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
이마리아 작가님의 그림을 본 적 있습니다. 커피 향이 가득한 공간 한편에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있었습니다. 계속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구들은 잠시 주인이 부재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의 빈자리가 있는 작업 공간을 빤히 보긴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호기심이 피어 올라왔던 기억이 납니다. 작업 공간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자니 편안함을 주는 풍경으로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공개적인 장소에 작업실을 운영하게 된 궤적도 궁금했습니다.
유혜인 작가님을 뵈러 갔던 어느 날 곧 작업실을 정리한다는 소식과 이후 공간은 이마리아 작가님이 이어서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들을 줄 몰랐던 반가운 이름이었습니다. 커피 향과 편안한 풍경 속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을지로의 예술가’, ‘사람’을 키워드로 삼는 전시에 예술감독으로 참여했던 터라 작가님을 전시에 초대드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전시로 일정이 맞지 않아 그림 두 점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더위가 시작된 날 작가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익숙한 공간 들어서니, 이젠 독립된 공간에서 그림이 그려진 다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작업실 곳곳에 있는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곧 알게 되었습니다. 편안함을 느끼게 만든 결과는 내 안에 나를 이해는 힘으로 내 밖에 있는 이들을 애정 어리게 볼 수 있게 된 한 예술가의 노력의 성과였다는 것을. 차곡히 쌓인 정성으로 작품엔 작가가 애정하는 것들이 담기고, 보는 이로 하여금 애정을 전이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 애정으로 잠시나마 행복한 그리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림이라는 언어로 애정의 다양한 형태를 나누는 이마리아 작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목차
이마리아 이야기
기획 이야기
작업 이야기
공간 이야기
내일 이야기
이마리아 이야기
저는 그림으로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는 이마리아입니다. 런던에서 미대를 나왔고 서울에서 미술 심리 치료를 공부했어요.
제가 보고 느낀 것들에 관심이 많아서 그것들을 드로잉, 페인팅, 글로 기록하고 있어요. 주로 여행지와 일상 풍경을 수집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미술치료를 공부하신 것이 일상과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작품을 창작하는 영역과 미술치료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영역이 작가님 안에서 상호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지 궁금합니다.
미술치료를 전공하게 된 것은 제가 대학 시절 그렸던 그림들 때문이었어요. 외국에 살던 시절이라 마음이 힘들었던 때였는데 제 그림을 보면서 '왜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지?' 궁금했었어요.
공부를 하고 내담자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분들이 그린 그림은 사람 별로 나오는 결과가 모두 달랐어요. 내담자의 증상에 따라 특징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이 다르다는 것도 볼 수 있었어요. 관찰을 하면서 각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과정 중 어느 부분이 오늘의 그림으로 나타났는지에 관심이 갔어요. 그 관점에서 스스로를 탐구했어요. 왜 난 이렇게 그렸지, 어떤 부분이 영향을 줬는지.
미술 치료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스스로를 이해하고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만들어오셨구나 싶어요. ‘타인’을 보는 것보다 ‘나’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님께서는 그 과정을 스스로 만드셨다는 것이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남을 이해할 수 있는 폭과 깊이가 넓으시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가 영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당시 영어가 서툴다 보니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그때 미술 선생님께서 위로를 많이 해주셨어요. “너의 그림에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네가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다.”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주셨고 제 자존감에 영향을 많이 미쳤어요. 그래서 더 주눅 들지 않고 펼쳐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미술치료를 배우면서 선생님이 해주셨듯 저 스스로가 저를 도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꼭 미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면 제일 좋지 않을까 싶었고 그것이 대학 진학으로 이어졌어요.
좋은 롤모델이 계셨네요. 그 과정에서 변화한 부분이 많으실 것 같고, 그림은 그 결과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패션, 트렌드에 관심이 많았는데 패션으로 유명한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패션을 공부하지 않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막상 시작하니 패션 업계 특성상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제일 중요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것들을 쫓아가고 있는 제가 어느 순간 힘겨워졌어요. 계속 비교하게 되면서 저 스스로를 돌보고 돌아볼 여유가 없어졌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더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과로 전과했어요. '시각 디자인'에서 '일러스트' 전공을 택하면서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되었고 좀 더 제 마음 상태를 돌아보는 작업들을 하게 되었어요.
트렌드, 패션 이런 것들에 너무 관심이 많지만 나 스스로를 잘 채워나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너무 하고 싶은 일이 있음에도 본질적으로 이 위치로 돌아오는 것 같아요.
