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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 Aug 25. 2023

김성진

다양성에서 가치를 찾는 디자이너

폭염이 도시를 뜨겁게 달구는 어느 날 대림상가 데크 끝자락에 있는 메이커스 큐브를 찾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18년에 사용했던 공간이었기에 반가운 곳이었습니다. 몇 년 전 '아는 을지로'라고 불렸던 공간은 오늘 '김성진 작가의 스튜디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를 을지로에서 스치듯 만났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전시할 공간을 찾아 을지로를 다니던 그의 눈에 띄어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그를 떠올려보면 눈빛엔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버려진 것들을 버려지게 두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투여하는 그는 자신이 손수 만든 카드지갑을 보여주었었습니다. 그렇게 오늘 그의 작업실엔 누군가의 손으로 버려졌었을 물건들이 소중히 쌓여 있었습니다. 지역에서 발견되는 각양각색의 사물이 가진 특성을 통해 이로움을 주고 싶어 하는 그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목차

김성진이야기

작업이야기

공간이야기



코리아니카, 김성진, 2023




김성진이야기


오랜만에 이곳에 들어와 봅니다. 이젠 전혀 다른 목적의 작업실이 되고 있어 반갑고 기대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작가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산업디자이너입니다. 을지로에 자리를 잡은 지는 올해로 4년째 접어듭니다. 2019년도에 회사를 그만두고 2020년에 을지로에 왔습니다. 저는 지역을 기반으로 사회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를 다루고 가치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자인 방법론이라던지, 예술이라던지 하는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트디렉터를 표방하면서요. 산업디자이너면서 아트 디렉터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술하는 디자이너이자 아트디렉터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들립니다. 아트디렉터를 표방하신 다는 것은 역할로서 지향하신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제가 산업디자이너로서 쭉 나아가면서 대가 굵어졌으면 하고 있어요. 이와 함께 내가 관심 가지고 있는 분야들로 역할을 넓혀가고 싶어요. 관심분야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보자면 디자이너로서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에요. 해결을 제시해야 하기에 실용적인 ‘기능’에 집중하게 되어요. 결과물의 존재 이유가 타당해야 하는 것이죠. 어떤 면에서 이것은 예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말하는 영역 안에서는 ‘기능’이 필수 요소는 아니에요. 필수가 아니라는 점이 일정 영역에서 자유로움을 만들어줘요. 자유로움 만큼 기능의 자리엔 메시지를 담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때문에 디자이너로서의 문제 해결과, 예술가로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두 방향을 다 가져나가려 하고 있어요. 결국 두 개가 하나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의 궤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그 이야기를 더 들어보면 작가님께서 지향하시는 바를 더 단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회사를 나오시고 을지로에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를 겪으셨는지 궁금해요.


회사를 2019년 11월 30일에 그만두었어요. 한 달을 남겨놓고 그냥 나왔어요. 보너스를 못 받았죠. 그렇게 잠시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더는 누를 수 없을 정도였어요. 계속 똑같은 작업의 반복이었고, 방법론도 바뀌지 않았어요. 더 좋아질 수 있는 부분들도 개선되지 않고 그냥 계속하던 데로 하려는 관성이 있었어요. 어쩌면 그 방법이 더 효율적이었기에 바뀌지 않으려 했을 수 있지만, 달라지지 않았어요. 반복 속에서 질렸어요.


연차가 올라가고 후배들을 챙겨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졌고, 내가 일할 시간을 줄어들고, 방법은 개선하지 못하고 그것이 무한 반복이 되더라고요. 결국 회사를 나온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몸이 망가지고 나오게 된 것이 좀 안타까운 부분이었어요. 19년도에 퇴사하고 시큰시큰 아파서 건강검진을 받으니 몸이 많이 상해 있더라고요.


반복되는 과정에 힘듦도 많으셨겠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있으시면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것들이 기억에 남으실까요? 작업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을 어떤 것들이 있으실까요? 제가 듣기론 평창올림픽 메달도 디자인하셨다고 하던데.


