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괜찮은(?) 과거를 쌓아가는 삶의 관찰자
을지로에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카메라로 여러 상황을 기록하던 '김영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뉴스레터를 발송하고 있었고,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대림상가 5층에 멋들어진 살롱을 만들어 식문화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만날 계획이라 하였었습니다. 동료들과 나물을 따기 위해 지방을 가기도 하고, 사람을 초대해 그들과 이야기 나누기도 했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어 있었습니다.
2022년 '을지서비스센터'라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중구문화재단과 을지예술센터는 을지로에서 공공예술프로젝트를 실행했는데 그 중 '을지서비스센터'는 을지로의 예술가, 예술공간들을 엮어 보여주는 기획이었습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한 예술공간과 을지로 예술가들의 활동을 연결되어 시민이 향유하는 도시의 예술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현장부터 다큐멘터리 감독 '김영인'은 을지로의 예술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1년이 지난 오늘 그는 이제 을지로에 편집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어떤 이야기들을 목격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바다 건너 오지를 오가기도 하고, 일상 가까이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관찰하며 기록합니다. 렌즈를 통해 쌓인 이야기는 그의 편집실에서 서사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봤을 세상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내일을 꿈꾸기보다 더 나은 과거를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합니다. 그렇게 점점 쌓이는 과거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김영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목차
김영인 이야기
작업 이야기
공간 이야기
내일 이야기
김영인 이야기
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김영인이라고 합니다. 올해 봄 을지로 세운 메이커스에 입주해서 편집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회사이름을 ‘버팔로필름’이라고 지으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1994년부터 부모님께서 몇년 간 운영하시던 호프집 이름이 ‘버팔로’였어요. 그 이름과 로고를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와서 회사명과 회사로고를 디자인하게 되었어요. 호프집이 잘 되기도 했었고요.
당시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은 전혀 생각을 안 했었어요. 문화기획자로서 기획을 해나가고 싶었어요. ‘제철과일 season & work’라는 이름으로 동료들과 소셜 커뮤니티 기반으로 ‘먹고 사는 야이기'를 주제로 식문화 기획을 해보고 싶었죠. 회사도 만들었고요. 동료들끼리 창업한 이후에는 접근성이 용이 한 을지로로 거점을 옮겼어요. 대림상가 5층에 자리한 멋진 공간이었죠.
함께 했던 친구들 모두 커뮤니티를 만드는데 관심이 많이 있었어요. 음식을 기반으로 식문화 기획을 해보자,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는 그런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어떻게 수익을 만들 수 있을지 큰 고민 없이 젊은 패기 하나로 했었죠. 당시가 2020년 1월이었어요. 아시다시피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기획을 실행할 수 없었어요. 사람을 모으는 것이 위법이었거든요. 많은 행사를 열어보지 못해서 스스로의 역량과 기획력을 품평해볼 수 없었죠. 코로나가 점점 더 확산되었고 그 중에 공간 계약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희는 계약 연장 선택할 수 없었죠. 다들 아쉬움이 많은 채 공간 계약을 종료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활동을 어떻게 온라인으로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뉴스레터도 했던 것 같아요. 계속 혼자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스케치 영상도 찍고 이것을 콘텐츠화해서 사람들이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게 공유하는데 관심이 많았어요. 그때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을 계속했었어요.
작업 이야기
콘텐츠를 만드는 데 있었던 관심이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업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혹시 구체적인 계기나 동기가 있으실까요?
