버지는 한쪽 팔이 없어서 손대신 옷속에는 강철 쇠고리가 있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6.25참전 용사라 세대가 비슷하였고 팔,다리가 하나,둘 없었다. 유일하게 월남전에서 한쪽 눈을 다친 짝눈 아재가 젊다는 이유로 총무를 맡고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난 어른들의 삶은 홀로 살아온 대가가 죽은 자들보다 더 가혹했다. 80년 이전까지는 상이용사를 사회의 부랑자 취급을 했고 누구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려고 하지않았다. 사회에서 잊혀진 모습으로 살아야 했고 사회에 대한 그들은 울분이 생겼고 그 울분은 분노로 변하여 가족 들과 함께 할수밖에 없었다.
아랫 집 다리 하나가 없는 김씨 아재가 마당에서 뒹굴면서 소리를 치면 다음날은 화답을 하듯이 팔없는 달석이 아재가
또 소리를치고 땅을 뒹굴었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고성이 나고 뒹구는 소리가 동네에 퍼졌다. 어린 나는 어른이 되면 저렇게 뒹굴고 소리를 쳐야만 되는줄 알았다. 어쩌면 상이용사촌 어른들이 겪었던 전쟁은 끝나지가 않았고 마을에서는 가족과 함께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고 진행중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현충일이 되면 정부 높은사람들이 용사촌 격려를 하기위해 왔다. 그들은 밀가루 80키로 한포대를 집집마다 돌리고 마을사람들을 모아서 단체사진을 몇번 찍고 돌아 갔다. 그때부터 그 밀가루포대는 우리집 안방 윗목을 차지하고는 두달동안 그자리를 지켰다. 그 포대가 사라질때까지 우리집 삼시세끼 메뉴는 수제비와 칼국수로 구성 되었다. 80키로 한포대를 여섯가족이 두어달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제비,칼국수로 돌아가면서 해 먹었다. 시간이 없고 바쁠때는 뚝뚝 끊어 넣는 수제비이고, 저녁에 가족이 다 모인 만찬메뉴는 4홉짜리 소주병으로 얇게 밀어서 칼로 썰어 먹는 칼국수이다. 어린 나는 현충일이 되면 그때부터 밀가루를 먹기 시작하는 시점이 되는 날이여서 현충일을 싫어 했고 밀가루 기억만 있다. 그때 매끼마다 먹었던 칼국수와 수제비에 물렸는지 지금도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저어진다.
언제가는 현충일 선물로 라면 한박스가 집에 온적이 있다.
요즘세대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당시는 라면이 무척이나 귀했다. 집안식구 모두의 저녁에 칼국수를 듬뿍 넣고 라면 한개를 넣고 라면 향만 나게 아껴 먹어도 그 라면은 그렇게 빨리 동이 났는지 아쉽기만 했다. 다시 라면선물이 받고싶은 어린 마음에 크리스마스 날 동네교회에 가서 "아멘" 대신에 "라멘"이라고 수없이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우리의 정성이 부족했는지 그 이후는 라면 선물은 다시는 보지 못했다.
나의 현충일은 "어린 아이들부터 할머니,할아버지까지 온 동네사람 전체가 모여서 사진찍는 날",그리고 귀한라면, 밀가루 80키로 한포대 기억들 뿐이다. 그리고 밀가루 면을 먹기 시작되는 날이다.
국가를 위해 전쟁을 한 아버지의 세대도 고귀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온 그들의 가족들도 작은 유공자 일것 이다.
그 시대 젊은 용사들의 아픔과 분노를 함께 해온 그들의
가족들 모두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