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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Jun 28. 2024

Sammy Seung-min Lee

두 세계를 연결하는 공조자

더운 날이었습니다. STEAM 교육에 보조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강사 선생님께서 자신의 옛 친구를 만나볼 것을 권유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합정역으로 향했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역과 멀지 않은 전시장에 들어섰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만든 '책'으로 전시하고 계신 Sammy Seung-min Lee 작가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책'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작가님은 교포였고, 소재는 한지였으며, 형태는 마치 작은 건축 모형 같았습니다. 특이한 구조로 열리는 책은 안에 작가님의 삶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민자로서, 어머니로서 경험한 것들이 차곡차곡 작품 안에 쌓여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삶을 살고 계신지 작품과 함께 친절히 설명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에 거주하면서, 한국에서 명장이 만든 한지를 구해 작품을 만들고,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고,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작가님은 미국에 아시아 미술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며 레지던시 공간도 운영 중이라 하셨습니다. 잠깐 뵈었지만 작가로서 을지로에 대한 흥미와 애정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저는 느슨한 덴버의 을지로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항상 동료들과 함께 을지로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배경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장점이 마주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셨습니다.  두 개의 눈보다 여러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을 나누는 작가님은 최근 1년의 한국생활을 마무리하며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마주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세상에 대한 존중과 애정으로 기꺼이 두 세상이 함께 할 수 있는 공조자를 자처하는 Sammy Seung-min Lee 작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목차

Sammy Seung-min Lee 이야기

작업이야기

공간 이야기

내일 이야기




Sammy Seung-min Lee, 2024 Ⓒstudio visit 정채령





Sammy Seung-min Lee 이야기



안녕하세요 작가님. 독자분들께 작가님 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Sammy Seung-min Lee입니다. 한국에서는 ‘이승민'이라는 이름으로 자랐고, 지금은 ‘Sammy Seung-min Lee’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Denver, Colorado)에서 미술 작가로, 교육자로, 기획자로, 레지던시 운영을 하고 있어요. 아시아계 소수자, 여성, 어머니, 예술가의 정체성을 느끼며  정책에 참여기도 하며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예고를 재학하던 중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그게 32년 전 일이네요. 그러다 풀브라이트의 US Scholar 로선정 되었고, 그렇게 32년 만에 작년 8월부터 1년 동안 한국에 들어와 생활하게 되었어요. 어릴 적 다녔던 중/고등학교 옆에 집을 구하고 을지로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그 결과로 ‘더스토어 남산'에서 개인전 ‘문라이트 인 콜로라도 Moonlight in Colorado’를 최근에 열었었습니다.



문라이트 인 콜로라도 Moonlight in Colorado 전시 전경, 더스토어 남산, 2024



미국으로 가신 사건이 작가님 삶에 큰 변곡점 중 하나였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미국으로 향할 계획을 하게 되신 건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엄마한테 유학을 보내달라고 그랬어요.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생각들이 축적이 된 것 같아요. 워낙에 뭐에 딱 꽂혀서 한순간에 결정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쌓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중 하나는 중학생 때 아그리파 석고상 소묘 데생 을 하고 있었어요.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학원 선생님이 딱 앉으시더니 “잘 그리고 열심히 묘사했는데 혹시 아그라파가 누군지 아니?”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몰라요."그랬더니 “로마 장군인데 너무 곱게 묘사를 했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종이 한편에 ‘힘력 자(力)’를 딱 쓰시더니 그림을 봐주셨어요. 그래서 속으로 ‘아니, 지금 속이 텅 빈 하얀 석고를 형광등 밑에서 그리고 있는데 무슨 장군의 포스가 나야한다는 거지?’ 생각했어요. 그때 그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냥 보는 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보다 안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민자들과 유학생들의 사고방식은 달라요. 큰 차이가 있어요. 유학은 돌아올 집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다리를 불질러 놓고 건너간 사람과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장소와의 관계가 달라요. 사실 초기에는 너무 미국에 사는 것이 즐겁기만 했어요. 돌아갈 집이 있는 상태였지만 점점 시간이 가면서 이민으로 생각이 바뀌고 그러면서 이민사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이민자들의 생각을 공감하게 된 것도 사실 감사한 일이었어요.