공교롭게 어제 같은 질문을 받았었어요. ‘왜 다큐멘터리를 찍느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납득되는 답변을 드리기는 늘 어려워요. 왜냐면 딱히 저에게는 시작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 재밌겠다. 멋있다’ ‘나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안 하면 안되겠다.' 그래서 했던 것이었거든요. 아울러 제가 넷플릭스에서 봤던 좋아했던 다큐멘터리처럼 극적 내러티브와 영상미를 갖춘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지금에서야 프로젝트마다 새로운 주제에 천착하는 즐거움이라든지, 개인의 환경이나 생각의 한계로 절대 만나지 못하는 또다른 세계와의 깊은 만남이라든지, 그럼으로써 제가 조금을 덜 편협한 사람이 될 수 있다든지 등의 이유들을 다큐멘터리의 매력으로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어요. ‘시작은 가볍게 끝은 무겁게' 요즘 저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다큐멘터리를 만드려고 하니까 제가 만들어보고 싶은 소재나 주제가 있어도 제작비를 지원받거나 협업을 제안하고자 할 때 보여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없어서 설득력이 없다고 여겨졌어요. 마치 식당을 차리겠다는 사람이 요리법만 가지고 투자자를 설득하는 것과 같은 상태였던 것이죠. 열정만을 토하는 사람이 있고, 샘플을 만들어서 드셔볼 수 있게 한 사람이 있다면, 개인사를 모르는 투자자 관점에서 샘플을 만들어 준 이가 설득력이 있죠. 그래서 우선 찍어봐야겠다. 내 돈을 들여서 내가 투자해서 찍어봐야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렇게 개인 작품 두 편을 찍었죠.
그때 찍으셨던 것이 싱가포르에서 찍으셨던 작품일까요?
네. 〈OVERSEAS〉를 싱가포르에서 촬영했었어요. 해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과 이면을 담고 싶었어요. 20분 정도로 짧게 만들었어요. 이후 제주도에서 ‘세이브제주바다’라는 비영리단체와 ‘플라스틱아크'라는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제품을 만드는 회사와 함께 짧은 다큐멘터리 〈PLASTIC TO GREEN〉를 제작했어요. 8분 정도로 짧은 작업이었어요. 최근엔 을지로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층을 담아낸 〈을지로들〉을 마무리 지었고, 현재는 아르코미술관과 함께 커미션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신 작업 중에서 가장 내 색깔이 담겨 있다. 혹은 담기기 시작했다고 느껴지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요?
오히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아르코미술관 작업이 가장 제 색이 담기기 시작한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업은 커미션이지만 저로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서 많이 기대돼요.
기존에 해왔던 것들과 달리 인터뷰도 없고 오로지 내레이션으로 있어요. 촬영 불가한 지나간 과거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샷들도 넣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관객들에게는 좀 다르게 인식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동안 작업은 서사에 맞는 구도와 색감으로 제 감각에 더 집중했다면 이번엔 실험적인 샷과 연출을 통해 영상 언어를 만드는데 더 집중했어요.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영상이기에 조금 더 실험적인 것을 해도 받아주겠다라는 약간은 막연한 믿음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조금 불친절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출의도를 노골적으로 다 설명하는 것이 좋은 접근법은 아니잖아요. 각자 작품을 보고 나름대 맥락과 이야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내 인생과 작품에서 읽어낸 내용이 접점이 있는 것을 찾아나가 삶으로 들여오는 과정이 감상법의 하나이고,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을 명확한 글로 해설해서 의도를 서술하기 시작하면 관객은 스스로 사유할 공간을 잃게 되고 감상엔 재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작업에 참여한 작가가 있을까요?
‘아트쉬프트’를 운영하는 Zach과 함께 작업하고 있어요. Zach이 미술관의 이야기를 듣고 비주얼라이징하는 작업 과정을 카페 영업 마감한 이후에 촬영하고 있어요. 작업 시간이 짧고 늦은 시간까지 촬영해서 Zach이 힘들었을 거예요. 카페 영업하면서 중간중간 작업하는 모습이 즐거워보였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르코미술관 관련된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아르코미술관에서 전시 중에 보실 수 있어요. 2023년 12월 8일부터 열릴 예정입니다.
기대됩니다. 그러면 이제 감독님의 언어와 형식을 더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겠네요.
요즘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어떠한 현상을 보고 표면 아래 어떤 이야기들이, 콘텍스트가 숨겨져 있는지 발견하는 시선이에요. 보여지고 들리는 것 말고 비언어적인 것들과 비시각적인 것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와 맥락을 관찰하려 하고 있어요.
