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해서 더 힙한 을지로 취향
잔에 취향이 가득하다.잔에 취향이 가득하다.
놓인 잔들을 살펴보고 취향껏 고른다.
그리고 잔에 담고 싶은 음료를 선택한다. 마신다.
잔에 취향이 가득하다.
비슷한 취향 : #새소년 #응답하라시리즈 #카시오빈티지손목시계 #배러댄비프(신사)
한쪽 구석에 빈티지한 유리컵들과 컵받침 짝이 있는 머그잔들. 음식을 담을 수 있는 접시까지 놓여있다. 평일 낮인데도 벌써 사람들이 꽤 있다. 느리고 몽환적인 오후 4시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을지로에는 대신증권, IBK기업은행, 센터원 등 고개를 들어 한참을 봐야 높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건물들 사이로 오래된 골목들이 있다. 조금만 더 걸어가다 보면 조명 상가들이 즐비하고, 오래된 음식점들과 쉴 틈 없는 간판들이 복작거린다.
그냥 지나칠 법한 간판이라 입구를 겨우 찾았다.
두리번거리지 않았더라면 을지로의 형형색색 간판들에 묻혀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오히려 그 심플한 간판이 그곳에서는 더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문이 없는 까닭에 주저할 틈도 없이 들어선 곳엔 빈티지한 인테리어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코트가 줄지어 걸려있는 헹거에는 추운 겨울바람을 뚫고 온 사람들의 검은 외투들이 가득하다. 어떤 인테리어 업체의 손길일까 아니면 주인의 취향일까 궁금해진다. 이 전엔 이 곳이 어떤 공간이었을까 잠시 상상도 해본다.
나의 부모님 세대가 왔을 법한 공간에 잠시 놀러 온 느낌이 낯설면서도, 새삼 이 누룩한 느낌이 편해진다.
마침 흔하지 않은 꽃이 그림처럼 담겨있다. 줄기가 제멋대로 구부러진 모습도, 투명한 화분에 투박한 물결무늬까지도 괜시리 멋스럽다. 살짝 가까이 살펴보니 생화. 아마도 이런 꽃을 선택한 센스라면 인테리어 업체의 솜씨보다 주인의 취향이 뚜렷한 듯하다.
문득 집에도 내 잔이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음식이 담기는 그릇까지 챙긴다는 것은 '식' 문화의 끝이 아닌가. 진한 블루색의 잔과 따뜻한 라테를 선택한다. 컵받침이 있는 잔보다는 따뜻한 온기를 가득 담아줄 수 있는 튼튼한 잔이 오늘은 끌린다. 라테는 식으면 정말 맛이 없으니까.
'더 예쁜 잔들은 이미 다 나갔네.' 귀여운 한탄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잔을 골랐을까 스윽 살펴본다. 나는 어떤 잔을 고른 것일까. 만약 내가 집으로 돌아가 내 잔을 사게 된다면 어떤 스타일의 잔을 사고 싶어 질까. 생각해본 적 없는 소비를 상상한다.
다들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사진을 찍는다. (나 역시)
벽에 나있는 커다란 구멍 사이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건너오고 따뜻한 빛이 스며든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좋을 낭만적인 공간이다. 건너편 구석엔 빈 무대 같은 공간이 있다. 무대라기엔 너무 작은 공간이지만 어떤 가수가 오면 어울릴까 상상도 해본다. 씽씽 밴드가 떠오르기도 하고, 새소년이 떠오르기도 한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멈추어 선다. 조금씩 삐져나온 의자들이 다시 정갈해지도록 정리한다.
사장이 분명하다. 빈티지한 재킷에 넥타이까지 차려입은 정장. 그리고 정갈한 머리와 옷매무새.
말하지 않아도 저 사람의 취향의 깊이가 반영된 공간임이 분명했다. 속으로 '와아-'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저런 사람의 취향이라면 이런 공간을 꾸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사장이라는 말보다 주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주인으로 예상되는 남자가 조명을 살짝 어두워지게 조절한다. 조명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한 센스에 다시 한번 '와아-'. 그리고 자신도 한 잔을 가져와와 카페의 가운데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는다. 책을 읽는다. 무슨 책을 읽는지 주인의 취향이 더 궁금해진다.
아마 이 공간을 그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듯하다.
취향도 나이테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쌓이는 것일까? 무취향도 취향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을 훌쩍 지나고 같이 들어왔던 사람들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내려오는 길에도 놓친 취향이 있을까 싶어 몇 번을 뒤돌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