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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Sep 26. 2024

유형주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는 화가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작가 계정을 본 적 있습니다. 피드를 채운 그의 그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이 있었던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했습니다. 거대한 키, 타이트한 앞치마를 멘 한 남자가 섬세하게 카레를 끓이고 있었습니다. 공연을 마친 밴드의 키보드를 연주자는 그가 만든 카레가 너무 맛있다며 다섯 그릇을 먹었습니다. 그때 카레를 끓여주었던 큰 남자는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줬던 작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업실이자 거처였던 게스트 하우스는 일대의 예술가, 기획자들이 모이는 거점이 되었고 전시와 프로젝트를 통해 그를 계속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립대에서 공공디자인 석사과정에 있는 그는 계속해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마치 캔버스라는 거대한 거울을 마주하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꺼내놓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때론 그 과정을 괴로워하며 회피하고 싶어 하기도 했고, 때론 쏟아내듯 거침없이 붓을 놀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첫 개인전(2016)에선 무기력한 나의 모습이, 두 번째 개인전(2022)에서는 그림자를 넘어선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개인전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던 차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파블로(유형주)가 크게 다쳤다는데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그렇게 병원을 찾았습니다. 전시에 전념하기 위해 새로운 작업실을 정비하던 작가는 낙상사고를 당해 두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큰 사고를 입은 작가를 앞에 두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사고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기력, 우울, 자책이 주된 작업의 요소였던 그의 입에선 "누구나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지난 그의 개인전에서 작품 앞에서 울음을 쏟아내며 위로받았다며 작가에게 감사함을 표한 관객이 있었습니다. 아마 작가가 지나온 길이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위로라는 힘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는 다음 장을 열어 갑니다. 나의 무기력함에서 시작했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로 전환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 시점에 서있는 작가 '유형주'를 소개합니다.




목차

유형주 이야기

작업 이야기

공간 이야기

내일 이야기




유형주 ⓒstudio visit 정채령





유형주 이야기


안녕하세요 작가님. 작가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이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호칭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형주’와 ‘파블로’ 두 이름으로 활동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불리시는 게 좋으신지, 이름을 두 가지 가지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두 이름 모두 본명이지만, 파블로는 친한 사람들이 불러주는 애칭으로 유형주는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좋아서 대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형통할 형 亨’의 ‘두루 주 周’로 두루두루 형통하라고 친할아버지께서 작명소 가서 지어오셨어요. 돌림자가 ‘현’이었지만.


저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어요. 그때 ‘Juan Pablo(후안 파블로)’라는 이름이 지어졌어요.  스페인어로 ‘요한 바오로(Juan Paulus)’ 예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유형주’가 일상적인 이름이 되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라피티에서 이야기하는 태깅을 하면서 ‘Pablo(파블로)’라는 이름을 닉네임처럼 사용하게 되었어요.


태어나서 타국에서 지어졌던 이름이 예술가로 성장하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 중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이었네요.


청두. 혹시 넷플렉스에서 ‘카니예 웨스트 Kanye West’ 다큐멘터리(지-니어스: 카니예 3부작) 본 적 있으세요? 카니예가 엄마랑 돈독한 사이예요. 제가 카니예 같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 엄마가 “네가 가진 달란트가 있어. 너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 그 달란트를 쓸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었어요. 카니예 다큐에서도 그와 비슷한 말이 있었어요. 카니예의 어머니가 그에게 '거인이 거울 앞에 서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법이다'라는 말을 했어요. 스타로 태어난 사람은 스타로 살아가는 운명이라는 말이 어릴 적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어요.


엄마가 봤을 때 애가 특이하다. 혹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유년기에 동네 미술학원에 처음 갔을 때 학원 원장님이 “형주는 이 나이대와 다르게 다양한 색을 쓴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다고 해요. 집에서 벽에다 낙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려도 한 번도 혼난 적이 없었어요. 냉장고에도 판박이를 덕지덕지 했었어요.