조금 긴 호흡으로 땅은 다지면서 그 위에 이야기를 쌓고, 다시 땅을 다지고 그 위에 이야기를 쌓는 것을 반복하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땅이 점점 단단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항상 바닷가에서 모래를 파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파놓으면 다시 무너지고, 모래성을 쌓으면 무너지고. 그래도 조금은 성이 지어지고 있나 봐요.
기획이야기
제가 다양한 것을 좋아하는 모습이 페인팅이라는 형식에 모두 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그림에 담긴 것들 외에 제가 관심 가졌던 것들을 여러 가지 기획, 팝업 등의 형태로 선보이려 해요. 제 팝업이나 전시를 할 땐 평소에 본 다양한 브랜드 행사들이 좀 더 재미있는 구성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영감이 돼요.
그런 점에서 요즘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림으로는 한 면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주변 사람들도 정말 가까운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 외 사람들은 저를 만나고 의외라고 생각하는 게 많아요. 그림에서 보았던 느낌과 달라서요.
한 번은 와인을 함께 좋아하는 세라믹 하는 친구와 좋아하는 와인 바틀샵 공간에서 세라믹 팝업을 한 적이 있어요. 와인 관련된 세라믹 작품들을 만들어서 하루동안 판매했었는데 그 공간과 저희 작업들이 너무 잘 어울렸고 판매도 잘 되었어서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또, 제가 와인을 좋아하다 보니 성수동에 있는 와인바에서 “네가 와인바를 연다고 생각하고 팝업을 기획해 봐.”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메뉴에 대한 기획, 공간에 대한 기획을 같이해서 들어간 적이 있어요. 당시를 돌아보면 힘들기도 했지만 무척 재밌게 했었어요. 그때 ‘팁시마(Tipsyma)'라는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살짝 술에 취한 강아지인데 제 모습을 담은 캐릭터예요. 그전엔 '참생이(참새캐릭터)' 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너무 귀여워서 좀 더 중성적인 캐릭터가 필요해 만들게 되었어요. 저의 겉모습만 보면 되게 여성스럽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제 성격은 또 그렇지 않거든요.
와인바에 ‘팁시마의 별장'을 만들고자 했어요. 원래는 혼자만 하는 전시였지만 공간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채운다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하고 세라믹, 터프팅, 꽃으로 작업하는 친구들과 디저트 만드는 파티셰를 섭외했어요. 그분들이 ‘팁시마의 별장'에 놀러 온 친구들처럼 해달라 했어요. 그렇게 협업해서 운영하게 되었어요.
‘팁시마의 별장’에 페인팅 작업도 같이 전시를 했었어요. 제가 원하는 풍경에 캐릭터를 넣고 두 영역을 합쳐보는 시도였어요. 하지만 역으로 와인을 좋아하는 모습을 작업으로 가져간다면 그건 좋을까? 잘 모르겠어요. 너무 주정뱅이처럼 보일 것 같아요 ㅎㅎ
와인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져서 내추럴 와인에 관련한 책도 쓰게 되었는데 제가 만들었던 독립출판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출판하게 되었어요. 처음엔 ‘업계 사람이 아닌데 책을 내도 되려나?’ 생각했지만 애호가 입장에서 좋아하게 된 과정을 인스타툰 형식의 만화로 그려서 와인 초보자들이 보기에도 재밌고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맛에 되게 민감한 편이에요. FNB는 제 메인 업무가 아니다 보니 아직은 돈을 번다는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영역이에요. 때문에 제가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선택권이 많은 일이라면 재미있게 할 수 있더라고요. 그림을 그릴 땐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P(인식형)가 되고, 팝업이나 출판처럼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일은 J(판단형)이 되어요.
함께 계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이 일하는 방식에도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땐 어렴풋이 머릿속에 있는 상을 쫓아 가지만 어떻게 완성이 될지 모르고 가요. 때문에 완전 다 엎을 때도 있고 계획대로 되는 게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요. 그래서 그림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해 나갈 모습 모두 기대가 되어요. 그림에서 풍기는 아우리가 작가님께도 풍겨요. 어느 시점에 여러 모습들이 함께 보여지는 결과물도 나올지, 어떤 분위기에 작가님이 되어 계실지 기대가 되어요.