평생 한 나라에서 나고 자라서 살고 있는 사람도 그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잖아요.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사는 분들 중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여기시는 분을 뵙게 돼요. 미국인들도 많은 경우 이민자들의 후손이긴 하지만  사람마다 다 느끼는 정도와 적응하는 방식과 살아가는 모습이 다 달라요. 제 경우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없어지는 과정을 그렇게 경험을 했어요. 그 경험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같이 연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했어요.


이번에 한국에 돌아오셔서는 어떠셨어요? 모교 근처에 집을 구하셨다고 하셨는데 학창 시절 봤던 그 풍경을 30여 년이 지나서 다시 보게 되면서 작가님 안에서도 여러 자극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작은 일에도 의미부여를 하면서 혼자 신기해하는 타입이에요.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32년 전, 미국으로 떠났을 때가 8월 1일이었어요. 이번에 한국으로 도착한 날이 8월 1일이더군요. 32년의 시간을 초월해 계속 연장된다고 순간 느꼈어요. 돌아갈 땐, 덴버가 15시간 정도 시간이 늦기에 내가 여기서 떠나 덴버에 도착하면 없었던 일처럼 시간이 연속되는 느낌이 오지는 않을까 상상해 보기도 해요. 내가 서울에서  보낸 시간은 뭐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고등학생에 떠나서 아줌마가 되어 돌아와서 학창 시절 느꼈던 감성이 여기 옴으로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미국으로 가기 전에 시간이 멈춘 곳으로 다시 온 것 같기도 해요. 


1년 동안 살기 위해 한국에 돌아와서는 일단 너무 재밌었어요. 이쪽을 골라서 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모교 옆으로 거처를 잡게 되었어요. 모교를 지나치면 제가 미국으로 떠났을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보여요. 피곤하지만 맑은, 조금은 덜 만들어진 어린 나의 얼굴들을 바라봐요. 걔네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저와 또래인 학부형들이 학교에 오시는 모습을 봐요.


오랜만에 어머니를 모셔와 같이 살면서 당신은 44살이고 저는 16살로 착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약간의 기싸움? 같은 것이 있어요. 32년 전으로 로 돌아간 관계를 헤쳐나가야 했어야 했어요. 제가 떠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가 막 이상하게 연결되었다가 풀렸다가를 반복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어요.


서울이 많이 변했지만, 구의동 인근은 안 바뀐 동네 중 하나잖아요. 만약 제가 신도시에 자리를 잡았다면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못 느꼈을 것 같아요. 어쩌다 이곳에 와서 계속 곰곰이 씹어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어요. 미국에 돌아가면 여기서 느꼈던 것들이 다 작업에 녹아나지 않을까 싶어요.


날짜와 장소가 참으로 절묘하네요. 작가님께서 다시 한국으로 초대받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자꾸 읽고, 자꾸 바라보고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이게 다 드라마가 되어요. ㅎㅎ



작가님께서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넓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으셨을 텐데 작가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관계 맺기에 대한 노하우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들이 있을까요? 


끊임없이 서로에게 좋은 관계를 만들고자 해요. 내가 일생 동안 돼 갚지 못할 만큼 큰 은인 같은 사람을 만날 때도 내가 그 사람한테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어요. 남을 도와준다라는 건, 어떤 이를 도와줘 보고 좋은 느낌을 받아보지 않고는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나의 시간을 쓴다는 건 큰 일이죠. 우리 시간이 너무 없잖아요. 그 없는 시간을 쪼개서 남에게 준다는 것이 자연히 그냥 되는 일은 아니죠. 


내 시간을 아낌없이 나눠주고픈 사람들하고 함께 하는 것은 같이 좋은 관계에서 살게 되는 거라 행복해요. 그 관계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구조의 기틀이 되어준다고 생각해요. 