우선 회사에서 남겨온 것부터 이야기를 해보자면. 디자인 일이 어떤 형태로 돌아가는지 전반을 배우고 리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일 것 같아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클라이언트를 상대해야 했어요. 일을 맡기는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고, 작업과정의 전체도 운영하고,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도 봤어요. 또 함께 일하면서 어떤 태도를 취할 때 동료를 실망시키고 신뢰를 잃는지도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울 수 있었어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전체를 경험할 수 있었고 관계를 설정하고 운영해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기에 혼자서 시작할 방법도 알게 되었어요.


회사에서 했던 작업들 중에 제가 전체 혹은 일부를 책임지고 했던 일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몇 가지 꼽아 본다면 ‘KT우산’과 말씀 주신 ‘평창동계올림픽메달’이 있어요. 우산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총괄을 해서 마무리까지 지었던 프로젝트였어요. 요즘엔 종종 똑같이 만든 중국산 짝퉁이 많이 보이는 제품입니다. 말씀 주신 올림픽 메달 같은 경우는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던 프로젝트였어요. 제가 회사에서 수석디자이너를 맡고 있을 때 진행한 프로젝트이기는 하나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하진 않았어요.. 조형과 틀을 잡는 과정에 참여하고 결과적으로 선택이 된 타입을 총괄했다고 이해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평창 동계올림픽 메달 ⓒSWNA
KT 우산 ⓒSWNA



내가 만든 것을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많은 이들에게 소개된다는 것이 어떤 짜릿함일지 감이 잘 오지 않지만 분명 부럽습니다.



그럼, 회사에서 나오셔서 홀로서기를 시작하시면서 있었던 변화들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혼자서 그것들을 풀어내 봤어요. 그래서 거의 1년 동안은 작업실을 차렸다는 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스케치하고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어떤 것들인지 분석하고 그 기준을 만들었어요. 말 그대로 그곳은 ‘생각의 방’이었어요.


4평 남짓한 생각의 방. 월세도 싸고 혼자 쓰기에도 딱 알맞은 크기의 4평이었죠. 그러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일을 도와달라고. 그렇게 회사일도 일부 도우며 2021년, 2022년 프리랜서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 2021년엔 기아자동차와도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일을 해보니 연봉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여유를 찾으며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어요. 


그렇게 ‘생각의 방’에서 스스로에 대한 분석을 마칠 때쯤 이제 뭔가 해보고 싶어 졌어요. 그렇게 인맥을 넓혀나가려 했어서 이곳저곳 문을 두드려보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나게 되었던 곳이 ‘을지예술센터’였고, 그때 우리가 만나게 된 거였죠. 'n/a갤러리'도 가서 대관비도 물어보고 사장님하고 담배도 피우면서 잡담도 나누며 어렴풋이 갤러리라는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었어요. 후에 ‘을지예술센터’에서 했던 포럼에 참석하며 인맥도 넓어지고 지역에 대한 이해도 더해갈 수 있었어요. 당시엔 개인작업을 하거나 내가 관심 가질 것들을 찾아가는 것이 스케줄에 전부였어요.


기획을 하는 것은 내 안에서 단서들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만들어가는 과정은 사람을 만나며 진행되는 것 같아요. 을지로에 오시면서 주변 작가들, 디자이너들과 관계가 연결되는데 그 과정은 어떠세요?


요즘 관계에서 얻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어요. 1년간 혼자 생각을 정리할 당시엔 관계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회사 다닐 때 후배들을 잘 챙겨주려 했었어요. 100명 넘게 봤었죠. 마음을 써도 그때뿐이었어요. 아꼈던 친구들도 결국 회사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무기력하게 관계가 사라지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상실감도 있었어요.


그 상실감에 대한 위로와 회복을 하게 해 준 게 사물이었어요. 사물은 배신하지 않아요. 자연은 배신하기도 하지만 사물은 배신하지 않아요. 물성을 그대로 올곧이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의자를 만들었어요. 의자에 인격을 투여했어요. 나 스스로를 투영했어요. 의자는 스스로를 의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나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의자라고만 보는 거예요. 어떤 이에게 이 의자가 편하고, 어떤 이에게 불편하겠지만 의자가 결국 보여주고 싶은 것은 ‘나는 나무야’였어요. 때문에 패널도 큼지막하게 잡아 놓은 거예요.



