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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Feb 18. 2020

나의 두번째 세례

    

남들은 평생에 걸쳐서 한번도 받기를 힘들어 하는 세례를 두 번씩이나 받게 되었다 나이 육십에 내 생애 두 번째 세례를 천주교 성당에서 받게 됐다 세례식 중에 지난 개신교 시절이 생각이나서 나도 모르게 울컥 거렸다 그러나 애써 참느라고 노력을 했는데 나중에 세례식 사진을 보니 얼굴을 몹시 찡그리고 있는 모습 이였다    

개신교에서 나의 첫 번째 세례

젊은 시절 한때에 나는 군 생활을 했었다 군인이라 하면 우선 지방 이사가 생각이 떠오르나 나는 운이 좋아서 인지 남들처럼 많은 이사는 없었으나 그래도 몇 번의 이사가 있었다 진해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여 동네에서 어머니와 동생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나가면서 개신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개신교 교회 생활을 하게 되면서 우리 집 안의 작고 큰 행사도 교회에서 주관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 할머니,어머니가 돌아 가실 때 갑자기 당하는 상이라 정신없이 당황을 했는데 교회의 목사가 알려 주는 장례 절차에 따라 진행을 하고 많은 교인들의 위로와 도움으로 잘 모실 수가 있었다. 아이들의 대학 시험, 사업체 번영 등도 목사의 축복 기도와 함께 하였다 어쩌면 우리 집의 생활을 전부를 교회를 통해서 시작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날때도 이 교회 안에서 축복 속에서 가고 싶었다 이렇게 모든 우리 집과 나의 생활 속에 있는 교회생활은 잠시 방황을 하는 기간도 있었지만 삼 십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기간 동안 나의 믿음도 성장을 했는지 세례도 받고 안수도 받아서 교회내에서 일부의 업무를 맡아서 수행 하게 되었다 업무를 맡아서 교회 일을 하다가 보니 교회 내부가 보이기 시작 했고 불합리 한 점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불합리 점의 개선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순종”만 강요를 하였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믿음이 깊은 성도를 찾아 가서 상의를 하면 모두가 한결같이    

“믿음이 약하다” “시험에 빠졌다” 말을 하면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해결 해 주실거라 하면서 “기도만 하자” 는 모습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들의 눈에는 마치 내가 믿음이 약해서 마귀의 시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나 보다 이후 나의 교회생활은 무척이나 답답했다 보이지 않는 철벽, 아무리 소리를 쳐도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는 장벽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떠나 버리고 싶었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담장을 훌쩍 뛰어 넘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눈치와 그 동안 우리 집을 주관 해주신 교회의 고마움이 나의 목줄을 잡고 끌어 당기고 있었다 교회를 떠난 처음 몇 달은 장마비가 쏟아질 때 피해 가라고 하듯히 잠시 교회를 쉬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교회를 떠난다고 까지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나의 사정을 목사가 알면 나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그때 목사에게 불합리 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그런 생각 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편했다 주일 날 예배시간 때문에 못 보았던 TV 프로그램도 보고, 다른교회에 가서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혼자서 헬스장에서 땀이 범벅이 될 때까지 운동 해보면서 목사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목사는 일년간이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옷을 다시 “주섬 주섬” 주워 입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 목사를 만나기는  싫었다 아니 다시 돌아 갈수는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천주교에서 두 번째 세례    

카톨릭 성당을 스스로 찾아 왔다 이제 육순의 나이에 다시 또 교회를 옮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정하면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여러 교회의 예배 시간을 돌아 보았다 내가 살고 있는 주위에 이름이 꽤나 높은 대형 교회에서는 너무 성도들이 많아서 인지 새신자가 왔다 가는지도 모르고 중형급 교회는 너무 친절하게 하지만 예전 교회가 자꾸 생각이 나고 몇 명이 되지 않는 교회는 집안에 숟가락 몇 개까지인지를 다알 것 같아서 주저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어떤 교회의 목사는 코미디언 같이 연단에서 팔짝 팔짝 뛰어 다니면서 설교를 하는 모습이 재미도 있었지만 가벼웠다

동네에서 차를 타고 지나다니다가 우연히 본 성당도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성당에 스스로 찾아가서 관리실에서 근무하는 사무장을 만나서 카톨릭 성당을 다니고 싶다고 말하고 안내를 부탁 드렸다 교회와 너무 다른 예배 순서들 안내를 해주는 분이 여러 설명을 해 주었으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알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새 성도반으로 안내가 되어 교육을 담당 하시는 수녀를 만났다 수녀는 내게 “왜 개신교를 떠났냐” 고 물었고 나는 삼십여년 개신교 생활을 했다고 도도 하게 말하면서도 왜 떠났는지 말 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떠났다고 일일이 설명을 하고 누구를 붙잡고 억울하다고 이런게 세상이냐고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카톨릭에서 새성도 교육은 체계적이고 대체로 엄격했다 6개월의 교육기간을 이수 해야 한다나름 개신교에서 다 배워서 다 안다고 도도한척 하였지만 조금의 틈을 주지 않는 노 수녀에게서 개신교와 많이 다른 교리를 나름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오래된 개신교 생활에서 사도신경,주기도문을 다 외우지 못했는데 여기서 교육을 받으면서 줄줄 외우는 나 자신이 신기 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에 비해 많은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큰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육기간 중에 천주교 성지를 방문을 하는 시간이 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지킨 종교라는 점에서 숙연해 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역사가 개신교 시절은 우리와 멀리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인줄 알았는데 여기와서 보니 살아있는 역사이다 여기 천주교에서는 그런 분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성지 조성을 하고 있어서 우리와 함께하는 역사라는 점에서 나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어쩌면 그 충격으로 그동안의 개신교 생활을 내려 놓을 수가 있지 않았나 싶다     

6개월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몇 십년 전에 교회에서 받아본 세례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또다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식을 중요시 한다 그 날은 학창시절 졸업식의 분위기처럼 성당의 축제같은 행사를 진행이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꽃다발을 들고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 오고 그날 행사는 엄격한 규율과 격식에 따라 진행이 되었다

신부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물과 기름으로 세례를 주실 때 이제는 “개신교와 건너서 돌아 갈수가 없는 다리를 건너는 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리고 지난 개신교 시절에 가슴앓이를 하던 시간들과 아파하던 시간들이 파편이 되어 지나 갔다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 30여년의 세월이 생각이나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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