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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29. 2023

오늘은 팔불출 좀 되어보려고요

자식 자랑글주의

ADHD 아이 키우기라는 제목으로 매거진에 글을 쓰고 있는데, 훑어보면 하나같이 다 내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주된 소재다. 아이를 키우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없이 힘든 경험과 고생스러웠던 순간들이 마음속에 설움이 되어 켜켜이 쌓여버린 나 자신을 고백하고 드러내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로 쓴다고 해서 내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느냐,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아이와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구구절절 쓰다 보면 남들 앞에서 편하게 늘어놓기 어려운 말들, 바쁜 남편에게 다 털어놓기 복잡한 심경까지 풀어내게 되는데 나의 정신 건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건 사실이다. 요새는 몸이 아픈 것만큼이나 마음이, 정신이 아픈 사람도 나이를 불문하고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던가. 요즘 같은 때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 건강을 잘 지켜내야 하는 시대도 없는 것이다.


매번 아이가 나를 힘들게 하고 당황스럽게 해서 스트레스받는 이야기를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나는 브런치에 내 자식 험담이나 늘어놓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저 살자고 제 자식 못난 이야기를 다 늘어놓다니. (그래도 내가 먼저 살아야겠어서 어쩔 수 없었단다 아들아.) 아이가 자의로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태생적 한계로 인해 엄마를 남들보다 조금(?) 더 힘들게 할 뿐인데 어찌나 나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오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고, 모든 분야에서 또래에 비해 느린 것만은 아니다.

유아기에 시각적 집착 대상으로 한자에 한창 푹 빠진 적이 있어서 또래보다는 한자 습득이 더 쉽지 않을까 싶어서 한자자격시험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긴 겨울방학 동안 집에 머무는 시간도 많으니 붙잡고 한자 공부라도 매일 한 두장씩 시키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다. 자폐스펙트럼, ADHD, 지적경계 등 정신학적 질환을 가진 아이들은 질환 그 자체에서 주는 어려움보다 그 본래의 증상으로 인해 파생할 수밖에 없는 급격한 자존감 저하와 우울증이 큰 관건이 된다. 특히 유아기 때는 그 모습이 덜한데, 나이가 들어가고 학교 생활을 시작하고 또래들과 어울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단체 생활이 지속되면서 자존감 저하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진다. 장애의 경중이 심해서 아예 일반 아이들과 분리되어 특수교육을 받게 되는 처지라면 덜할 수도 있겠으나 일반 아이들과 생활해야 하는 경계성 장애에 해당되는 아이들에게는 과히 심각한 문제다.


내 아이도 사회성이 부족하다 보니 친구 사귀기에 늘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자존감 저하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7세 때부터 부쩍 느낄 수 있었다. 약물의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서 상호작용 측면은 눈에 띄게 좋아지긴 했지만, 아이의 발달 기준으로만 두고 보면 엄청난 발전이라고해도, 그 사이에 또래의 보통 아이들이 성장을 멈추고 내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친절하게 기다려 주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아이들도 열심히 성장 중에 있기 때문에 내 아이가 많이 좋아졌다고 해서 금방 또래 수준으로 올라서는 것은 어렵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어려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다뤄주기 위해서 아이가 뭐 한 가지 분야에서라도 잘하는 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시켜주고 싶었다. 비록 시지각적 자극물의 대상이라서 한자를 좋아하는 사실도 달갑지 않았지만, 주변 초등 저학년 아이들도 한자자격시험을 꽤나 많이 본다는 사실을 알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비록 언어발달지연으로 영어 사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한자시험자격증이라도 따내면 뿌듯할 것 같았다. 한자시험은 국가공인시험도 아니고 집행기관이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고 공신력이 얼마나 보장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고 아이가 뭔가에 도전했고 합격해서 본인 이름이 담긴 실물의 "자격증"을 손에 쥐게 되는 일이 자존감 향상에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준비했다.


한자자격시험장은 수능시험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난 학부모 인파를 경험하면서 신세계를 맛본 기분이었다. 시험을 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잘 봤다고 말했지만 나는 끝까지 못 미더웠다. OMR카드 답안지 작성 연습도 했지만 그날 시험장에서 긴장해서 실수했을 수도 있으니, 행여 불합격하면 아이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실패에 더 취약한데, 괜히 자존감 높인답시고 괜히 시험을 보게 한건 아닌가 또 후회가 밀려왔다.


시험 신청할 때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이던 남편도 시험 결과 발표날이 언제냐며 틈만 나면 물어본다.


드디어 발표날이 되었다. 결과는 96점이다. 합격.

50문항 중에 2문제 틀리고 다 맞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험결과를 바로 남편과 양가 어머님께 알려드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아이 칭찬 많이 해줘요. 큰 일 해냈다고. 정말 대단하다고."


그날은 우연찮게 국어 단원평가 결과도 알게 된 날이었는데, 아이가 가지고 온 시험지에는 95점이 쓰여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니 1학년 때와 다르게 확실히 학습이 늘어났다는 기분이 들고, 숙제도 많아졌고, 가장 큰 차이점은 단원평가를 자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학은 아직 큰 걱정이 없는데 국어는 늘 마음에 짐이다.


말이 늦게 트여서 화용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전체적인 언어 능력이 불안한 수준이고, 글의 중심내용이나 분위기, 글 쓴 사람의 심경 따위를 묻는 사지선다형 문제에 취약한 아이다. 국어 시험 문제 유형은 내가 다니던 때와 어찌나 다를 게 하나도 없는지 거의 그대로다. 초2가 벌써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푸냐 싶을 정도로 문제 수준이 꽤 높다. 내 아이 수준에 늘 맞춰 있다 보니 내가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1년 전에 국어 교과서에서는 가나다라 한글을 배우던 아이들이었는데 갑자기 시의 주제를 묻고 시를 읽는 방법으로 알맞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 문제가 나온다. 서술형 주관식 문제도 꽤 여러 개 섞여 있어서 집중해서 풀지 않으면 대여섯 개 틀릴 가능성도 높겠다 싶었다.


하지만 나의 아이를 향한 이런 못 미더움과 불안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이는 높은 점수를 받아왔다. 점수가 다는 아니지만, 얼마나 배우고 습득했는지 확인하는 수단으로 점수만큼 객관적인 지표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확인하게 된다. 독해력 향상 해준다는 국어 문제집을 사다가 풀리기도 해 봤다가, 센터 언어치료 수업을 늘렸다가 아이의 거부로 인해 그냥 책이나 많이 읽히자 싶어서 책육아 한다고 열을 올렸다가 하면서 갈피를 못 잡는 중이었다.


물론 한자시험도 국어 단원평가도 백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잘했다고 한없이 궁디팡팡하며 칭찬해주고 싶고 어딘가에 자랑하고 싶은 점수다. 그렇다고 이걸 동네엄마들에게 하기도, 센터엄마들에게 자랑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은데 자꾸 가족 외에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친정엄마 나이대의 분들이 자식이 큰 시험에 합격하거나 좋은 회사에 입사하는 등 큰 일을 해냈을 때 크게 한 턱쏘며 자랑하는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간다.


팔불출이라고 돌을 던진다면 기꺼이 맞아 보련다. 그간 아이의 부족한 점만 브런치에 늘어놓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걸로 상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부족함만 눈에 띄는 아이라도 늘 못하는 건 아니다. 아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믿어주고 기다려주자.

병원에서 받은 진단명이 나를 수시로 무력하게 만들어서 힘들지만, 언젠가 그 진단명을 비웃듯 아이는 잘 성장해 갈 거라고 나만큼은 믿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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