우리 하는 일들이 그런 것 같아요.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며 함께 할 때 나도 잘 될 수 있는 영역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함께 나누고 성장하는 삶의 연장선에 올해 을지로에서 하신 작업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을지로의 시간이 나의 서울 살이의 하이라이트였어요. 제가 을지로에 와서 작업을 한 모든 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남한테 베풀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어요. 을지로에서 공간을 임대하고, 전시장도 대관해야 했다면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지금과 달랐을 거예요. 이렇게 제가 그분들의 베풂을 받아서 더 가능한 것들이 열렸었어요. 서로 관대한 관계가 계속 생길 수 있게 된 것이 모든 것을 풍족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 구조인 것 같아요. 그래서 감사히 받았고 저도 때가 되면 베풀어 나가려 해요. 








작업 이야기



작가님께서는 항상 개인의 이야기에서 작업이 시작되고 완결되는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해서 사실 두 가지로 느끼고 있어요. 하나는 나의 서사를 녹아내는 것이 부끄러운 거죠.  내 이야기로 시작된 것을 꺼내놓지만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터라 조심스럽고 창피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거기서 건드려지는 것에 내가 공감을 하고 녹여냈듯이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촉수에 작업이 연결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감히 해봐요. 


다른 하나는 내가 조금 더 대단한 얘기를 하고, 조금 더 추상적이고,  조금 더 시적인 얘기를 해야 되는데 너무 수필만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냥 아직까지는 성장하는 과정이니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계속 가보고 있어요. 그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해요.


제 스스로 제 삶과 작업에 진실되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내 얘기에 집중을 하니 내가 나를 잘 모르듯 내 얘기도 다양한 각도로 충분히 바라보고 할 수 있는 과정이에요. 내가 조금 더 성장하면 확장이 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제 개인사가 너무나 독특하지 않기에 보편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건 알아요. 특이한 삶을 살아서 그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니깐. 


작가님의 작업 중 Mammorial(모유수유를 다룬 책)도 그렇고, 을지로에서 만들어가셨던 Street Art Cart(수레를 만든 작업)도 그렇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바라보며 발견한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언어의 형태로 보여주면서 그게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마음 한 구석에서는 시각적으로 놀라운 작업들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요술을 부리듯이. 내공이 쌓이다 보면 그런 걸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계속 매만지고 아껴주면서 만들어가고 있어요. 일단은 나도 위로받고, 위로되는 것도 굉장히 즐겁고 감사한 일이에요. 


아마, 미국에서 소수자로 사는 것은 나 같은 다른 소수자를 또 돌아보게 하는 여건에 놓여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최근 미국에서 오기 전에 했던 전시 중 하나가 인간의 존엄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 ‘150sqft’를 가지고 'Sheltered, Arrived' 라는 작업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작업을 하면서 관통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제가 오래 만들어온 아티스트 북 작업들에서도 공간의 의미를 최대한 해왔었고, 포차 작업도 어떤 한 사람이 경제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만든 것이었어요. 심지어 가방 하나에 담겨 이동 가능하도록 만들어서 생계수단으로써의 역할에 힘을 실었어요. 같은 맥락으로 계속 확장되는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 작품을 매만져준다는 말이 참 적절하게 느껴져요. 이번에 작업하시면서 알루미늄 캐스팅한 작업을 끊임없어 흑연을 바르며 문질러 줬던 모습이 당시엔 그냥 작업하시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계속 싸왔던 짐과 내 안에 쌓여 온 이야기들이 계속 만져주며 이해하고 다듬으며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작업하시는 작가님의 모습을 보면 행복해 보였어요.


행복하죠. 작업과 나의 관계가 행복하려 해요. 왜냐면 힘들잖아요. 내 몸도 힘들고 어떤 목표를 끄집어내서 작업하는데 그것이 항상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들도 아니잖아요. 그 과정이 행복하지 않고 나를 깎아먹는 작업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와 작업의 관계 설정, 나와 타인과의 관계 설정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의도해보는 것이 서로서로 오래갈 수 있는 관계인 것 같아요.


작품과 나, 나와 타인이 스스로 자존을 지키며 건강한 관계로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가 작업 안에도 담겨 있는 것이 느껴져요.



Mammorial_view II, Edition of 15, 2017 Ⓒstudiosmlk




오늘날까지 작가님의 작업을 보면 관통하는 공통점도 있지만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어요.  그 다양한 변화의 과정 중에 예고를 다니던 경험에서 변곡점이 생기기 시작한 지점은 어떤 사건이었을지 궁금해요. 