충실한 개인사는 그 시대의 거울이라 생각해요. 삶 하나를 충실히 바라보면 그 시대가 가진 맥락을 읽을 수 있어요. 그런 시각을 가져나가려 하는 데 쉬운 일은 아니에요.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많은 것들을 파면서 경험을 넓히고 감도를 높이고 있어요.
최근에 만드셨던 〈을지로들〉에 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어요. 다큐멘터리는 어디서 감상할 수 있을까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문 다큐 공모전에 제출한 것이기에 ‘인문 360’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올라갈 거예요. 단, 이번에 제출한 영상은 공모전에 맞춰 30분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더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 부분을 내년 초에 보완할 예정이에요. 후에 어떻게 업로드하고 공유할지는 고민하고 있어요.
을지로들, 29'53", 버팔로필름, 2023 ▶︎ https://youtu.be/mVEWWudkZGE?si=sYqjBmv1YqWazJPj
감독판을 만드신다면 지금 만들어진 영상과는 어떤 점이 더 보완될까요?
<을지로들>은 을지로 지역에 ‘문화예술'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총 세 개 레이어의 사람들이 등장해요. 첫 번째 레이어는 제조상인, 두 번째 레이어는 문화예술가, 세 번째 레이어는 문화기획자예요. 그들이 을지로에 온 저마다의 이유가 본의 아니게 이어지면서 을지로에 문화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면을 넣고 있어요.
공모전에는 30분 제한으로 넣지 못한 하나의 레이어가 더 있어요. 을지로에 요식업을 개업한 청년들이에요. 을지로에 문화예술이 꽃피워진 배경에는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도 존재해요. 문화 향유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전시장이나 갤러리만 보고 그 장소에 오는 것은 어려워요. 전시장과 갤러리 방문의 정서가 이어지는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바로 그 부분을 청년들이 채워주고 있어요. 짧게나마 청년 요식업자의 이야기를 담으면 조금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입체적이 되면서 설득력을 더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또한 인터뷰이들에게 들었던 유의미한 내용도 더 추가하고요.
분명 유의마한 자료로 존재하게 될 것 같아요. 기존에 발표해 주신영상이 건축, 도시계획 하시는 분들께도 영감을 주는 것을 지난 상영회 때 확인 할 수 있었어요. 감독판도 기대가 됩니다. 꼭 완성되면 알려주세요. 독자분들께도 기쁜 소식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Art Plaza 을지미로 by IBK에서 〈을지로들〉의 첫 상영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건축가, 도시기획자, 문화기획자, 큐레이터들이 참여해 ‘감독과의 대화’를 가졌습니다.
기획자, 사진작가, 그래픽 디자이너와 함께 〈스튜디오비짓〉이라는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요.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있어요. 을지로 예술가들이 어떤 작업실에서 어떻게 작업하는지, 작업하면서 어떤 음악을 듣는지 기록하면 좋겠다는 제안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에요. 지금까지 다섯 명의 아티스트를 촬영했고 계속해서 해나갈 예정이에요.
〈스튜디오비짓〉을 촬영하시는 과정은 어떠세요? 감독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아티스트의 작업 과정을 본다는 자체가 굉장히 좋은 경험이에요. 일반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게 되면 결과물만 보게 되는 것이지, 그 과정을 볼 수 있는게 없으니. 이후로는 해외 작가들도 찍어보고 싶다는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가능할 것 같아요. 어쩌면 저의 다큐멘터리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보다 훨씬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결과물만 보니, 작품의 가치를 다 알기 어려워요. 왜 그 가격일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납득이 안될 수 있죠. 작품을 보고 구매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그 작가가 살아온 삶과 정신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인정한다는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한 아티스트가 열정을 가지고 버텨낸 어떠한 것이 오늘까지 오는 과정을 직접 보는 기회를 얻게 된 거죠. 그 과정과 이야기를 이해해야만 비로소 가치, 가격이 이해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데 의미가 있어요.
