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님 우리 동네에 장 칼국수 집이 생겼어요"
" 사람들이 줄을 서네요. 함 놀러 오세요"
친한 교회친구로 부터 전화가 왔다. "장 칼국수 집"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오래전 무언가 잃어버렸는데 한동안 그 기억을 잊고 살다가 이사하는 날 장롱을 치우면서 아이의 돌반지를 찾아 횡재한 기분이다.
대부분 닭 칼국수나 바지락 칼국수 집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어릴 적 보리고개 시절에 맛보았던 장 칼국수 집은 찾기가 쉽지 않다. 추억을 소환하며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친구와 함께 장칼국수 집을 찾아갔다.
"국시 해먹제이~"
앞산 위로 해가 "뉘엌 뉘엌"넘어가 하늘이 붉그레하다. 할머니는 푸른 플라스틱 바가지에 밀가루를 가득 담아 내왔다.
틀림없는 미국산임을 증명을 하듯 "쏼라 쏼라" 꼬부랑 글이 있는 밀가루 포대는 자기가 집주인 인양 안방 윗목에서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할머니는 이 포대에서 밀가루 한 바가지를 퍼 오신 거다. 밀가루를 대야에 놓고 소금을 적당히 섞은 후 조심스럽게 물을 밀가루 위에 붓는다. 물을 붓을 때는 밀가루의 가운데를 파서 마치 한라산 분화구처럼 만들어 물을 붓고 밀가루를 섞어면서 반죽을 한다. 물의 적절한 양이 반죽에 중요하다. 반죽을 하다 물 양이 적으면 신중하게 더 넣고 물 양이 많아서 질퍽하면 밀가루를 더 넣어서 반죽을 찰지게 해야 한다. 할머니는 양손으로 몇 십 번씩 밀가루를 조물 거리고 치대면서 반죽을 찰지게 한다.
"이만하면 된 거 같데이"
밀가루 반죽을 가마솥 옆 부뚜막 위에 올려놓고는 품에서
담배를 찾아 꺼냈다. 주름이 깊은 손으로 한 개비를 꺼내서 입에 물고 아궁이에 남아 있는 불씨를 찾아 불을 붙인다. 나는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뽀얀 담배연기가 좋았다.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지펴서 인지 부엌이 항상 거무튀튀한데 할머니의 담배연기는 구름같이 하얗게 피워나서 좋아했다. 할머니가 한 모금 담배를 피우면 나는 가마솥 옆에 앉아서 하얀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열 여덜살에 성동 첩첩 골짜기로 시집을 왔다"라고 늘 푸념처럼 어린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뒤를 따라서 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산길 몇 개를 넘어서 시집을 왔다. 서방님의 얼굴 한번 못 보고 "저기 성동골에 일 잘하는 총각이 있다" 말 몇 마디만 듣고 아버지 뒤를 따라 성동 골짜기로 왔다. 식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냉수 한 사발과 쌀 한 종지 올려놓고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어른들 말씀이라 무작정 따라왔지만 처음 몇 달은 바람에 흔드리는 나뭇가지 소리에도 어린 가슴이 떨렸고 유난히 큰 달이 뜨는 날은 집 생각에 밤마다 눈물로 지새었다.
첫아들을 낳고 "이제 이 집 귀신이 되었구나" 생각하였고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며느리 소명을 어느 정도 한 것 같았다. 둘째 딸을 가졌을 때는 서방님의 정도 깊어지고 사는 재미도 솔솔 하다는 거 알면서 이렇게 어른들처럼 한평생을 사는가 싶었다. 둘째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어 배가 점점 불러올 때였다. 그날도 부런 배를 하고 밭일을 하고 있는데 비보가 날아왔다. 비보 늘 화살같이 날아와서 깊은 상처를 남기는것 같다. 나무를 하러 갔던 서방님이 발을 헛짚어 계곡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여섯 달 산모의 몸으로 산을 엎어지고 기어서 서방님 계신 곳으로 달려갔으나 서방님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담배를 알지 못했다. 서방님의 죽음보다도 사는 게 더 걱정이 되어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젖먹이 아이 둘과 살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고 가슴은 냉정해졌다.
몇 시간이 흘러 꾸덕꾸덕해진 반죽을 들어 앉은뱅이 밥상 위에 놓는다. 우리 집에 몇 개 안 되는 가구 중 하나이다. 다리를
접어서 틈새에 끼워 보관하다가 다리를 펼쳐 밥 먹을 땐 밥상과 공부할 때는 책상, 국수를 만들 땐 조리 탁자가 되는 만능 가구이다.