제 그림을 좋아해 주시는 일반인 분들과 그림 수업을 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클래스를 열게 되었어요. 참여자들이 같은 풍경을 그려도 사람들 마다 가진 성향이 다 다르기에 과정과 결과가 많은 차이가 있어요. 물감을 짜는 양, 붓질하는 정도 모든 점에서 차이가 있어요. 그 과정을 살펴보며 어떤 디렉션을 드리면 좋을지 생각하게 되어요. 조심스럽게 하시는 분들껜 물감도 더 쓰고 신나게 칠해보라고 제안을 하기도 해요.
잘 그리는 것도 좋지만 그 이상의 것을 나누고 싶어요. 의식하고 한건 아니지만 그런 방향으로 하고 있더라고요. 오랫동안 저에게 오시는 분들은 그림도 그리면서 저와 대화하고 싶어서 오시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되곤 해요.
수업을 진행하면서 가끔은 와인을 곁들 이기도 해요. 그림에 대한 이야기, 와인에 대한 이야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림을 그려요. 가끔은 수업이 끝나도 계속 이야기를 하곤 해요. 마음이 맞는 수강생분들과는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하고요.
와인과 그림, 이야기라니 낭만적입니다. 술과 함께 그 여운이 이어지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저 같아도 집에 가기 싫고 계속 함께 있고 싶을 것 같습니다.ㅎㅎ
작업 이야기
모두 제가 마주했던 모습들이에요. 풍경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형태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매체는 사진이에요. 주로 여행하면서 풍경을 수집하는데 보는 순간을 빨리 많이 남길 수 있으니까요. 시간이 있을 땐 간단히 드로잉을 하기도 해요. 혹은 그때 느껴졌던 감상을 핸드폰 메모에 글로 남기거나 여행에서 돌아온 뒤 사진들을 보며 적어놓곤 해요.
그림에 자연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담겨 있던데 이 모습에 관심 가지시고, 남기는 이유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도 고민을 많이 해봤던 대목이에요. 나는 왜 여행 속 풍경과 사람을 그릴까. 제가 청소년기부터 20대까지 외국 생활을 했거든요. 항상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삶이 여행 같다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보고 경험했던 여러 풍경을 나의 시선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게 된 것 같아요. 1차원적으로는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을 그리게 되어요. 전엔 인물과 일러스트를 많이 그렸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 애리조나를 방문했을 때 변화가 생겼어요.
풍경을 그려나가기 시작한 첫 장소는 ‘그랜드케니언’이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환경이었어요. 당시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것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었어요. 그땐 사람 없이 풍경만 그렸어요. 아마 거대한 자연 그 자체에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일 것 같아요. 그러다 그림에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를 그리면서였어요. 자연과 사람이 있는 모습이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여서 좋았어요. 이후 그림에 사람이 계속 나와요. 인물들 간의 관계가 주는 느낌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요. 오래된 노부부 같이 사람들이 같이 있는 모습을 좋아해요. 그래서 그런 모습들이 그림에 담기는 것 같아요.
‘그랜드캐니언’ 이후로 로드 트립을 계속했었어요. 거기서 보았던 풍경의 색감 톤이 그때 그렸던 색감과 많이 닮아 있어요. 이후 제가 좋아하는 톤을 계속 찾았던 것 같아요. 더 완전한 자연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다 팬데믹이 시작되었어요.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엔 여행을 잘 못 갔잖아요. 그래서 동네를 돌아다녔어요. 제가 사는 곳이 대학가인데, 그 대학은 주변 자연이 아름답고 조경이 잘 조성되어 있거든요. 사람들이 자연이랑 같이 있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혼자 있는 사람들도 많고, 서로 같이 어울리기도 하는 모습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작가님 그림을 보면 일상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어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고요. 그들을 따뜻하게 보는 작가님의 시선이 느껴져요.
예전엔 조금 더 추상적인 마음에 대한 그림을 그렸었어요. 때문에 형태가 분명하게 있지 않은 것도 많았어요. 사람을 그려도 사람인지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들이었어요. 지금은 파스텔톤을 많이 쓰지만 당시에는 밝지 않은 중간 톤이나 어두운 톤의 이미지들을 그렸었어요.
추상적인 형태를 그린 것이 나와 내 마음의 관계를 그리신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후 외부에 있는 거대한 자연에 압도당한 이후로 외부에 있는 풍경을 그리다 나와 공간, 그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로 작업이 연결되어 온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고요.
신기한 부분이에요. 제가 그림을 시작한 건 괴로웠기 때문이었어요. 말로 할 수 없는 내면의 괴로움을 표현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그림이 바뀌었어요. 어느 날 사람들이 좋다고 피드백을 해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고민이 되기도 했어요. ‘좋은 그림은 어떤 그림이지?’ 사람들이 보고 편하고 예쁘다고 피드백해 주는 그림이 좋은 그림인 건지. ‘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하고 애쓰고 있나?’ 싶기도 했어요.