Plack chair ⓒ김성진



그렇게 의자를 만들며 사물과 사람과의 관계, 사물과 공간의 관계 등을 복합적으로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정리가 되었었어요. 그러니 여러 감정들이 휘발되더라고요. 의자를 통해서 해소가 되었어요. 그렇게 결국 개인작업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이후 관계는 작가님께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번아웃 되고 혼자만 있고 싶었다가 차츰 회복되니 또 힘을 주는 게 관계더라고요. 물이 더러워지면 더 깨끗한 물을 계속 따라서 물을 맑게 하는 방법이 있듯 긍정적인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 점점 밝아지는 것 같아요. 


관계가 작가님의 전공을 바꾸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을까요?


처음 대학을 간 곳은 공대였어요. 하지만 공대를 그만두고 미대를 갔어요. 공대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할 때 미대 친구들이 있었어요. 공대 친구들과 이야기 나눌 때 예민한 동감이 없었어요. 하지만 미대 친구들은 그것을 먼저 이야기해 줬죠. 그래서 미대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영역은 미대였구나.’하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갔어요.


미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작가님께 중요한 대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자이너시니 그 관계 맺는 과정을 설계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갈 계획도 가지고 계실까요?


‘브릿지’라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안정화시키고 싶어요. 제조가들 창작가들이 샘플링할 수 있는 가장 최적화된 공간이 을지로라고 생각해요. 클라이언트와도 가깝고 하루면 무엇인가를 뚝딱 만들 수 있는 제조 생태계가 있기 때문이에요. 제조공장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많은 변주도 가능한 곳이에요. 그래서 그걸 이어주는 디자인 중개 사업을 하고 싶어요. 맞는 사람을 매칭해 주는 서비스 개념도 있고, 사장님의 성격에 맞춰 디자이너와 제조공장의 mbti를 보고 매칭해주기도 하는 거죠. 그리고 사장님을 대하는 팁도 알려주고요. 예를 들어” A 사장님을 만나시면  OO사투리를 써보세요.” 같이요. 디자인 컨설팅과 제작 매칭이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후에 비수기와 성수기에 차이 같은 데이터도 쌓인다면 좀 더 고도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된다면 정식 서비스 론칭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차츰차츰 쌓아갈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작업이야기


생각에 방’에서 나오시면서 무엇을 향해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으셨을 것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당시 ‘생각에 방’에서 들고 나온 것이 2022년 DDP에서 전시했던 ‘0toX(제로투엑스)’였어요. 을지로에 있다 보면 충분히 사용가능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버려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것들이 결국 폐기물로 사회, 경제, 환경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그것들을 그냥 버려지지 않고 쓰임이 있도록 해결한다면 연쇄되는 많은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시작이 될 것이니, 그것을 열어보고자 했어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어요. 을지로, 제주도를 거쳐 해외로 나가서 종착지는 쿠바로. 그렇게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지역의 비슷하지만 다른 문제를 마주하고 풀어갈 실마리를 만들어나가고 싶었어요.  



0toX 포스터, DDP ⓒ제로투엑스무브먼트



그렇게 을지로는 자연스럽게 첫 번째 ‘0toX’의 대상지가 되었군요. 전시엔 여러 작가님들이 '0toX'에 함께 하신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기획을 해나가셨는지 궁금해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하고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모이게 되었어요. 테스크 포스 팀일수록 균형이 중요해요. 때문에 디자이너 5명, 공예가 예술가 조향사 5명으로 구성을 했어요. 다양성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역시 여러 사람들을 조율하면서 프로젝트를 운영한다는 것은  쉽지 않더라고요. 중간중간 어려움이 많이 있었어요. 큰 주제에 공감해서 모였지만 각자의 입장과 지향에 차이가 있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봤고, 참여한 친구들도 각자의 입장에서 그러했어요. 그 과정에서 참여자들에게 디렉션도 해야 했고, 멘토링도 해야 했어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다음엔 더 실수를 줄 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께서 ‘다양성을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더 들어보고 싶어요. 사실 프로젝트를 쉽게 운영하기 위해서 다양성은 때론 독이 될 때가 있기에 작가님께서 리더로서 일정 부분 내려놓고 시작하신 것이라고 이해되어요. 고생길이 뻔함에도 그것을 지향하신 이유와 앞으로도 그 점이 변함없을지 궁금해요.