기억에 남는 순간은 미국에서 대학교 1학년 때 페인팅 수업을 했었어요. 교수님이 제 붓을 딱 잡으시더니 저보고 앞으로는 왼손으로 잡고 그리라는 거예요. 저는 오른손잡이인데. 그래서 충격을 받았죠. 왜냐면 초등학교 5학년에 입시에 투신해서 쭉 그리는 훈련을 해왔었는데. 그때 작업에 대한 개념은 약했어요. 말도 잘 안 통하고. 나의 얄팍한 손재주에 의존해서 살고 있었는데 완전 쇼크를 ‘퍽’ 먹어 버린 거죠. 그 사건이 Representation art(표현예술)를 접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렇게 나의 어떤 표현방식을 내려놓으면서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었어요.


앞서 말씀드린 두 분의 스승님 외에도 저는 여러분의 좋은 멘토들이 계셨어요. 이분들과의 관계가 지금까지도 제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네요.


작업의 변화 과정에서도 ‘스승'이라는 역할을 해준 사람과의 관계가 많은 영향을 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계를 설정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 다시 작업의 양분이 되는 이야기가 한편에서는 쌓여 형태적으로 성숙하는 과정 같이 느껴져요. 지금까지 작업해오신 것 중에 대표적인 형태의 작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 작업은 하나를 시작해서 마무리되어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시리즈로 하게 되더라고요. ‘Very Proper Table Setting’ 작업 자체도 지금 이것을 그만해야 되나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 작업은 을지로에서 만든 포차를 가지고 세상 어느 한 구석에 가더라도 제가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만들어 주는 작업이에요.


포차를 세우고 작업을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요. 제가 뭘 파는 상인인 줄 알고 와요. 핫도그, 붕어빵 같은 간식거리를 파는 이민자 여성의 포차로 보이기 때문일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흔하고 평범한 장면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편하게 접근하고 참여해요. 내성적인 저에게 이런 선입견은 좋은 전략이 되어줘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뭘 살 수 있나 하면서 오게 되고, 발걸음은 작업에 참여로 이어져요. 참여자들이 짧게나마 차린 밥상에 대해 이야기 들으며 그 사람 인생을 듣게 돼요. 짧은 시간에 굉장히 소중한 것을 내놓고 가요. 제가 배울 기회가 많이 생기고 귀한 이야기를 조합해서 어떻게 작업으로 만들어낼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재조합해 작업에 녹여 다시 그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저에게 매우 만족하고 뿌듯한 작업 방식이에요.


테이블 위엔 한국 반상기가 놓여 있고 제가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게 생겨요. 전에 쿠바인 이미자가 할머니와 먹던 점심을 한국 반상기에 차리면서 그 사람이 경험한 개인적인 가정사, 쿠바의 음식 문화 이런 것들을 나에게 전달해 줬어요. 그릇 별로 용도가 있지만 그것은 참여자들의 의지에 따라 다른 것들을 담을 수 있도록 해요. 예를 들어 젓갈을 담는 그릇이지만 당신이 담고 싶은 것을 담으면 된다고 안내해주곤 해요. 그 과정에서 짧지만 진정성이 담긴 교류가 일어나요. 


이 프로젝트가 제가 작가로서 소중한 이야기들을 작업으로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제 몫인데 제가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 시리즈를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그래서 진행하다가 막히면 잠시 내려놓고 다른 작업을 하고, 또 여러 조사도 해보며 자료를 모으고 있어요. 자료가 쌓여서 책도 만들고. 작업이 서로 연동되면서 나아가고 있어요.


작품과 내가 관계를 맺는 과정이 여러 형태의 시리즈로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서로 연동되면서 발전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여요. 테이블 세팅 작업 같은 경우엔 수레를 만드실 때부터 봐왔던 것이라 마무리되는 과정도 꼭 보고 싶습니다.



Very Proper Table Setting - traveling pop-up art experiments, Summer 2022 Ⓒstudiosmlk



이번에 한국에서 작업하신 내용 중 상차림 작업과 연결되어 있었을까요?