엄마는 제가 유치원 때 그린 그림을 액자로 만들어서 아직도 보관하고 계셔요. 그게 엄마의 아카이빙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기억이 나는 장면이 있어요. 어느 날 저는 제가 그린 그림을 큰아빠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어요. “되게 멋지죠?”라고 여쭤봤는데 큰 아빠께서는 “젓가락 인간이냐?”며 핀잔을 주신적이 있었어요.



유년 시절 유형주 작가가 만든 접시 ⓒ유형주




어머니께서는 작가님이 당장에 잘하고 못하고 보다 잠재성을 찾아주고자 하셨던 것 같네요.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 어머니께서 작가님을 대해주신 마음과 태도, 자유롭게 했던 행위들이 모두 지금 작가님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것들이 움직임의 시작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싸이월드 시절에는 사진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아마 부모님께서 제가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저를 찍고 인화된 사진을 보여주셨던 것에서 자연스러운 결과였던 것 같아요. 제 사진이 몇 박스나 될 정도로 가지고 계셨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진이라는 매체가 익숙해졌어요. 운 좋게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진이 반반 공존했던 시절을 경험할 수 있었죠.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처럼 디지털, 세속적인 것을 떠나 자신만의 아날로그 세상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떠올라요. 아날로그를 한편으로 경험해 봤기 때문에 삶의 과정을 아카이빙 하는 것에 조금 더 매달릴 욕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 편지를 썼어요. 그림을 배우고 싶고, 그림으로 직업을 택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후 아버지께서 수소문해서 미술 학원을 찾아주셨어요. 국, 영, 수 학원만 다니다 미술을 학원을 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엔 학교에 미술부가 있어 그곳에 들어갔고요.


전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뭐, 공부를 열심히 안 했어요. 그림 그리는 것만 좋아했어요. 당시 아이리버가 나올 때였어요. ‘이노베이션 innovation’이라는 말이 사회 전반에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하던 시점이었어요.  아이리버 디자이너가 썼던 책도 읽었어요. 그렇게 산업디자인과에 지웠했었어요. 하지만 떨어졌어요. 그렇게 ‘인테리어디자인과’로 대학 진학을 하게 되었어요.


대학을 ‘인테리어디자인과’로 입학한 후 군대를 갔어요. 당시 인테리어를 전공한 친구에게 어떤 것을 하는지 물었어요. 캐드(CAD)를 보여주는데 저랑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어요. 부모님께서 인테리어 잡지를 1년 구독해 주셨었는데 소재에 대한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면서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생각을 했었어요. 다행히 1학년때 공예, 인테리어, 회화를 모두 해볼 수 있었고 2학년이 되면 전공을 정할 수 있었어요. 두루 경험해 보고 결국 회화과로 전과를 하게 되었어요.


당시 사진을 같이 찍었던 형이 노량진 창조의 아침 강사였었어요. 학교를 다니다 자퇴를 하고 다시 입시를 해서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어요. 그 형은 회화를 기반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어요. 형이 회화를 기반으로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 말이 기억에 남으면서 회화를 하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 굳어졌어요. 제대 이후 복학하면서 지도 교수님께 회화과로 전과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아주 쿨하게 보내줬어요.


솔직히. 저는 그림을 못 그렸어요.







작업 이야기



작가님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앞서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하셨어요. 매우 좋아했지만. ‘못 그린다’는 어떤 뜻일까요?


말 그대로 ‘못 그린다’ 예요. 입시 미술을 했지만 묘사력, 표현력이 부족했어요. 회화과로 진학한 친구들은 정물 소묘 등을 하면서 기술적으로 숙련되는데 저는 소묘라고 해봐야 아그리파 석고 소묘를 한 정도였어요. 그마저도 B+을 받았던 것이 최고 성적이었어요. 당시 다녔던 학원이 만화 학원을 같이 하고 있던 곳이어서 잉크로 펜선을 그리는 것 정도 배웠었어요. 그때 같이 학원을 다니는 또래들을 보면 잘 그리는 사람들이었어요. 표현도 잘하고 멋지고. 하지만 저는 잘 못했었죠.


