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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쓸 거면 책 내지 마세요

내 돈 만칠천 원 내놔

by 레이첼쌤

나는 빌리기도 하고 사서 보기도 한다.

도서관에 2주에 한 번씩 가서 책을 빌려오거나, 인터넷서점에서 장바구니에 들어있던 리스트 중에서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들을 엄선해서 한꺼번에 주문한다.


사서 보는 게 열심히 책을 쓴 작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내 맘대로 밑줄 치거나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접기도 하면서 좀 더 적극적인 독서를 할 수 있어 더 좋은 것 같긴 하다. 매번 읽고 싶은 책을 모두 다 사기에는 경제적인 부담도 물론 있지만, 집에 소장할 공간이 넉넉지 않은 문제도 있다. 터져나갈 것 같은 책장을 한 번 싹 정리하고 싶어서 지난여름에는 3,40권가량의 책을 헐값에 중고책방에 갖다 넘겨버렸다. 비우고 나니 책장도 좀 헐랭해지고 살 것 같았다. 더 이상 꽂을 곳이 없을 만큼 꽉 차 들어있는 책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했다. 책 꽂을 공간 더 마련하자고 또 다른 책장을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서 깨끗이 읽고 반납하는 것은 매력적인 책 읽기 방식이다. 멋대로 밑줄을 치면서 읽을 수는 없지만, 왠지 반납기한 내에 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독서에 강제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처럼 크게 고민 없이 소장할 필요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대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기한 내에 꾸역꾸역 읽다 보니 막상 내가 직접 사서 구매해 둔 책들은 읽지 못하고 쌓여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도서관 책은 최소한으로 빌리고, 오랜만에 정말 고심해서 소장용으로 두고 싶어서 구매한 책을 드디어 읽기로 했다. 내가 소장하고자 하는 책은 아이 발달 분야 책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고 꾸준히 공부해야 할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마음에 들면 두고두고 간직하면서 재독, 삼독도 할 요량으로 발달 분야 책을 구매하곤 한다.


이 책은 제목도, 겉표지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단한 천재들도 어렸을 때에는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었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제목이 확 끌렸다. 인터넷에서 책을 살 때는 리뷰도 최소한 두세 개 정도는 읽어보고 점검하는 편인데, 하나같이 리뷰도 다들 극찬의 내용뿐이었다. 두 번의 고민 없이 바로 장바구니에 담은 책이다.


ADHD나 인지정서 행동상의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증상을 이겨내고, 힘겨운 어린 시절을 거쳐 각자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어 위인까지 되었다는 그런 스토리일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뭔가 이름도 있어 보이는 뇌발달 관련 연구소 소속 3명의 저자가 쓴 책이라고 저자소개에 약력도 화려했다.


첫 부분을 읽기 시작하는데, 인쇄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제대로 된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 아닌지 그냥 집에 있는 프린터기에서 복사해서 만든 느낌이어서 읽는 내내 신경 쓰였다. 책의 깔끔한 인쇄 상태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걸 처음 알게 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아니면, 책 내용이 굉장히 허술해서 출판해 준다는 출판사가 없어서 자체제작이라도 한 걸까? 그래서 인쇄상태가 이모양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내용이 훌륭하고 질이 높다면 인쇄 상태 그 쯤이야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일단 저자의 말투가 너무나 심하게 구어체였다. 이건 책을 내기 위해서 쓰인 글이 아니라, 누군가가 말한 내용을 녹음해서 바로 받아 적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어체의 향연이었다. 게다가 쓸데없이 느낌표 두세 개씩 한꺼번에 남발하고, 물음표도 계속 자문자답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남용되고 있었다.


독자에 대한 예의가 갖춰지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불특정 다수가 읽는 책이면 예의 바른 말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문어체의 형식을 갖추고 책에 쓰인 문장다운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아서 책을 읽는 독자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내 돈 주고 이 책을 산 거야?"


인쇄상태나 문장체와 같은 형식적인 면이 실망스러웠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유익하다면 그나마 감수하겠다. 책을 읽는 이유는 몰랐던 사실이나 새로운 정보를 알고 싶어서, 이미 알고 있는 조언들이지만 탄탄한 이론을 갖춘 전문가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뼈 때리는 조언이나 충고로 자극받고 싶어서, 아니면 느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위로와 공감이라도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목적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채워주지 못했다.


극우뇌인이라는 정체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으나,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반항적이고, 산만하고, 눈치가 빠르고, 수학에는 잼병인 사람들이 극우뇌인이의 특성이라고 한다. 어떤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결과인지는 모르겠는데 유시민, 이회창, 이정희 같은 우리나라의 유명인도 극우뇌인의 사례 중 한 명이라고 떡하니 사진까지 올려놨는데, 해당되는 분들께 허락은 받기나 한 건지 묻고 싶다.


수학에는 영 관심이 없고 아예 포기하는 게 극우뇌인의 특징이라고 했는데, 그럼 전국 학력평가 1등 출신이라는 이정희 전의원 같은 분은 수학을 못하는데 전국 1등을 했을까? 제대로 알아보고 이 사람을 예시를 든 건가 도무지 모르겠는 부분이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정말 우뇌만 죽도록 치우쳐서 극단적으로 발달한 "극우뇌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게 맞고, 그런 특성을 가진 인간의 유형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런 특성을 가진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는 게 맞는지 적절한 양육법이라도 제시해야 할 게 아닌가?


실제 연구소에 데리고 온 아이들, 치료한 아이들의 사례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는 이게 정말 있었던 이야기가 맞는지 의심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겪은 스토리가 너무나 생생하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건 그냥 단순히 몇 가지 들은 사실 정보만 가지고 살을 덧대어서 자극적인 스토리로 재탄생시킨 느낌이 들었다. 사례가 계속 제시될수록 더 신빙성은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요새 어떤 부모가 아이가 좀 반항적이고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무조건 "쥐어 패고, 주먹이 날아가게" 폭력을 쓴단 말인가. 극우뇌 자녀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을 자꾸 쥐어 패고 펀치를 날리는 부모 때문에 아이들의 뇌가 더 다치게 된다면서 자꾸 꾸짖고 호통을 치는데, 누구를 향한 호통인지 내가 더 묻고 싶었다.


책을 읽다가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한 번 읽은 책은 끝까지 마무리해야 한다는 나의 못난 의무감 때문에 끝까지 읽긴 했는데, 다 읽고 나서도 더 기분이 나빠졌다. 괜스레 화가 나고 기분이 상해서 어디에다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것도 정말 책이라고 쓴 걸까? 아까운 내 돈 17,000원이여.

아니, 돈보다 더 아까운 건 이 책을 읽자고 쓴 내 시간이다. 책 읽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내기 위해 일상에서 자투리 시간을 짜고 짜서 집중하려고 노력하는데, 다 허사가 된 기분이다.


차라리 이 책을 통해 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믿어버리는 게 낫겠다.

앞으로 책을 살 때에는 인터넷서점 리뷰만 믿지 말고, 서점에 가서 한 번 미리 꼭 훑어보고 고를 것.

블로그에서 남발되는 책리뷰들에 현혹되지 말고, 내 생각과 의지로 책을 고를 것.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을 살 때에는 한 번쯤 더 고민해 볼 것.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이런 책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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