사실 미국에서 해오던 상차림 작업을 더 고민하기 위해서 풀브라이트에 프러포즈를 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문라이트 인 콜로라도 Moonlight in Colorado’ 전시는 사실상차림 작업에서 이탈한 전시예요. 이번엔 ‘문라이트 인 콜로라도'를 진행하고 상차림은 미국에 돌아가서 해도 되겠다는 결론에 닿았어요. 감사히도 풀브라이트는 프로포절 수정에 문제가 되진 않았고요.


이번 전시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되게 담겨 있어요. 제가 콜로라도로 이주 고민을 한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을 때 “그곳 너무~ 아름다운 곳이잖아.”라고 말씀하셨었어요. 어머니께서는 콜로라도를 방문하신 적은 없었지만, 가수 은희씨의 '콜로라도의 달밤' (1971년, 유니버설 레코드)을 기억하셨고,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 하셨던 것 같아요.  유튜브에 찾아보니, 어머니처럼 한국에 계신 많은 팬분들 또한 자신들 의 아름다웠던 순간, 추억들을 콜로라도에 대입하여 그리워하고 계셨던 게 저한테는 너무 흥미로웠어요.  콜로라도를 한 번도 안 가보셨더래도 말이죠.  저는 지난 16년간 제 고향인 서울을 그리며 살았던 것 같은데, 많은 분들이 제가 거주하는 콜로라도를 그리고 계신 것이요. 이런 장소성에 대한 독특한 감정들과 사회 문화적 연결 고리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영어로 이름을 만들고 정할 때 ‘승민'이라는 이름이 발음상 어려워 ‘Sammy’라는 영어 이름을 짓게 되었어요. 한국에 다시 돌아와 보니 특히 관공서에서 저를 부를 때 ‘Sammy Lee’라는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 게 좋을지 어려워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이삼미’님이라고 많이 불러주시더군요!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어려워하는 상황이 이곳에서도 생겼구나 실감하게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사이의 공간에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어떨 때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나 이민자 미국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글을 보면 내 글을 읽는 게 아닌지 착각할 때가 있었어요. 그만큼 소수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비슷해요. 때론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해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백인들이 계속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 왔기 때문에 소수자임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없는 곳이에요. 그 상황을 보지 않고 자기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돌파하고 싶고, 자유를 지향하고 싶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한풀이 타령이 계속 나오게 되죠. 약간은 처량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것이 영감이 되어 작업을 하게 되기도 해요.


소수자로서 불리한 공간에 들어가면 나의 부족함을 직면하게 되어요. 그곳에서 오히려 그럼에도 나눌 수 있는 것과 그것을 채워나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사실은 영감을 받아서 작업할 수 있으니 한편으로는 즐거운 거예요. 그래서 약간은 재밌어하면서 상황들이 너무 짜증 나기도 하고, 이것을 풀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지점들이 겹쳐 있게 되어요.


한 개인의 서사로 만들어진 작품이 우리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에 개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것 같아요.

 


문라이트 인 콜로라도 Moonlight in Colorado 전시 전경, AI가 만든 이상적인 콜로라도의 모습, 2024



전시가 열린 ‘더스토어 남산'과는 어떻게 연이 닿으시게 된 것일까요?


전시공간과 인연이 닿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었어요. 우연의 연속이었어요. 그 공간은  박경근 작가가 강현선 작가와 함께 운영하는 공간을 제게 내어주셔서 감사히 받게 되었어요. 


다른 작가님 전시장에 갔다가 박경근 작가를 만났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랑 같이 풀브라이트로 서울에 머물던 교수의 오랜 지인이고, 또 알고 보니 그 교수분, 박경근작가, 제가 같은 동문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분이 운영하는 전시 공간이 있다고 해서 들려 봤는데 공간이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참 이곳 좋다고 생각하던 중에 전시 초대를 제안해 주셨어요. 그래서 덥석 하겠다고 했죠.


예전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즐겼어요. 지금은 계획은 세워도 얼마나 계획대로 안되는가가 더 궁금하고 즐거운 것 같아요. 내가 하려는 데로 된 적이 없어요. 겉보기에 나쁜 쪽과 좋은 쪽 어느 방향으로 가도 상관이 많이 없어졌어요. 