파블로(유형주)의 작업을 봤을 때가 생각나는데요. 누군가가 의뢰한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정성들여 작업을 하고, 값비싼 물감이 지속해서 사용되는 것을 보고 뭔가 감화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이 작품이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약속도 확신도 없는데 계속 꾸준히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 일상이 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어요. 잠시나마 촬영을 하면서 그 작가의 한 성장 과정, 아주 아주 느린 나노미터의 성장을 잠깐 보게 되는 거죠. 그 시간이 쌓여 그가 어떻게 성장해 있을지는 알 수 없죠. 견뎌내는 시간 때문에 AI는 인간의 예술을 대체할 수 없다고 봐요. AI는 GV가 불가능 하거든요.
V.04유형주, 1:23:43, 스튜디오 비짓, 2023 ▶︎ https://youtu.be/iN0MZDN9BSc?si=n8rKCCtqs3YSK0x-
어느 한 사람이 오늘도 예술가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버텨내고 있고, 극복해 나가고 있다는 뜻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을 과정의 한 단면을 떠서 많은 사람에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중요한 일이네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계속 열심히 하고 있는 거죠. 이렇게 만들어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없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계속해 나가는 것 같아요.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해서 전시라도 하면 다행이고, 전시를 하더라도 그 잠깐 1주, 2주 보여주고 결국은 창고 속으로 들어가는 허무함을 견뎌내고 또 만들어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극복해 나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저도 미래를 위해 살기보다 멋진 과거를 만들기 위해 살고 있는 거예요. 부끄럽지 않은 창고를 만들기 위해서. 그랬을때 10년 후에 오늘을 이야기 할 수 있을것 같아요.
공간 이야기
일단은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있었던 개인적인 변화부터 말씀드려 보자면, 가장 큰 변화는 길을 익혔다는 것이에요. 더 이상 지도를 펴지 않고 갈 수 있어요. 제가 골목을 찾아가면 친구들이 신기해하죠. ‘이걸 어떻게 알까?’ 저는 이제 골목에 서 있으면 이곳이 어디인지 네이버 지도에 어디든 핀을 찍을 수 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찍으면서 구석구석 다 찾아다녔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지도를 보고 있지 않다러구요. 초반엔 을지예술센터를 찾아가는데도 반드시 지도를 보고 갔었는데 이제는 어디 있어도 길을 다 찾을 수 있는 정도가 되니 발걸음에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두려움이 사라지니 더 자유로워졌어요. 안 보이던 식당도 보이고, 안 보이던 골목도 보이고. 마치 거미줄이 더 촘촘해진 거죠.
지도를 보는 스마트폰에서 자유로워 진다는 것은 시각의 경험과 감도가 자유롭게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해요. 내비게이션과 지도어플 없이 활보하는 것은 온전한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죠. 감각이 자유로우니까 반대로 감각을 차단할 수 있어요. 그러면 자기 속에 빠져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선대의 철학자들이 산책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입주한 이후로는 식당을 많이 가게 되었어요. 밥을 먹어야 하니 식당을 많이 가게 되고 친구들이 오거나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 일이 끝나면 맥주 한잔 마시러 공간들을 찾아가면 “아 좋다”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죠.
이후 감독판이 나오겠지만, 다큐멘터리가 일단락된 상황에서 감독님께서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변한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저와 제 친구는 2호선 지하철이 다니는 다리를 기준으로 강남, 강북으로 성수를 나눠요. 강남에 갔을땐 건물이 너무 커서 여기가 사람들이 말하는 성수구나이구나 싶은 거에요. 거리엔 한국인 반 외국인 반이고 성수 사람들의 옷 차림은 거의 다 패션계에 있는 사람들 같아요. 위화감이 들어요. 나쁘다는게 아니고 나랑은 되게 다른 성질이구나 싶어요.