전과를 해서 회화과를 다니면서 현대미술에서 해온 여러 시도들을 배우게 되었어요. 설치도 해보고, 영상과 사진도 배웠어요. 그러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제목을 짓는 것에 재미가 들렸어요. 예를 들어 찢어진 슬리퍼를 신은 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아픔’과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었어요. 글을 거침없이  썼어요. 예를 들어 (테이블에 놓은 과자와 커피를 보며) ‘빈츠, 오레오 그리고 이디야 커피. 그것은 나에게 무엇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빗물 속에서 그것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라는 식으로 하염없는 글쓰기를 했어요. 퍼지는 선들이나 패턴들로 드로잉을 하기도 했고요. 군대에서도 신문을 보고 드로잉을 하기도 하고 어떤 감정을 계속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잘 알지 못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언어의 형태로 계속 정리해보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싶어요.


당시로 돌아간다면 제가 공부를 더 했어야 됐다는 생각도 해요. 되게 무지해요. 무지하니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없잖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복학하고 나서 장영진 작가가 교수님으로 계셨어요. 비비탄으로 작업을 하시는 분이었어요. 어느 날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형주 그림은 잘 그리는 그림은 아니야. 못 그려. 못 그리는 축에 속해. 그런데 잘 그리려고 하는 애들은 못 그리려고 하고, 못 그리는 애들은 잘 그리려고 하잖아. 근데 그 중간을 유지하는 게 힘들어.”라는 말을 던져주신 적이 있어요. 그렇게 주변에서 해주셨던 말들이 계속 기억에 남고 정확히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초상화가 주를 이뤄 보여요. 표현의 방식에 차이가 있겠지만 그림에서 작가님의 얼굴이 보여요. 사실주의 그림은 아니지만, 계속 자화상을 그리게 된 서사가 궁금해요.


‘나는 그림을 어떤 식으로 그려야 될까.’ ‘무엇을 그려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졸업전시 할 때 많이 했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때가 시작이 아닐까 싶어요. 나를 또 알게 되었거든요. 예전에 그림을 두 개씩 그렸어요. 그림을 그려서 그 물감이 마르기 전에 똑같이 그린 캔버스에 같은 위치에 물감을 붙이는 작업을 했었거든요.



5.18/6.10-Mass Violence 1, 5.18/6.10-Mass Violence 2 oil on canvas, 162.2x130.3cm, 2012 ⓒ유형주



제가 어릴 적 당했던 폭력이 주된 주제였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제가 좀 뚱뚱하니깐 애들이 놀렸어요. 부모님은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해주곤 하셨어요. 당시엔 많이 맞는 쪽이었어요. 가해자들을 죽이고 싶은 생각도 들었었어요. 


중학교 사회 시간에 한스 피터의 비디오를 보게 되었어요. 당시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죠. 이라크 전쟁, 419 혁명, 6월 항쟁,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제가 어릴 적 겪었던 폭력과 사건이 연결되었어요. 무기력한 어떤 존재였던 저와 거대한 폭력에 희생된 시민들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무력한 존재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니 아무도 안 건드리더라고요. 몸이 커졌어요. 친구들과 싸울 일이 없다 보니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느냐를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었죠. 그러다 미술부를 찾아가게 되기도 했고요.


어느 날 술자리에 간 적이 있어요. 작가들과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한예종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어요. 계속 저에게 “왜 이런 주제를 다루는지.”, “이것을 다루면 무엇이 좋은지.”,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며 집요하게 계속 물어보았어요.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질문을 받았던 것이 처음이었어요.


어느 날 교수님께서 “너 민중미술 할 거야?”라고 물으신 적이 있었어요. 민주화의 역사 동안 열사가 되신 분들이 제가 과거 상처받았던 저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를 표현하고자 그림을 그렸던 것인데 사람들의 질문은 ‘유형주’와 무관하게 시대나 국가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관점이었어요. 제가 민중미술가가 될 수 있죠. 민중미술사를 돌아보니 이미 해오신 것들의 맥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같았고, 민중미술을 위한 유형주는 저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3.20/5.01-Mass Violence_oil on canvas_100x80.3cm_2012 ⓒ유형주


5.22/8.6-Mass Violence_oil on canvas_100x80.3cm_2012 ⓒ유형주



졸업전시를 준비할 때가 되었어요. ‘그냥 생각 없이 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앞서 말씀드렸던 회화를 기반으로 사진을 하겠다고 했던 형이 “교수님 말 듣지 마. 왜 들어? 네 작업이잖아. 학교 숙제 하듯이 그림 그릴 거야?”라는 얘길 해줬어요.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인물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을 돌아가서 보면 그냥 그리게 된 거였어요. 색을 선택하는 것도, 그냥 좋을 것 같다 싶은 기준으로 선택을 했어요.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림을 그리는 순서나 이유 등을 내려놓고 ‘하고 싶은 대로’로 교체하였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얼굴과 몸을 그리게 되었어요.