기획 이야기



작가님께서는 개인 작업 외에도 덴버에 있는 박물관과도 관계를 맺으시고, 레지던시 공간도 운영하시고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시는데 그 동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좋은 환경에 있는 건 아니거든요. 덴버, 콜로라도라는 곳이 뉴욕처럼, 혹은 스타일은 다르지만 산타페, 뉴멕시코 같이 아트타운이라 불리는 곳은 아니에요. 제가 보스턴이나 LA 같은 큰 도시에 살았을 때 자연스러웠던 문화적 다양함 등등의 것들이 이곳에선 부족했어요. 그래서 더더욱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걸 느꼈고 일을 더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큰 도시엔 인재도 많고 나 말고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덴버에선 나라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더 용기도 내서 해온 것 같아요.

아시아 인종이 5%밖에 안되고, 그중에서 인도,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 이렇게 나누다 보면 한국인이 매우 적어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미술관에서 아시아 아트 이사회에도 몸을 담게 되었어요. 미국에서는 에이전시(주체적 행위)의 중요성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 안에 자리를 함께함으로써 사람들과 의논하고, 결과가 현장에 반영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어요. 존중받으며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위치를 만들게 된 것이죠.


레지던시는 작은 공간이지만, 작가들이 덴버로 왔을 때 발판이 되고 제가 아는 네트워크에 연결시켜서 현지 작가나 아트 씬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이 공간을 발판으로 외국에서 오시는 작가분들이 미국에 조금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고자 했어요.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고 싶어요.’라는  어떤 작가분들의 구체적인 목표와는 거리가 있겠지만 미국의 현대미술, 이곳의 예술가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가는데 한걸음 내딛는 정도는 해드릴 수 있으니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CAARP residency Ⓒcollectivesmlk



작가님께서 미국, 덴버에서 건강하게 관계 맺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쓰신 마음 때문에 한국, 을지로에서 누군가는 또 작가님을 환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에 ‘요호서울’에서 작업을 하셨잖아요. 공간 운영자인 여인혁 작가가 다른 작가의 작업 공간으로 내어진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마 작가님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1호 작가라고 해서 영광이고, 여인혁 작가님도 공간을 다양하게 써보신 것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여작가님과 저 둘 다 중간에서 역할을 해보았고,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할지, 조절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서로 즐겁게 일했던 것  같아요. 그 역할의 노하우들이 좀 확산되면 서로 더 이해하며  협업할 수 있어 좋을 것 같아요.


분명 작가들은 많지만,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파이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 생각돼요. 문고리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서만 해야 되는 구조를 만드는데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 봐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또 대안을 잘 만들어놓으면 기득권의 시선도 돌아오고 전체적인 다양성이 만들어질 기회도 생기고. 너무 기존에 만들어진 틀에 내 작업을 맞추고, 경쟁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하면 되는데 아닌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갈아서 그 상황에 맞추려고 하면 더 힘들죠. 작업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즐거운 방법으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 가면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잖아요.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성을 가지고 서로 모여있음을 보여줘야 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파이에 집중해서 그게 나의 전부가 되면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때도 비굴해지고, 각자의 정체성으로 만들어지는 다양성을 못 만들어내는 문제들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고 공감하고 연대하고 서로 지지하고 도와주고 응원하고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는 관계 형성과 분위기 형성을 하는 것이 서로 건강해지는 방법이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께서는 중간자로 연결하고 도와주는 일의 가치를 높게 보시는 것 같아요. 혹 최근에 있었던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제가 이번에 풀브라이트를 통해서 한국에 와서 한 것 중 하나가 교류전이었어요. 중앙대학교에 대학원생과 제가 강의하던 덴버의 Metro State University의 학생들과 교류전을 해서 전시가 있거든요. 교류전이라는 형태가 뭘 할지는 정확히 예상해서 준비할 수는 없지만, 테마 하나 잡아서 그동안 해놓은 작품 중 몇 점을 뽑아서 작품만 주고받아 전시 한 번씩 하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제가 두 문화 사이에 낀 삶을 살다 보니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힘든 관계에서도 공감해 주는 친구 한 명으로 인해 오해를 넘어 어려운 관계가 하나씩 풀어나는 경험을 해봤어요.


