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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래 Mar 04. 2020

재적회의

   

교회 내에는 교회를 운영하는 두 개의 조직이 있다. 하나는 당회다. 교회 내 모든 행사 계획을 수립하며 예산을 집행하고 관리하는 조직이다. 일반 회사의 이사회쯤 될까? 나머지는 재적회의다. 당회에서 올라온 예산안을 심의하고 추인하는 중요한 회의다. 대의원 회의, 주주 총회와 비슷하다.    

당회에는 교회 내 지배층인 장로만 참석할 수 있다. 안수집사였던 나는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당회가 끝나면 장로들 입을 통해 회의 내용을 대강 알 수 있었다. 친목파 장로 누구는 어떤 안건에 찬성했다, 다른 누구는 반대했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목사 뜻대로 결정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회에서 부결된 안건을 목사가 찬성할 경우, 목사는 반대 의견을 낸 장로들을 한 명씩 만나서 설득한다고 한다.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목사가 찬성하면 그 안이 통과된다는 뒷말들이 성도들 사이에 퍼지곤 했다. 성도들은 술렁거렸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목소리를 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느 교회든 그럴 것이다. 성도들은 뒤에 숨어서 불평 몇 마디하는 것으로 끝냈다.     

당회를 통과한 안건은 추인을 받기 위해 재적회의에 상정된다. 재적회의에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지만 교회는 성도들에게 재적회의가 언제, 어떤 내용으로 열릴 것이라는 예고를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 가서 주보를 받아보면 뒷면에 당일 오후에 재적회의 있다고 작은 글씨로, 알 수 있는 사람만 알 수 있을 정도로 공지했다. 마치 모든 성도가 회의에 대해 몰라도 되거나 알면 안 된다는 것 같았다.    

성도들은 재적회의에 무관심했다. 회의가 있다고 고지해도 예배만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를 빠져 나갔다. 뒤에서 술렁거리기는 해도 회의 참석에는 다들 무관심했다. ‘재적회의에 참석해 성도들의 불만을 전달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면 달라지는 게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어느 날 처음으로 재적회의에 참석했다.    

성도가 약 300명인 교회에서 재적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교회법에는 회의 성립에 필요한 인원 수가 명시돼 있지 않았다. 오로지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인원만으로도 회의가 성립될 수 있었다. 300명 중에 10명이면 전체 성도의 약 3%다. 이 적은 수가 교회의 예산과 계획을 추인하는 것이다. 그마저도 목사가 회의를 진행하며 발언권을 쥐고 있으니 애초부터 회의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개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목사가 물으면

“의견 없습니다. 인쇄된 내용대로 하시지요” 앞줄의 누군가가 선창을 외치듯 답했다.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손 들고 찬성하면

“네, 이 사안은 통과합니다” 목사는 선포했다.    

회의는 일사분란하게 10분만에 끝났다. 누구도 발언하지 않았다. 발언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발언할 사람이 있냐고 묻지도 않았다. 발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될 정도로 강압적인 분위기였다. 공장 컨베이어벨트 위 물품이 지나가듯, 안건이 벨트 위에 올려지면 그대로 통과됐다. 회의 시간 10분 동안 무슨 안건이 진행됐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 가지 않았다. 안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토론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찬성한다고 앞장선 성도에게 무슨 안인데 찬성했냐고 물었다. 그 성도는 “교회 일은 이렇게 하는 거야. 위에서 다 알아서 하는 거야”라고 했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100년을 훌쩍 넘긴 교회인데도 깨끗하게 인테리어된 실내 장식, 은은한 불빛, 목재로 된 거대한 십자가, 이 모든 것이 한 덩이로 어울려 나를 눌렀다. 결국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못 뱉었다.    

공산당 인민 재판과 유사하다. 질의, 다른 의견은 불가능하다. 찬성만이 가능하다. 안건을 통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재적회의 대부분이 이 같은 형식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성도가 회의에는 무관심했다. 지배 계층은 그 무관심을 이용해 3%의 참석만으로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통과된 사업들 대부분은 진행 과정 중 문제가 생겼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업의 허점, 보완할 점 등을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교회를 나오면서 마주친 어떤 장로에게 “교회에서 추진되는 사업은 왜 이렇게 부실합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분의 대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교회 사업은 너무 알려고 하면 안 돼. 적당하게 눈 감고 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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