성수는 섣부른 생각일 수 있는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너무 팝업이 많이 열린다는 점이에요. ‘지역의 정체성이 팝업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팝업이 끝나면 다 공실이거든요. 마치 페허가 된 느낌이에요. 계속 바뀌고 바뀌는 것 또한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모든 것들이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다 그냥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을지로는 완전 반대죠. 오래된 곳들이 많죠. 을지로는 다른 종류의 위화감이 있어요. 모두가 언젠가 없어질 것이라는걸 한켠에 알면서 남아 있는 것이라는 것도 독특해요.
다른 소속감, 일부 다른 위화감을 느낀다면 도시여서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걸까요? 사람이 너무 많고 너무 다양한 입장이 있어서 일까요? 하지만 어느 곳에서는 소속감을 느끼실 것 같기도 해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길을 아는 순간 이게 내 도시인 것 같아요. 더 이상 길을 찾기 위해 핸드폰을 켜지 않는 순간이 있어요. 이천(감독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내비게이션을 끄면서 안도감이 느껴져요. 여기는 내 바닥이니깐 오히려 내비게이션 보다 내가 더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이 안정감을 만들어줘요. 길을 찾기 위해 시각정보에만 의존하던 긴장이 풀리면 오감이 더 살아나는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에 담기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지만, 같이 작업한 덕화맨숀(그래픽 디자이너)도 가까이 있잖아요. 디자인 회의라는 게 요즘엔 대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소통 가능한 방법들이 많이 생겼지만 가까이 있다는 것이 작업에 변화를 만든 지점이 있었을까요?
당연하죠. 덕화맨숀도 〈을지로들〉 하면서 만났지만 같이 작업을 하기 매우 용이했어요. 제가 가기도 하고, 덕화가 와주기도 하고 바로 노트북 들고 만나서 보여주고 그리면서 설명하면 훨씬 소통이 빠르고 명확해져요. 물리적인 거리가 멀면 얼굴 안 봐도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작업을 지향했을 텐데, 가까이 있기 때문에 창의성을 요구하는 회의를 하는 것이 가능했어요.
다른 영역에서 창작하는 사람들이 동네 친구가 된 것이 진짜 좋은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거리가 가깝다는 것에서 서로의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줬을 것 같아요. 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기대되기도 하고요.
사실,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라는 것을 잊고 살다가 지하철역을 지나오는데 여기 ‘왜 이렇게 영화 관련된 게 많지? 아 여기가 충무로였지!’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 제가 삼각대를 사는 ‘세기몰’이라는 큰 플랫폼이 있는데 바로 인근이더라고요. 현상소도 인근에 있고. 만약 다음 장비를 구매하게 된다면 그냥 가서 보고 결제할 것 같아요.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보다 감독님의 영역에서 충무로라는 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아직 이용은 많이 못하고 있지만 ‘대한극장’ 있잖아요. 이제 좀 여유가 생기면 밥먹듯이 영화 보러 가려고요.
원로 예술가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 번씩은 ‘대한극장’이 등장하더라고요. 극장이 가진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으니 후에 감독님께서 만든 다큐멘터리도 상영하는 날이 올 수 있길 기대하게 됩니다.
그럼,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네요. 창피하지 않도록.
이천에서 나고 자랐고, 대학 시절은 천안에서 보냈어요. 캐나다를 다녀와서 한학기 졸업을 앞두고 있을땐 이천에서 통학을 했어요. 이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어요. 당시 캐나다 친구 ‘피터’가 울산에서 한국외대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집을 구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두 낭인이 같이 살기로 하고 노원구 월계동에 서울 첫 집을 가지게 되었어요.
이후 정릉으로 이사를 했었어요. 문화재단에서 일하면서 동료들과 그때 ‘제철과일/Season & Work’ 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정릉은 너무 좋은 도시였지만 아직 많은 활동량을 해야하만 하는 젊은 저에게는 불편한 점이 있었어요. 정릉에서 이사를 나올 때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미팅을 오가기에 편리한 교통이 있어야 한다.', ‘근처에 산책이나 달리기를 할 자연 혹은 공원이 있어야 한다.’, ‘이천에 가기 용이해야 한다.’ 였어요.