그림이라는 게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이지만, 저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서 내 마음이 전 보다 많이 좋아졌구나 싶어요. 그럼에도 힘든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은 여전히 있어요. 이 책의 부재가 ‘괴로움을 녹이는 초록 '이에요.
사실 그때 그림을 그릴 땐 정확히 알지 못했어요. 내가 진짜 힘들었는데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데 이런 그림을 그렸지 되새기며 이렇게 다 정리해서 책을 만든 거였어요. 그러고 나니 또 그림이 살짝 달라졌어요.
인격화해서 이야기해보자면, 말씀을 듣고 보니 작가님에게 그림이라는 것은 내가 뭔가를 성장시켜야 하는 시점에 도와주는 친구 같이 느껴집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뭔가 회복하거나, 치유받거나 아니면 자존감이 더 성장해 건강해질 수 있도록 있어주는 존재 같아요.
그렇게 작가님이 대나무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유연하고 단단한. 대나무는 마디를 기준으로 자라는데 그 마디 덕분에 탄력이 생기고 더 자라는 기준이 되어준다는 말이 떠올라요. 작가님에게 그림이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연하고 단단하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마디.
공간이야기
외국에 살던 시절, 집만 생각해도 이사를 엄청 많이 다녔어요. 항상 하우스 쉐어링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집이니까 주어진 환경을 제가 어떻게 가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인지 도구나 장비를 별로 탓하지 않는 스타일이 되었어요. 그냥 있는 걸로 한다. 단, 최선을 다한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작가님의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익선동 ‘식물’을 만들 때 참여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곳에서부터 시작이었을까요?
첫 대학원에 다니면서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어요. 그러다 영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루이스박' 사장님이 '식물'이라는 카페를 만든다고 해서 도와주게 되었어요. 식물’의 초기 비주얼에 대한 작업을 했어요. 로고나 메뉴판에 들어갈 그림들 그리고 외벽의 그림 등을 만들었어요.
이후 을지로 3가의 ‘커피 한약방’ 인근에 작업실을 냈어요. 친구와 둘이 작업실을 운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월세가 진짜 쌌어요. 월 25만 원인데 둘이 나눠서 내면 되었어요.
이후 둘 다 다시 대학원을 가게 되었어요. 미술 치료를 전공하며 학교를 다니면서 을지로 ‘잔’, ‘루이스의 사물들’을 도움을 준 이후에 ‘커피사 마리아’를 하게 되었어요.
오늘 을지로를 만든 여러 조각이 있는 것 같아요. 그중 서사의 시작이 타 지역인 익선동과 연결된 영역이 있고, 경리단길, 해방촌, 문래동이 있고 을지로 내부에 기원한 것도 있어 보여요. 그중 초기에 큰 영향을 준 곳이 익선동 쪽이라고 생각해요. 도시가 변화하는 중심에 가깝게 계셨는데, 변해가는 과정을 보시면서 어떠셨어요?
신기했어요. 아무것도 없었을 때 뭔가가 생기고 그것을 사람들이 재밌어하고, 그다음에 뭔가가 계속 생기고 더 재밌는 것들이 생기다가 어느 순간 포화가 되고. 제가 트렌드에 관심이 많아서 그 과정을 보는 것이 신기했어요. 변화의 시점에 뭔가가 생기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으면 그게 되더라고요.
그 관점에서 이런 게 생겼을 때 참 좋았다 혹은 반가웠다는 게 있었을까요? 지금은 사라졌거나, 바뀐 공간을 포함해서요.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공간들 중엔 사진 스튜디오&현상소인 ‘망우삼림’이 생겼을 때도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여기 이런 게 생기는구나 싶었어요. 초창기에 저희 커피숍에 자주 오셨었거든요. 사장님 포스가 찐이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망우삼림 건너편에 에이스포 클럽이라는 바도 꽤 초창기부터 생겼어요. 옛날 이화다방이 있던 자리인데 복작거리면서 어두운 목재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아직도 자주 가요. 칵테일도 맛있고요. 뭔가 대형 자본 냄새가 나는 각 잡힌 공간이 아니지만 그 가게만의 멋이 있는 곳들이 끌리는 것 같아요.