한 인물을 그린적이 있어요. 미국 국기가 그려진 옷을 입은 인물이 달리는 이미지였어요. 전 같았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행한 폭력, 전쟁등을 서사적으로 그렸겠지만 그때부터 하나의 기호에 비유적으로 담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한 인물을 안에 감정과 비유를 넣기 시작했어요.


서사가 인물 주변에 펼쳐져 있다가 인물의 안으로 들어가고, 이제는 언어로 다 서술하는데 제한이 있는 이야기들을 전하는 그림으로 변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Money, Power, sex, 2012 ⓒ유형주




작가님께서 캔버스 안과 밖을 오가면서 작업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같은 형식의 그림이지만 그림이 그려지는 때와 장소, 그림이 보여지는 때와 장소가 달라짐을 확인합니다. 캔버스 안과 밖을 오가시는 이유와 해오신 서사가 궁금해요.


그래피티가 자기만의 캐릭터가 강한 영역이다 보니 서브 캐릭터를 가지고 변화를 시켰어요. 글씨도 넣어 작업을 하다 보니 오히려 해온 여러 과정들 때문인지 더 빠져서 하게 되었어요. 낙서도 하고, 태깅도 재개발 지역에 들어가서 했어요. 흔적을 남기고 다녔죠.


그래피티를 작업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을지로에서 있었던 셔터아트 때문이었어요. 태깅이나 낙서가 아닌 처음으로 작업을 한 것이 그때였어요. 게다가 합법적인 그래피티였죠. 100호 이상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데 거대한 셔터 앞에 서니 긴장되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이게 되네.’ 싶었어요. 되게 빨리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하나, 둘 작업했던 것이 오히려 시그니처가 되었어요. 사람들이 ‘이 그림을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는 말이 나오고 을지로에 찾아온 작가들이 인스트 스토리로 저를 태그 해서 올려주기도 해요.


을지로 골목에 있는 셔터가 작가님을 상징하는 작업으로 그곳에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의 작품을 문화 향유 계층이 찾아오는 지역 길거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오프라인 인스타 피드처럼 다수에게 확산시키게 된 성취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일대 재개발이 시작되면 서터를 챙겨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서울 중구 산림동 46 셔터에 그려진 초상화, 2018 ⓒ유형주



그림을 그려온 작가님의 서사도 들어보고, 캔버스를 넘어 확장되는 작업의 형태에 대해서도 들어 봤어요. 그렇다면 지난 시간 그려 왔던 것들 중 작가님을 대표하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대표작은 첫 개인전 때 전시했던 작품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들어가 있어요.

학교 다닐 때 제가 다루고자 했던 폭력에 대한 주제들과 사회에서 경험한 물리적이지는 않지만 사람 간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2016년 박근혜 정부 말에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세월호 이후로도 비롯한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았어요. 그 사회적인 상황에서 개인전을 하게 되었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 많이 담긴 그림이었어요.


뉴스를 보고 무기력함을 느꼈어요. 그 마음은 ‘뭐라도 하고 싶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다.’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때 겪은 스트레스라는 형태의 감정을 인물 안에 담았어요. 양주(작가님의 본가)에서 붓으로 스케치만 슥슥 그린 캔버스를 작업실로 가져와서 그렸어요. 당시는 직장에 다닐 때라 퇴근하고, 주말에 맨날 집에서 캔버스를 마주하고 그렸어요.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그림에 담았어요.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대학교 재학 시절엔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 했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 같고요. 바나나를 생각하면서 소주병을 가지고 바나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작품을 보는 사람과 계속해서 얘기를 하지만 제가 항상 작품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리고 그린이의 입장이 정답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고요. 그림을 다 그리고 제목을 붙인 이후로는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이전 작업들과의 맥락에서 보면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 주던 그림에서 개인의 초상을 통해 사회를 보고 느낀 언어로 설명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전환되어 형식을 갖춘 지점에 있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작업이 되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도 내가 가진 감정의 실마리를 제목이라는 형식으로 작품과 함께 남겨놓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작업이 변해오는 과정에서 작가님 스스로도 내 안에 다 알 수 없는 것들을 포용할 여유를 만들어오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x80.3cm, 2016 ⓒ유형주




