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한탄하기
내 친구들은 다 여행을 좋아한다. 국내여행도 많이 다니는 편이지만 기왕이면 해외여행을 더 즐기는 편이다.
직장과 육아라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은 많지만, 그래도 내가 편하게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은 비록 멀리 살긴 하지만 대학 동기 둘이다.
전공이 영어인 탓에 특히나 해외여행에 대해서는 더 거부감이 없고 여유만 생기면 무조건 나가고 보자는 주의이다.
한 명은 아직 싱글이라 더 말할 것 없이 여행을 즐길만한 조건이 되고, 한 명은 결혼해서 아이가 있지만 남편도 직장이 같아서 휴가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입장이라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해외여행을 나갈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나 나는 예외다.
우선 남편일이 무리하면 휴가를 쓸 수는 있으나 스스로의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앞으로도 평생 쓰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 국가공휴일이 아니면 여행을 꿈꿀 수 없는 처지다. 나도 여행이라면 20대에 남부럽지 않을 만큼 꽤 해봤기에 아이가 돌 무렵이 되었을 때에는 호기롭게 제주여행 정도는 나 혼자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남편 없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 혼자서 아이와 단 둘이만 함께하는 여행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계획 세우고 동선 짜기 등과 같은 것은 충분히 해낼 수 있지만 짐을 들고, 밥을 먹이고, 아이 비위를 맞추는 제반의 일들을 혼자 감당하다 보면 내가 내 돈 주고 여행을 하는 건지 막일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가는 무모함은 몇 년간 내려놨다.
그러다 작년 겨울에 현실에서 도망치듯 아이와 단 둘이 제주도 여행을 갔다. 제주도 자연에서 아이를 풀어놓고 한 달 살기라도 하면 아이의 발달이 더 좋아질 수도 있다고 착각했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혹독한 제주의 겨울 날씨와 24시간 아이와 물아일체가 되어 봉양해하는 생활에 질려서 결국 일정을 계획보다 앞당겨서 끝내버렸지만.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내 친구들은 더 자주,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어쩔 수 없이 해외여행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차라리 코로나에 감사했다. 친구들이 여행하면서 SNS에 올리는 사진들을 보면 말할 수 없이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며 우울과 비탄에 빠져 늙어가는 내 처지와 달리 아직 싱글인 친구는 자기 관리를 어찌나 철저히 하는지 대학 때보다 더 대학생 같은 패션과 상큼함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친구도 아이가 워낙 건강하게 잘 자라서 장기간의 여행도 협조해주는 편이라서 데리고 다니기 수월한 모양이었다.
코로나가 점차 풀리고 해외여행도 슬슬 어렵지 않게 가는 분위기가 되니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행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낄 틈이 없다.
이번 겨울방학에 아이와 호주 한 달 여행을 갈 거라고 나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때 나는 선뜻 가고 싶다고 대답했지만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아이의 지금 컨디션으로 봐서는 그 먼 나라까지 가서 과연 여행을 즐길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가 없는 상태이다. 말 그대로 개고생만 하다가 올 가능성이 다분했다.
예민하고, 감정조절이 어렵고,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떼를 쓰고, 불안도가 높은 아이인데 시차가 다르면 수면 조절까지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는 식단이기도 하다. 매번 유기농식으로 완벽한 식단을 챙겨주지는 못하지만, 웬만하면 밀가루 음식이나 여타의 간식거리보다는 한식으로 밥에 반찬을 먹이려고 하는데 일단 해외에 가면 쉽지 않을게 뻔했다. 나는 빵 한 조각으로 배 채워도 되지만 애는 무조건 밥을 챙겨 먹여야 할 것 아닌가.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는 처지일 뿐이지, 친구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어렵게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자꾸 욕심이 나고 질투가 나는지 모르겠다.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을지, 자꾸 예전 여행 사진들만 훑어보면서 아쉬움과 그리움만 쌓아가는 중이다. 여행도 한 살이라도 젊고 건강할 때 많이 해야 한다는데, 막상 갈 수 있는 여유가 될 때에는 이미 늦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조바심도 난다.
"OO이모, 내일모레 호주 간대. 그리고 다른 이모는 하와이 가고. 좋겠지?"
아이에게 그냥 한 말인데,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괜히 딴지를 건다.
"그렇게 여행 가고 싶으면 혼자서 애 데리고 다녀와. 안 말릴 테니까."라며 친구들 여행 가는 이야기를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냐고 그만하라고 정색한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과민반응인가 싶었는데, 남편이라고 여행 가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닐 텐데 내가 너무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예민하게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내 상황을 바꿀 수도 없는데 한탄만 해서 어쩌겠는가.
그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파리의 노천카페에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멍 때리며 크라상과 카페라테를 즐길 날이 찾아오기를 꿈꾸는 수밖에.
나이 들어서도 꿋꿋이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한 두 다리를 위해 체력 관리나 하면서 언젠가 나에게도 올 그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