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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06. 2023

도넛 먹으려고 80만원 쓴 사연

대기업 홍보 이벤트에 놀아나는 1인입니다

아가씨 때부터 한섬옷을 좋아했다. 백화점 여성복 매장에서도 조금 비싼 축에 속하는 브랜드였지만 세련된 디자인에 질도 좋은 편이어서 시즌 때마다 열심히 사 입었다. 한창 꾸미고 옷 좋아할 때라 백화점과 아웃렛을 넘나들며 시즌 때마다 한 두벌씩은 득템 하기 위해 애썼고 그렇게 한동안 그 브랜드의 충성고객이었다.


그 후로도 10년 넘게 일 년에 두세 번씩은 구매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가격이 점차 올라가고 있고 내가 애정하게 된 브랜드는 이십 대 때와는 달리 트렌디한 디자인보다는 좋은 옷감을 써서 질로 승부하는 곳이라 가격대가 부담이 되었다. 얇디얇은 니트 하나에 4-50만 원은 족히 나가는 브랜드의 옷을 내키는 대로 사제 낄 수는 없는 형편이라 정말로 아주 가끔 구매한다.


그런데 며칠 전에 우리 지역에 있는 한섬하우스(한섬 옷만 따로 모아 파는 매장)에서 행사 문자가 왔다. 나는 백화점 실적 노예라 웬만하면 한 개를 사더라도 백화점을 가는 편이다.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그 노티드 도넛 팝업 트럭이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장문의 문자에는 노티드 팝업 이벤트에 대해서 아주 길고 상세하게 나와있었는데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그 기간에 가면 줄을 서서 노티드 도넛 한 번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금, 토, 일 3일간의 행사 기간이 다 끝나가는 일요일 오후에 남편이 한 번 가보자고 해서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어차피 도넛은 다 품절되지 않았겠어?" 하면서도 반신반의로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 주에 남편 생일이기도 하니 필요하다고 했던 바지도 괜찮은 거 있으면 살 겸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행사 마지막 날 오후라 그런지 주차장도 한산해서 차 대기도 편했고, 노티드 도넛 팝업 트럭 앞에 줄도 아예 없었고 오히려 썰렁한 분위기였다. 직원들이 있기에 물어보니, 도넛은 돈이 있어도 사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조건 그곳에서 한섬 옷을 사고 30만 원 이상 구매해야 도넛 4개가 든 세트 1개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속으로 생각하면서 발걸음은 상큼한 봄옷이 디피되어있는 매장으로 향했다. 남편이 선심 쓰듯 봄옷 하나 골라보라고 한다. 올해 출근하지도 않기에 딱히 새 옷이 필요하지도 않고, 나 혼자 자체적으로 옷 사지 않기 운동을 한 달째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라고, 가볍고 살랑살랑한 봄옷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매장을 보니 소비욕구가 이미 나를 지배해서 이 옷 저 옷 구경하면서 직원에게 사이즈와 색상을 물어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제 따뜻한 봄이니 좀 밝은 색상의 옷을 살법도 한데, 그냥 기본 아이템이 필요한 것 같아서 그레이 톤의 얇은 니트를 하나 사기로 했다.


남편은 전에 한참 매일같이 즐겨 입어서 교복바지가 되다시피 했던 바지가 터지는 바람에 더 이상 못 입게 되었는데, 그것과 색상과 디자인이 거의 동일한 걸로 하나 샀다.


고르고 보니 둘 다 회색의 칙칙한 톤으로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매우 기본적인 아이템이다. 그렇지만 가격은 둘이 합쳐 무려 80만 원. 물가가 정말 많이 올랐구나.


우리는 영수증을 가지고 이제 아까와는 달리 사뭇 당당한 발걸음으로 팝업 트럭을 향했다. 내 옷 영수증, 남편 옷 영수증 두 개를 자신감에 차서 보여주었더니 도넛 두 상자를 곧바로 내어준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도넛을 먹을 일인가. 30만 원 이상 옷을 사야 도넛 한 상자를 받을 수 있다니.

노티드 도넛을 못 먹어본 것도 아니다. 서울에서 친구 만났을 때 한남동 매장에서 줄 서서 먹고 여러 세트 사 오기도 했고, 애월매장에서도 먹어보았다. 그런데도 내가 사는 지역에 매장이 없으니 아쉬웠을까.



돈이 있어도 못 사 먹는 도넛, 영수증 구매 확인을 받아야만 먹을 수 있는 귀한 그 도넛.

구매욕구를 자극하는 방식도 참 다양하구나. 알면서도 당하고 마는 자본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호구가 된 기분이다.

옷을 사서 행복하긴 한데, 왠지 씁쓸한 기분이 감돈다. 노티드 도넛 안 파는 지방민의 설움까지 더해지니 도넛의 단맛만큼 씁쓸함이 추가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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