할머니는 4홉 소주병을 찾아서 병의 옆면으로 반죽을 조심스럽게 밀기 시작한다. 처음 밀 때는 반죽이 찰져서 힘을 힘껏 주고 소주병을 밀어야 한다. 핏줄이 선 할머니 손등으로 이마 맺힌 땀을 쓱 닦고는 입에 힘을 주고 다시 소주병으로 반죽을 민다. 나는 옆에서 할머니 이마에 땀방울이 솟으면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고 할머니는 밀고 나는 또 닦고 단순 협동이 할머니와 나 사이에서 반복된다. 밥사발 크기 만한 반죽이 요술처럼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쟁반만 해졌다. 칼로 총총히 썰어 국수가닥으로 만들면 된다. 할머니는 칼을 들면 부엌경력을 칼로 보여 주려는 듯이 눈을 감고 또는 다른 곳을 보면서 썰어도 국수의 간격은 늘 일정하다. "또각또각" 칼소리가 날 때마다 밀가루 반죽이 국수가락으로 변신이 되어간다. 썰어진 국수를 한번 들어 "휘"흔들어 보고는
"이제 된 것 같데이"
"국을 해야지" 하면서 솥뚜껑을 열자 이미 준비해 놓은 물이 "펄펄" 끓고 있다. 된장 두 숟갈과 고추장 두 숟갈을 잘 풀어 넣자 맑고 끓는 물이 누런색 장국으로 변하고 구수한 향이 솥에서 코까지 퍼져 옆에서 바라보고 만 있는 나의 목구멍에서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를 만들고 있다.
국물을 한 국자 떠서 몇 번 "후후" 불고는 살짝 입으로 간 맞춤을 하고 이내 조선간장 몇 숟갈을 더 넣고는 "휘휘" 젖는다. 다시 솥에 국수를 넣고 아궁이 장작불을 지핀다. 한 소금 지난 후 텃밭에서 키운 야채나 배추 시래기를 넣고 살짝 끓이면 할머니 맛이 나는 "장 칼국수"가 된다. 할머니는 국물 한종 지를 떠서 "맛 좀보레이" 하면서 나에게 건넸다.
전쟁 통에 나간 아들이 돌아온다고 전보가 왔다. "○○○ 귀향" 다섯 자 짧은 전보인데 할머니는 그 전보를 소중히 들고 날마다 마을입구에 있는 언덕에 올라 신작로를 쳐다보곤 하였다. 서방님이 요절하자 아들을 집안 기둥처럼 든든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 기둥 같은 아들이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온다고 한다. 유난히도 맑은 날, 평소에 잘 보이지 않았던 먼 산이 보이던 날 그날도 할머니는 언덕 위에 올라있었다.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을 거리에서 한 사람 걸어오고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푸른 군복을 입고 한쪽을 절룩거리며 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들이다. 내 아들이다." 버선발로 쫓아가 덥석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한쪽 다리를 절면서 돌아온 아들을 보니 기가 막혔고 하늘과 나라와 옆집 강아지까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전쟁통에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다른 집 자식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내 자식은 돌아왔다고 위안을 해야 하는지...
절룩거리며 돌아온 아들은 군에서 배웠는지 아무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들 옆에 조용히 앉아서 아들 담뱃갑에서 한 대를 빼어 물고 한숨을 빨아 보았다. 목구멍이 따끔거렸지만 그래도 뭔가 체한 듯 답답한 속은 시원하게 내려가는 듯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고 나에게 가끔 한탄을 하곤 했다.
친구와 함께 찾아 간 "장 칼국수 집"
주차장에 차들이 꽉 차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 말처럼 줄을 설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장 칼국수 두 그릇을 시키고 주위를 둘러보니 현대식으로 인테리어가 잘 꾸며진 내부, 종업원들도 유니폼을 입고 깔끔한 식당이다. 칼국수를 먹으면서 예전 할머니 맛을 기억해 보려고 노력을 해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을 잃었나 생각을 해보니 여러 가지 양념과 채소를 많이 넣어서 맛이 너무 화려하여 예전 어릴 적 먹던 맛이 아니였 던 것 같다. 친구의 말에 옛 기억의 장 칼국수를 기대하며 찾아왔는데 씁쓸하게 돌아서 나오는 발길이 아쉬워서 몇 번이고 칼국수 집을 쳐다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