각자가 한쪽 그룹에만 있으면 다른 그룹에 속해 있는 이를 오해하고, 불신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인 것 같아요. 큰 세상의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 보이고요. 그 안에서 저는 박쥐가 되어버려요. 여기와 저기를 왔다 갔다 해요. 물론 양쪽에서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친구를 사귀고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Zoom으로 참여자들이 서로 작업에 대해 발표하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만들었어요. 서로 글도 나눴고요. 저는 큰 틀만 설계하고 세세한 방향은 큐레이터로 선발된 학생들이 주도해 나가도록 했어요. 주제를 비롯해 전시에 대한 내용을 학생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만들었어요. 저는 이렇게 미국과 한국의 친구들이 동료가 되는 관계를 만들고 중간에 있는 사람으로서 도움을 주는 역할이 재밌어요.


덴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계속해온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결핍한 점들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고,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방법을 찾고 고민할 수 있었어요. 제가 LA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면 문화적인 부족함이 적었을 것 같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을 할 이유가 없었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덴버에 간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기획을 하시고, 작업을 하시고, 육아도 하시고 많은 것들을 챙겨나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관계 맺음 외에도 기획을 놓지 않고 계속해나가실 수 있는 원동력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counterART 카운터 아트'라는 기획이 있었어요. 제가 한국에 없었던 부재의 기간 중 한국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 시간들을 관통하는 기획이었어요. 2016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 후, 한국의 촛불집회를 보면서 미국에서 혼자 뜨거웠었던 거예요. 작가로서 누구나 하는 고민이겠지만 죽음이란 시간이 오면 ‘나는 쓰레기더미를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떠나지 않는가.’라는 고민을 할 수도 있겠다,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당시는 여러 예술 중에 ‘저항'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을 모았어요. 대중이 운집하는 현장에서 직접 자신의 예술로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현장상황을 보고 오랜 고민, 갈등 후 정리된 생각들을  작품으로 옮겨낸 작가들 또한 모았어요. 정말이지 지렁이가 꿈틀거리든, 짱돌을 집어던지든 다양한 예술로써의 저항하는 여러 입장과 태도를 다 모아보고 싶었어요.


전시가 열렸던 ‘RedLine Contemporary Art Center’에 배달을 해주시는 택배 아저씨가 계셨어요. 구체적으로 어디서 오셨는지, 모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아시아계라는 것은 알 수 있었어요. 그분이 항상 배달만 하고 돌아가시는데 처음으로 '카운터 아트'전시를 돌아보시고는 프런트 데스크에 오셔서 “고맙다. 내가 내 자신을 보고 간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사는 정치적, 경제적 난민도 많아요. 비극적인 이유로 이곳에 오신 분들도 많아요. 그 택배 기사님이 어떤 연유로 지금 이곳에 와계신지는 알 수 없으나 뭔가 공감되는 지점이 열렸던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피드백으로 들을 때 힘을 내게 만들어요. 사실 기획이라는 일이 힘을 쭉 빠지게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잡아나가려고 애쓰게 되어요.



counterART 전시전경, 2019 Ⓒcollectivesmlk







공간 이야기



한국에 오셔서 1년 동안 계시면서 추억이 남아있는 동네에 계셨고, 애정하는 을지로에서 작업도 하셨잖아요. 그 과정이 작가님께 여러 의미가 있을것 같아요. 생활하시면서 기억에 남으시는 장면들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어요.


일단 미국의 일상을 떠날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일상을 떠나는게 정말 중요한 과정 같아요. 그래서 여행을 가는 거겠죠? 그런데 한국에서의 1년 동안 마트가고,  공과금 내고, 병원에 가고, 아이 학교에서 픽업하고, 작업하는 같은 일상이 되다 보니 그냥 삷이 같은가 싶은거에요. 이전 한국에 다녀가던 경험과는 다른, 미국에서 오래동안 꿈꿔온 환상과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지만 한국에서 사계절을 겪고 지내며 일상을 만들어 볼수 있어서좋았어요. 이런 경험을 해놓고 좋은 작업을 못하면 아쉬웠을 거에요. 