PER이라는 내추럴 와인바가 생겼을 때도 정말 반가웠어요. 제가 내추럴 와인에 빠지게 되었는데 을지로에 와인 리스트가 이렇게 좋은 곳이 있나 싶어요. 무겁고 비싼 와인바의 느낌보다는 캐주얼하고 을지로를 닮은 공간이라 생각하는 곳이에요.
지금은 사라졌거나 운영자가 바뀐 공간들이지만 가까운 지인들이 운영했던 ‘호텔수선화', ‘잔'도 좋아했었고 서서 먹어야 했던 스탠딩바 ‘전기'도 한때 최애 단골이었어요. 뭔가 실험적인 공간들을 해보기에 을지로가 좋은 곳인가 봐요.
FNB라는 것이 인테리어 브랜드 모든 것이 치밀하게 설계되고 고민이 많은 영역인데 당시 우리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준 자연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그런 날것이 을지로와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어요.
서로가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서 자연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그것이 을지로가 특별한 곳으로 자리 잡게 만든 시작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작업하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소비 행위는 커피나 음료, 와인이지만 그 안에 많은 콘텐츠가 담겨서 그 전체를 소비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 시작이 되어준 곳이 ‘커피사 마리아’와 ‘호텔수선화’였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친구들 이였다고 하니 새로움을 연 멋진 분들이 함께 했었구나 싶습니다.
작업실이라는 공간이 사람들한테 잘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니 같이 소비하는 느낌을 들게 한 것 같아요. 내가 그 사람 작업실에서 먹는 것 같고,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많은 인연을 이곳에서 만났다는 것이에요. 그 인연들이 제일 자주 만나고 친한 사람들이에요. 작업만 생각하면 좀 더 조용하고 자연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위치상 서울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어딜 가도 편하고 사람들이 계속 모이는 곳이고, 다양한 직업군과 계층이 다 뒤섞여 있잖아요. 그게 주는 바이브와 에너지가 다른 곳과 다르잖아요. 일하는 스타일도 그렇고 을지로에 온 이후 제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내일 이야기
하반기에 아트페어랑 단체전,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준비하고 있어요. 제가 매년 독립출판물을 만들거든요. 그냥 아무도 안 시켜도 하는 것 중 하나인데, 그 과정이 작업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더라고요.
작가님께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계속해오신 것 같아요.
조금은 가깝고 먼 미래이지만 5년 후는 어떤 모습이셨으면 하세요?
제가 뭘 하고 싶어서 적어놨던 것들이 좀 되더라고요. 그중에서 5년 후에는… 결혼을 한 상태였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결혼이 인생에 큰 숙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이 살면서 하는 큰 것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누구를 만나냐에 따라 제가 변하기도 하고, 제가 하는 작업에도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작가로의 삶이 지금보다는 더 안정적이게 되면 좋겠고, 제가 관심 있는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도 하면서 재밌게 살고 싶어요.
작가님 삶에 큰 영향을 주고받을 사람은 어떤 분이 되실지 궁금해집니다. 서로 활력과 동기를 만들어주는 재밌는 분을 만나실 것 같습니다. 축하드리러 가겠습니다.
각각의 방향으로 뻗어나간 것을 이제 많이 모으려 하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저를 소개해야 되는 일들이 생기면서 저를 뭐라고 말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인스타에 표기를 하더라도 어떻게든 나를 표현해야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 무엇으로 나를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었어요.
워낙 이것저것 많이 했으니까 사람들이 어떤 씬에서 날 봤느냐에 따라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다 다른 거예요. 일러스트레이터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땐 크게 상관이 없었던 부분이었는데 페인팅을 하면서 순수예술 쪽으로 영역을 옮겨오다 보니 많은 고민이 되어요.
지금은 ‘그림으로 다양한 일은 하는 사람'이 제일 정확한 것 같아요.
그림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
그림은 작가님께 선물이 되어준 친구 같습니다. 내가 가진 단점을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내 안에 있는 이야기들과 소통하는 창구가 되어주기도 했고, 내가 애정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마디마다 함께 해준 친구 덕분에 이제는 작가님의 취향에 맞춰 소통할 다양한 길이 열린 것 같습니다.
그림과 함께 견뎌내고 성장한 시간 덕분에 오늘 감상자는 행복한 그리움을 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애정한 것과 애정할 것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벌써 마음에 어떤 애틋함이 듭니다.
여러 방향에서 작가님을 향해 손짓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방향으로 뻗어 가실 때 재밌으실 것 같습니다. 그 재미와 함께 그림이 있을 것 같고, 우린 그 덕에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애정하는 방향으로 뻗어나가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긴 시간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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