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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Mar 03. 2020

제풀에 쓰러지든지

  

그 해는 교회 설립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교회는 설립의 역사가 한국 기독교 자체의 역사일 정도로 유수 깊은 교회였다. 남들에게 교회를 소개할 때 우선적으로 교회의 역사부터 말할 만큼 성도들 역시 교회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가 70년이 되는 해의 행사를 기대했다. 몇 년 전 안수집사로 임직할 때 임직자들 모두가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낸 거액의 임직 헌금도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70주년 기념행사를 기대하고 있었다.    


교회는 약 3년 주기로 안수집사, 권사, 장로를 성도들 투표로 선출한다. 교회 내에서 덕망이 있고 봉사를 많이 한 성도가 선출되는 게 당연하나 이것도 직분이고 ‘어느 교회 장로’라는 직분이 사회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위 같은 신분 상승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투표 시기가 되면 교회가 시끄러워진다. 어떤 이는 성도들 집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찍어 달라고 호소했다. 또 어떤 이는 교회 내 사조직을 구성해 조직 내에 있는 사람을 선출하고 다른 사조직과 연계해 서로 찍어주기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돈을 돌렸다는 소문이 성도들 사이에 파다하게 돌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선출되면 약 5개월간 매주 토요일 오후에 약 4시간 정도 피택자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 강사는 대부분 목사인데 목사 일정이 바쁘면 수석 장로가 대체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강사들이 아무 자료도 없이 강의에 들어와서 생각나는 대로 아무 이야기나 했다. 그러다 보면 앞에 한 말을 뒤에서 또 하고,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은 본질을 많이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용이 이해 가지 않았지만 교육을 필수로 이수해야 했기에 빠질 수는 없었다. 교육 내용보다 출석체크가 더 중요했기에 피택자들은 아무 말 없이 시간만 가라는 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강의하는 목사와 피택자 사이에 암묵적 합의라는 절묘한 선 같은 게 있는 듯했다. 피택자들 중에는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누구도 그 교육 내용과 질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육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 장로 피택자 중 한사람이 교육장 앞에 나왔다 그리고 안수집사와 권사는 각 150만 원, 장로는 500만 원으로 임직감사 헌금을 내라고 했다. 이는 당회(교회의 지배층)의 뜻임을 재차 강조하면서 이 헌금은 70주년 행사 때 사용할 거라고도 했다. 피택지들은 투덜대긴 했지만 다들 절묘하게 지키고 있는 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인 헌금은 약 수천 만 원이나 되었다.     

교회가 70년이 되도록 함께해 온 성도들을 우선하는 행사를 생각해 봤다. 전 성도가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을 갈 수 있는 야외 예배를 기획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도들이 다 함께 연탄 배달 봉사를 하면서 몸은 고단하지만 이웃 나눔을 실천할 수도 있고, 식어가는 믿음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교회의 70년 역사를 추적해 역대 목사님은 어떤 분들이었고 사역을 열심히 한 옛 어르신들은 어떤 분들이었는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교회가 이 사회에서 중심이 될 수 있는 그런 행사를 성도들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큰 기대를 안고 교회에 갔는데, 성도들이 쑥덕쑥덕하면서 울분에 차 있었다.    

“70주년 행사랑 교회 건축이랑 무슨 관계래?”

“무슨 시장통 점포처럼 너저분하게 헌금통을 깔아 놓아서...”    


지난 주, 당회가 성도들에게 헌금만 강요하는 70주년 행사 계획을 발표한 것이었다. 교회 앞 주차장 부지에 교역자들의 사택을 신축한다고 건축헌금, 노인들 백내장 수술을 위한 개안헌금, 저개발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우물파기 헌금 등 시장에서 자판 널어놓듯 헌금통을 깔아 놓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항존직분자들에게는 개인당 얼마 정도는 내놓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한 장로는 70주년 기념으로 70명이 모여서 찬양 대회를 하자고 제안해 놓고는 제안한 자신은 말으로 만 계획을 하고 정작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랫사람들 격인 일반 성도들이 알아서 다 해 주기만을 강요를 하고 있었다.    


70주년 기념 행사의 실체가 이러다 보니 성도들의 기대는 성벽이 무너지듯 허물어졌다. 성도들이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 조사도 해보지 않고 지배층들의 생각대로 70주년 행사를 헌금을 강요하는 행사로 만들고 있었다. 성도들은 화가 나서 펄펄 뛰기도 했고, 헌금을 얼마나 할지 눈치를 보기도 했고, 그냥 하라는 대로 하겠다며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나는 화가 나서 펄펄 뛰는 그룹에 있었다. 성도들끼리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분노는 절망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소낙비는 피해 가야 할 것 같아, 시끄러운 시절이 지나갈 때까지 교회 출석을 몇 개월간 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교회에 가지 않고 친구를 통해서 이따금 교회 소식을 들으며 예배는 TV의 기독교 방송으로 드리고 있었다. 그때 평소 친분이 있던 교우에게서 잠시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집 근처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우는 얼마 전 자신이 교회 수석 장로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우가 수석 장로에게 “장로님, 안수집사 몇 사람이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했더니 장로가 “내가 다 알고 있어. 누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지. 목사님께 교회에 안 나오는 안수집사 몇 명을 이야기했더니, 목사는 화를 내면서 그 사람들 제풀에 쓰러지든지 말든지 놔 둬 버리라고 하잖아”고 하면서 수석 장로는 목에 동맥선을 불끈 솟으며 자랑스럽게 떠벌렸다고 한다    


그 말은 살아서 계속해서 내 귀 속에서 웅웅거렸다 하지만 “뭔가가 잘못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전달 중에 증폭이 되었을 것이다”하면서 나는 내귀를 의심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주에 수석 장로 집안에 초상이 났었다. 직접 찾아가서 문상은 못 했지만 나름 부의금을 정성들여 보냈는데 고맙다는 인사 대신 가슴을 후비고 찢는 말로 교우를 통해서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내 탓이다, 내 탓이다”라고 혼자서 몇 번씩이나 자책도 했다 그러나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교회라고 하면 여기 뿐 인줄 알며 살았고 내 교회라고 생각을 했고 마지막도 여기서 마감 하려고 했는데 서운한 무엇인가는 가슴 속에서 계속해서 끓어 올랐다 도저히 혼자서 가라 앉히고 삭힐 수가  없는 무엇인가는 그 말의 진위를 가려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를 통해 내가 교회에 가지 않는 이유를 목사를 직접 만나서 설명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면 목사가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아니면 “미안하다” 하는 해명이나 변명으로 돌아 올 줄 알았다 아니면 친구를 통해 어떤 대답이라도 전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목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목사가 연락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1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어떤 연락도 매정하게 없었다. 교우들은 이제 교회로 돌아오라며 걱정을 하고 몇 번이고 집에 찾아왔지만 교회 지배층이나 목사에게는 냉정하게 잊혀진 존재가 되고 있었다 나는 목사의 해명을 듣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옷을 주섬 주섬 입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모든 일에 눈 감고 교회로 다시 돌아가면 “제풀에 쓰러질 것” 같아서 지난 수십 년을 다녔던 정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1년 반이 지났고 어느 음악회에서 목사 부부를 우연히 만났다. 목사는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와서 “한 번 보자, 다시 한 번 만나자” 했지만 그 목소리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목소리로 들리지가 않았고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너는 내가 보자고 하면 달려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하는 슈퍼 갑의 권위가 내포된 목소리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고 메일로 편지 한 통을 보내면서 다시 만나자는 목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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