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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Feb 21. 2020

작정서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 새해에는 무엇에 중심을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저마다 계획도 세운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새해를 연다. 올 한 해의 중심이 되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다짐하기 위해 교회에 간다. 교우들을 만나면 새해 인사를 한다. 매주 주일마다 만나는 사람들이지만 새해인 만큼 특별히 덕담을 나누고 서로의 한 해를 축복한다.    

교회에 도착해 예배를 드리는 본당에 들어가기 전에 주보와 소식지를 받았다. 주보에는 예배 순서가 적혀 있다. 소식지에는 교회 소식, 혼사나 장례 등 교우 소식들이 실려 있어 대부분의 성도들이 소식지는 자세히 읽어 보는 편이다. 소식지를 읽으려고 펼쳐 보니 A4 용지 반절 크기의 하얀 종이가 있었다. ‘작정서’라는 제목 밑에 이름, 금액을 쓰는 공란이 있었다.     

‘뭘 작정하라는 것인지?’     

이런 의문은 나만 가진 게 아니었다. 교우들과 작정서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많은 이가 술렁였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새해 첫 예배가 시작됐다. 목사는 새해 첫 예배부터 집요하게 헌금을 강조했다. 약 50분의 설교 시간 내내 “십일조를 철저히 지켜라, 헌금을 많이 해라” 등의 내용뿐이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자의 곳간은 하나님께서 풍족히 채워 주실 것이다.”

“십일조를 철저히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작정서의 정체는 설교 말미에서야 드러났다. 목사는 한껏 목소리를 높여서 “나누어 준 작정서에 올 한 해 성도들이 십일조할 금액을 적어서 제출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한 성도가 볼펜이 없다고 하자 예배 진행을 돕는 성도가 펜을 직접 가져다 주면서 “집에 가서 쓰시지 말고 여기 이 자리에서 지금 작성해서 제출해 주세요”라고 했다.    

목사는 교회가 1년 예산을 수립하려면 성도들의 안정적인 십일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작정서를 쓰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정적인 십일조는 교회를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성도들은 주저하면서 서로 눈치를 봤다. 이내 본당의 묵직한 분위기에 눌려 작정서를 쓰기 시작했다. 성도들은 전장에서 “돌진하라!”라고 외치는 지휘관에 쫓겨서 무작정 달려야만 하는 병사들처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작정서를 썼다.     

몇 분 후 목사는 성도들이 다 썼는지 재차 확인하고는 짙은 벨벳 천으로 싸인 헌금통을 돌렸다. 그 안에 무엇이든 넣으면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다. 어떻게 사용했다는 말도 없다. 늘 침묵만 하는 헌금통에 병사들은 반 강제로 쓴 작정서를 넣었다.    

작정서가 다 걷히자 목사는 성도들이 선서를 하게 했다. 작정서 내용대로 십일조를 성실히 낼 것을 다짐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후 오른팔을 선서 자세로 들고 십일조 잘 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라는 것이다. 목사가 “십일조를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비장한 목소리로 선창을 하면 성도들도 따라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머리는 먹먹했다. 손발에 힘이 빠졌다. 현기증이 났다. 그렇지만 남들의 눈과 그동안 교회에 길들여진 습성 때문에 몸은 선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머리에서는 저항해야 한다고, 일어나지 말고 선서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었으나 몸은 이미 일어나 선서를 하고 있었다.    

수입과 지출이 정확히 정해져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한 해 수입을 비교적 정확히 예측이 가능한 직장인이라 하더라도 지출은 일정하지 않다. 사람은 미래를 모른다. 갑자기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해 십일조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목사는 그런 상황조차 불허하겠다는 입장인 것 같았다. 자영업자, 일용직 노동자들은 당장 내일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1년치 십일조 계획서를 쓸 수 있을까?     

때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일반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회보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도 목사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세요”라고 선포하면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 내 목사의 권위는 그만큼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언론이 보도하듯이 목사가 성도에게 성폭력을 행사하고, 성도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고, 교회 돈을 횡령해도 계속 목사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언론이 알리는 사건들은 문제 상황이 지속돼 곪아 터지고 난 일들일 수도 있다.    

목사를 맹신하는 성도들은 또 어떤가. 목사님 명예에 흠집이 나면 안 된다며 쉬쉬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사의 범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성도는 닭장 속에 갇혀 사는 닭 같다. 복날에 죽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닭장에 서서히 길들여져 사는 닭처럼, 막말하는 목사의 설교를 매주 들으면서 교회에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를 길들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어야 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세상에서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 신의 사랑을 느끼며 심신을 위로받고 안식을 취하는 곳이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치고 힘든 성도의 삶을 헤아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역할을 감당하며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지역 사회의 중심이 돼야 하는 교회가 물질을 우선적으로 강요한다. 예수의 몸된 곳이어야 하는 교회는 여느 기업이 그러하듯, 이윤을 우선하는 시장 바닥이 됐다. 성도가 가난한지 넉넉한지, 형편은 어떤지,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작정서를 쓰게 한다.    


얼마전 교황 프란체스코 영화를 보았다 영화내용은 교황의 생활과 업무 중에 일어나는 일과 사무하는 모습을 다큐멘타리로 제작되어 있어서 지루한 영화이다 영화 내용 중 교황이 말씀하신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교회가 돈을 쫓아서 가면 그 교회는 종교가 아니고 예수를 대상으로 문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 첫날 경제지에는 한국 조선 사업의 불황, 중소기업체 줄도산, 서민 가계 생활이 빡빡하다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사가 성도들의 생활 수준을 살피고 고민을 들어주는 마을 심방은 몇 년 째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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