이후엔 작업에 어떤 변화들이 있을까요? 그림을 그리시면서도 도시열섬에서 실사 등신대를 만들어서 작가님 자체가 작업이 되거나,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조각 작품을 만들거나,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영상 감독으로서도 역할을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다른 매체로의 확장의 길이 계속 열려 있는 것 같은데 이후 작업이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궁금해요.


작업이 확대되어 간다면 조각 작업과 영상 쪽으로 확장할 것 같아요. 우선 영상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면 아직 작업으로서 해온 것은 없고, 외주의 형식으로 아카이빙 영상을 많이 작업해 왔어요. 그 과정에서 제 시선이 닿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느껴요. 제가 본 시각, 영상의 편집 언어들이요. 이후에 이런 방식을 더 발전시켜 작업으로 확대해나가게 될 것 같아요. 아직 구체적으로 만들고 싶은 작업의 주제는 없지만 페이크 다큐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 같아요.



도시 열섬 유형주 작가 작품 일원, 2022 ⓒR3028



영상작업이 지금 하시는 초상화와 연결되는 지점은 어떤 부분일까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얼굴에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서술하지 않고 색 등 여러 요소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작업해나가고 있어요. 인물을 하나씩 그려나가다가 군중을 담거나 군집을 담는 과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것은 조금 더 진행을 하면서 잡아가게 될 것 같아요.



핫 가이 글루맨 썸네일 ⓒ유형주



다음으로 조각은 어떤 게 발전하게 될까요? 전시에서도 보여주신 적이 있으니 영상 보다 더 명확하게 생각하시는 상이 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 회화 작업과 지난 조각 작업을 보면 아트토이도 연상이 많이 되더라고요.


조각은 두 번째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었어요. 아트토이는 관심이 많아 가는 영역이에요. 마이클 라우(Michael Lau)의 그림체와 그의 아트토이를 좋아해요. 내가 그리는 얼굴을 가진 캐릭터 전신으로 만들고 나아가서는 공기 조형물과 같은 재료를 통해 확장되길 바라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 현실적으로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어요. 제가 하고 싶다고 그냥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해요. 그에 따른 예산도 필요하고요.



병실에서 그린 아트토이 스캐치, 2024 ⓒ유형주



매체가 달라지면서 다다를 수 있는 표현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번에 준비하시는 세 번째 개인전은 말씀하신 영역까지 닿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목과 그림으로만 말해줬던 어떤 현상과 상황의 세계관이 물리적인 공간으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큰 귀를 가지고, 큰 눈을 가진 저의 캐릭터가 폭력적인 사건을 통해 무너질 수 있지만, 누구나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방금 말씀하신 내용을 통해 보면, 작가님도 작가님의 작품도 이전과 다른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학동 작업실 일원, 2023 ⓒstudio visit 정채령








공간 이야기



황학동에 작업실을 가지고 계시다 최근 장충동으로 옮겨오게 되셨잖아요. 양주에 본가가 있지만 도심에 계속 작업실을 유지하고 있고 그 시간이 짧지 않았어요. 계속 도심에서 작업을 하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양주에서도 작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서울에서 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있잖아요. 전시 인프라도 그렇고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람들과의 협업도 그렇고. 얼마 전 작업실 이사와 집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서 지인과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만약 집이 부득이하게 양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작업은 서울에서 계속하게 될 것 같아요. 1인 가구니까 대출을 받아서라도 직장을 다녀서라도 작업을 서울에서 해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만약, 양주에 작업실이 지어진다면 그때는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만 부지런해지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죠.