공장에서 작업실로 작품을 옮기는 Sammy Seung-min Lee의 모습, YOHO SEOUL, 2024 Ⓒstudio visit 정채령



을지로가 그렇잖아요. 그림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장소는 예술가들에게 꿈같은 곳이죠. 꿈 안에 들어가서 이런거 저런거 다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제게 너무 운 좋았던 시간이었어요. 이곳에는 을지로 4가역 5분걸음 반경내에만하더라도  작업실 외에도, 여인숙도 있고, 목욕탕도 있고, 커피가계, 밥집도 있고. 이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수 있어요. 제가 혼자 왔더라면요, 길도 안건너고 며칠을 지내려면 가능하지요. 24시간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전에 잠깐씩 와서 작업을 만들어간 관계와는 다른 경험이었어요. 을지로가 변하는 모습이 그래서 더 안타깝고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애닳기도 해서 한없이 즐거울수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어디 가서 “을지로에서 작업해봤어? 난 거기서 작업해봤어.”라면서 이야기하고 뻐길 수 있게 되었어요. ㅎㅎ무려 탱크도 만들 수 있는 동네에서 레지던시를 하고, 그곳의 커뮤니티 안으로 쏙 들어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도 사귀고 동료도 생기고 밥도 먹고 다니고 확실히 깊이있는 경험을 했어요. 팬으로 멀리서 구경하고 있다가 그 스타랑 연애를 해본 느낌 같아요. ㅋㅋ, 저 을지로 정말 좋아해요.



작업 중인 Sammy Seung-min Lee의 모습, YOHO SEOUL, 2024 Ⓒstudio visit 정채령



이렇게 을지로의 작가들과 이제는 저도 덴버에 가봐야 겠어요.


언제든지요! 환영입니다. 덴버에서 전시를 기획한다거나 프로젝트 지원금 안건으로  외부 관련자분들과 인터뷰를를 하면 항상 묻는게 있어요. “왜 덴버에요?” 그만큼 주류의 기대밖의 장소성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묻고 고민해봐야할 대목 같아요. 그런 곳에서 같이 도전해보면 좋을것 같아요. 재밌을것 같아요. 







내일 이야기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앞으로의 일정이 궁금합니다.


이제 곧 덴버로 돌아가요. 그곳에 돌아가면 한국에서 잔뜩 쌓아온 봇따리를 하나씩 펼쳐 봐야 겠어요. 지난 1년의 시간 동안 제가 만나고 경험한 것들이 어떤 형태로든 녹아 든 작업을 하게 될거에요. 그렇게 다시 돌아가서도 중간자로서 서로를 연결하고 연대하고 함께 성장하는 장을 계속 만들어 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꼭 덴버에서 함께 뵈어요.



작업실의 작품, YOHO SEOUL, 2024 Ⓒstudio visit 정채령







두 세계를 연결하는 공조자


Sammy Seung-min Lee 작가님께서는 어느 한쪽으로 온전히 무게를 옮겨가지 않고 두 세계에 사이에 모두 존재하시는것 같습니다. 그 세계가 문화 일수도 있고, 사회의 어떤 영역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고, 혹은 나의 일부들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작가님께서는 중간에 스스로의 좌표를 위치시킴에도 수동적인 방조자를 거부하시고 능동적인 공조자가 되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대하듯 치우치거나 배척하려 하지 않고 양쪽 세상을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보고 서로가 통해 이해하고 연대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열어주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작가님께서 열어주신 통로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압력을 견뎌주시고 그 위치에서 마음쓰며 공조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예술가로서 개인의 작업을 대하는 시선, 기획자로서 사람들을 엮어 연결해나가는 과정,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현실에 직접적인 선한 영향을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이 각각의 위치에서 점점 퍼져나가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노력 위에 올것들이 기대됩니다. 긴 시간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업 중인 Sammy Seung-min Lee의 모습, YOHO SEOUL, 2024 Ⓒstudio visit 정채령





Sammy Seung-min Lee의 작업실, YOHO SEOUL


Sammy Seung-min Lee의 작업 공간, 2017 - 2019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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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my Seung-min Lee의 손, 2024 Ⓒ작은도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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