제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에요. 우리가 사는 현재 사회는 일률적으로 일해야 하고, 같은 모습을 지향하길 바라는 것 같아요. 때문에 그렇지 않을 수 있도록 회사 겸 학교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각 사람 사람마다의 디자인을 갖게 만들고 싶어요.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스타일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 개개인마다의 스타일을 만들어진 모습을 보고 싶어요. 변호사 같은 디자이너, 의사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거예요. 한 사람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생활양식, 예의 등을 서로 토론하면서 브랜딩해나 가는 거예요. 개인의 브랜딩을 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위해서 산업디자이너, 심리학자, 패션디자이너, 건축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필요하겠죠.


각자가 다양성을 가지는 세상을 만들어보기 위해 이제 빌드업을 하고 있는 과정이에요. 이제 시작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실무를 시작한 지 올해로 딱 10년이 넘었어요. 10년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도 있지만,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성장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기반이 되어 다른 분들과 엮여서 꿈을 향해 가는 첫걸음을 뗀 거예요. 차근차근 스페셜리스트들을 모으고 싶어요


첫걸음을 떼었다는 말씀이 듣는 이로 하여금 설레게 하고, 다음을 상상하게 만들어주어요. 두 번째 ‘0toX’는 어떤 모습일까요?


두 번째 프로젝트는 2023년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처음 계획을 했을 땐 제주도에서 해보려 했었어요. 제주도를 가려했던 이유는 제가 찾던 이슈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코로나로 인한 고립, 해양 폐기물, 관광 쓰레기, 섬이라는 영토의 한계, 농업과 수산업이 함께 있는 곳. 이 모든 조건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직 서울에서 할 일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에요.


작업을 하시면서 작가님께서 한결 같이 고민하는 부분이 있더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만든 것을 타인이 볼 때 ‘산업디자이너라는 관성 때문에 이렇게 만들었나 봐.’ 얘기해도 어쩔 수 없어요. 제가 만든 것들은 무조건 기능이 들어가야만 해요. 예술 작품을 만든다 하여도 기능이 기본적으로 들어간 거였으면 해요. 그것이 숨어있는 기능일지라도.


말씀을 듣고 보니 작가님께서 돌을 깎아서 만들었던 쌀알이 생각나요. 의도하고 만드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 쥐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편안함을 느꼈고 그렇게 용도가 생기는 과정을 본 적이 있어요.


맞아요. 제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손에 쥐는 감이 좋았던 거죠. 제작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손에 쥐어보면서 만들었어요. 스스로 그립감을 잡았던 거예요. 손에 알맞은 사이즈에 맞추려 한 거였죠. 개인마다 손도 차이가 있겠지만 제가 그간 디자이너로서 일을 해온 데이터가 맞다는 걸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했어요. 우산을 만들 때 손잡이의 두께, 타입, 형태 등을 정해나가는 과정과 같았던 거죠.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고민하며 만들게 되었고, 그것을 알아봐 준 사람이 너무 고마웠어요. 그때 너무 즐겁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하나 더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어요.


이런 사용에 대한 고민, 신체에 대한 이해가 제 작업의 특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든 잃지 않고 계속 가야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것들을 키워나가서 스페셜티를 만들고 싶어요. 김성진 하면 어떤 풍이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 ‘대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나 봐요. 명분도 중요하고 실리도 중요해요. 두 개를 다 잡고 싶어서 클라이언트 일도 할 거고 여러 문화 사업에도 참여할 것이고, 스스로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기업도 만들 예정이에요. 올해 계획 중 하나는 예비 사회적 기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0toX’를 통해 만들어진 것들을 상품화시키려 해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개인전을 여는 거예요. 


올해 많은 일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 첫 개인전도 준비 중이라면 어떤 전시이며 어떤 이야기를 하실 예정일까요?


코리아니카(coreanica)를 만들려고 해요. 개인전도 가치 다양성에 기반으로 시작되었어요. 3.1절에 메타버스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쌀’을 소재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언젠가부터 밥이 너무 좋았어요. 어릴 적은 밥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어느 날 강화도에 갔을 때 밥맛이 너무 좋았어요. 그때 생각이 들었어요. ‘이 쌀은 어떤 쌀이지?’