유형주 작가의 황학동 작업실, 2023 ⓒstudio visit 정채령



서울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였어요?


직장을 구해도 서울이 좋으니 졸업 이후 취업을 준비할 때부터였어요. 동생이 자취를 할 때 그 집에 같이 살면서 시작되었어요. 고시원이었어요. 이후 황학동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을 도우며 그곳에서 지냈어요. 아마 내년 이후엔 LH, SH 등에서 나오는 정책들을 이용해야 하려 해요.


서울에 있으면서 작가님께 가깝게 지내며 영향을 주고받은 분들이 계실까요?


기획자이면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승혁 대표님이나 천근성 작가님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분들이 추구하는 어떤 장점들을 보게 된 거죠.


최근에 천근성 작가님 작업 과정을 근접해서 보고 촬영하고 있어요. 그분이 생각하는 예술, 돈, 명예를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는다고 해야 할까요. 어떤 측면에서 보면 미술계에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서로 물고 뜯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작품 가격이 얼마라더라, 프리즈에 나왔다더라, 학교는 어디더라 등으로 계속 급을 나눠요. 저도 그런 것들과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하지만 이승혁 대표님과 천근성 작가님 같은 분들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도 단단하게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고 이타적인 태도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계세요. 그런 형들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사람들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 162.2x130.3cm , marker pen on canvas, 2010







내일 이야기



앞으로 해나갈 계획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전시를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사고가 났고 예정된 일정에 불가피한 변화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논문도 쓰고 할 계획이었지만, 이렇게 사고가 나고 보니 지금은 생각나는 것은 전시뿐이에요. ‘전시를 해야겠다. 전시를 잘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COSO에서 있을 세 번째 개인전이 10월에서 내년 2월로 미뤄지게 되었어요. 그 준비를 잘해보려 해요.


그 외 일정들은 예정대로 진행이 될 것 같아요. 천근성 작가님의 ‘우린, 지금 요술이 필요해’ 영상 작업 진행 중이에요. 9월 22일 광주에서 열리는 프린지페스티벌에 참여해요. 저는 못 내려가게 되어서 천근성 작가님이 제 등신대와 함께 광주에 가시기로 하셨어요.


마지막으로 문래동에서 ‘아트 트럭’ 사업에 당선되었어요. 트럭에 작품 실어서 보여주는 프로젝트인데 그것도 올해 말에 진행하게 될 것 같아요.


전시 때까지 잘 회복하시고, 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진 새로운 작업들은 내년 2월에 같이 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5년 후의 작가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박서보 작가님이 ‘지치지 않는 수행자’라고 하셨는데. 전 ‘가끔 지치는 수행자’가 될 것 같아요. 대 작가가 되어 있겠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는 화가



그간 작가님의 개인전은 불규칙하게 기획되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는 기약 없는 시간 동안 계속 캔버스에 초상화를 그리셨습니다. 답습 같다는 인상이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작가님과 앞으로 열어나갈 시간과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시간이 좁은 보폭으로 꾸준히 걸어온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체 같아 보이지만 스스로는 그 안에서 무거운 걸음을 내딛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시간을 보내며 사회가 함께 견디는 무게를 경험하며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겪은 알 수 없는 감정과 어떤 형태로 변하고 있을지 다 감각하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을 계속 들여다봐오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니고서야 그 과정은 매우 지진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백이 속에서 그 시간을 계속 붙잡고 놓지 않았던 작가님의 애씀이 있어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을 주었던 것이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걷기 어려워진 작가님의 모습과 "대시 일어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님의 말이 겹쳐집니다. 이후 벌어질 일들은 분명 이전과 다를 것입니다.


작가님의 말씀처럼 5년 후 아픔을 딛고 일어선 대 작가 유형주, 그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서게 하는 위로가 되길 기대하고 응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시간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유형주 작가의 뒷모습, 2023 ⓒstudio visit 정채령









유형주의 작업실


유형주 작가의 작업실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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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gram : @yoojuanpablo

・youtube : @Yoojuanpablo





유형주의 PLAY LIST





유형주의 손, 2024 ⓒ작은도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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