성수는 세가지 조건에 너무 만족스러운 위치였어요. 거처를 정하고, 작업실은 인근 공유오피스로 삼았어요. 하지만 공유 오피스의 환경엔 제약이 있었어요. 영상 편집할때 스피커를 켜놓고 하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니 2시간 넘게 이어폰을 끼고 편집을 하고 있으면 귀가 너무 아프거든요. 색보정을 할 때는 작업 공간을 암실과 같은 조건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불가능했죠. 현재 을지로에 편집실이 생기면서 암실로 구성하고, 모니터링 스피커를 켜고 편집을 할 수 있어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내일이야기
커러어는 가시적으로 말씀드리면 언젠가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아다큐멘터리 찍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책임감 높은 제안이 왔을 때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어요. 10년이 될지 15년이 될지, 아니면 한국에 그런 시장이 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한 인간으로서는 덜 흔들려야 될 텐데, 여러 가지 유혹에 덜 흔들리는 말그데로 불혹이 되어야 할텐데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에 재밌는게 너무 많아서 계속 한눈 팔게 되어요. 역량이 쌓인다면 그렇게 노는 것들을 작업으로 승화시키거나 전환해나가는 것이 가능할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중요한건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마음가짐을 잘 유지해나가는게 아닐까 싶어요. 좀 잘하고 싶고 개발하고 싶어요. 지금은 찍고 싶은것은 너무 많은데 이후에 열정이 떨어지거나 어딘가에 관심사가 없어지지 않길 바래요. 혹은 괜히 콧대만 높아져서 ‘난 그런건 안찍는다.’ 그럴까봐 걱정이지만, 부자가 될 수 있는 커리어도 아니고 그런일은 벌어지지 않을것 같아요.
마음이 꺼지지 않는 10년이 되어야겠네요.
경제적 자유를 얻고, 작업실을 하나 얻어 강아지 친화적으로 인테리어 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어릴 적부터 강아지와 함께 자랐어요. 모든 집의 집기를 강아지를 위해 인테리어 하고 설계할 거예요. 개구멍도 뚫어 놓고 스스로 열고 다닐 수 있도록 할 거예요. 어차피 자신이 편해하는 곳에 있고 싶어 할 것이기에 어디든 편하게 갈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강아지는 장애 없이 오가고, 가족과 친구들도 편하게 드나들고.
친 강아지 중심의 공간이라. 저에게도 그런 로망이 있습니다. 그 포근한 집에 꼭 초대받아 보고 싶어 집니다.
12월에 있을 아르코미술관 다큐멘터리만 끝나면 잠수 탈 겁니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보고 싶은 영화도 많고,스키도 타야하고, 맥주도 마셔야해요. 돌아오자마자 〈을지로들 감독판〉을 만들 예정이고, 〈스튜디오비짓〉도 촬영을 계속 해나갈 예정이에요. 대학원도 지원했는데 만약 합격한다면 또다른 재밌는 사건들이 내년에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제작하고 싶은 작업들이 있어서 어떻게 예산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을 해봐야 할것 같아요. 그렇게 30대의 또 한해를 보냅니다. 30대는 많은 이야기를 쌓는데 집중하고 돈은 40대에 벌어야 할 것 같아요. 40대에 한꺼번에 퀀텀 점프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을 쌓아 내일을 만드는 사람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10년 동안 멋진 과거를 쌓아가시길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 시간 위에 어떤 꽃들이 필지 기대됩니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대가 올곧은 꽃일지, 아니면 하염없이 흔들리며 그 움직임 안에 이야기를 피워 주는 꽃일지. 어떤 꽃이든 다 좋을것 같습니다. 모두 향긋할 것 같습니다. 그때쯤 대한극장에서 열릴 감독님의 N번째 GV를 응원하며 이만 인터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영인의 편집실
김영인의 작업실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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