다시 3.1 운동으로 돌아가서 쌀이 식민지의 자원 수탈에 대상이었기도 했고, 각 지역마다 다른 쌀이 있다는 것이 어느 순간 제 안에서 융합되었어요. 그렇게 ‘쌀’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쌀’이 처음으로 서구에 소개될 땐 조선은 그들의 세계관에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어요. 일본을 통해서 동북아를 학습하게 된 거죠. 그래서 학명으로 동북아시아의 ‘쌀’은 자포니카(japonica)만 있어요. 제일 오래된 볍씨는 한반도에서 발굴되고, 밥을 지었던 흔적도 한반도가 가장 오래되었으나, 코리아니카(coreanica)는 세상에 등장할 기회를 박탈당한 거예요.


여기서 가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해보면, 한반도에 쌀은 1500여 종이 넘었었다고 해요. 1000여 종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무엇이 맞든 그 종류가 다양했었음에는 틀림없어 보여요. 각 지역마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쌀은 형태도 색도 맛도 다 달랐다고 해요. 밭에서 기르냐, 논에서 기르냐, 현무암지대에서 기르냐에 따라 다 다른 맛이 났다고 해요. 쌀의 지역 특성이 제가 ‘0toX’를 하는 지향과 맞물려요. 각 지역에서 나고 자란 것이 특유의 원형인 것이에요. 지역의 원형인 이야기를 뽑아내기 위해 각 지역을 다니며 프로젝트를 해나갈 계획을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죠.


여하튼, 쌀은 현재 500여 종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요. 쌀을 다시 다품종으로 회복하려는 운동도 있고 연구도 있다고 해요. 다양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죠.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밥을 먹고, 쌀이 물물교환에 중요한 기준이 되어 주었듯이 현대엔 디지털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고, 경제를 움직이는 요소가 되어주고 있어요. 그래서 디지털 라이스를 만들게 되었고, 현실에서는 탄생이 좌절된 코라아니카(coreanica)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어요.


디지털 라이스라면 인구 70억 명만큼의 70억 개의 쌀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사람만의 디자인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 사람의 정체성을 담은 쌀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이 내용들을 개인전을 통해서 풀어내고 싶어요. 블록체인기술과도 엮고 싶고, 애플에서 비전이 나오면 달라질 환경에 또 다른 유니버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심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있어요.


사람의 개성과 정체성을 담은 디지털 쌀이라. 어쩌면 제가 상상하는 모습 전부가 작가님의 작업과 거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작업들을 봤을 때 분명 아름다울 것 같은데 그 모습과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공간이야기


회사를 나온 이후 작가님께 공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준 것 같아요. 나를 풀어내는 기회를 만들어 줬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있고. 그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을지로에 오게 되면서 구하게 된 첫 공간은 4평이었어요. 그 안에서 내 안에 벌어졌던 일들, 내가 놓쳤던 나 자신을 찾아보는 과정을 거쳤어요. 그 결과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향한 시작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은 후 잠시 작업실을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갔었어요. 준비를 해서 이제 지금 작업실에 오게 되었어요. 지난주 월요일(7월 첫 주)에 이사를 하게 되었고, 공간은 전보다 훨씬 넓어졌어요. 넓어진 만큼 작업실 3분의 1은 저의 개인 작업공간으로 3분의 2는 외부인이 와서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해 나갈 예정이에요. 


물론 제 생각과 시간도 존중받아야겠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인지해주는 이들이 편히 드나드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이제 이 공간에서 스페셜리스트들이 모여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가는 시간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후에 성장하는 모습도 오프라인과 온라인 공간을 통해 공유드려나갈게요.




다양성, 그 가치를 발굴하는 디자이너


김성진이란는 디자이너, 예술가가 걸어온 길, 지향하는 방향을 통해 그가 보는 다양성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서로가 대하는 모습엔 존중과 이해가 깊어질 것 같습니다. 최근 부쩍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귀함을 잊어 벌어지는 사건 소식이 많이 들리고 있는 터라 작가님의 시각이 더 큰 의미를 우리에게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때론 실용적인 사물로, 때론 심미적인 작품으로 작가님께서 만들어갈 세상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기대합니다. 4평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 그때 함께할 이들은 어떤 이들일지 기대하고 과정을 응원하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성진의 작업실




김성진의 작업실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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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의 손, 20203 ⓒ작은도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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