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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28. 2023

우동 먹는 엄마와 아들

기억에 남는 일상 속 한 장면

센터 치료 수업이 끝나고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다 저녁에 친구집에 놀러 가고 싶다는 둥, 저녁에 있는 가베 수업을 듣고 싶지 않다는 둥 온갖 핑곗거리를 대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심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나 즐거워하더니 일주일에 겨우 한 번 하는 가베 수업이 재미없어졌는지 매번 수업 있는 날마다 전쟁이다.


잠깐의 고민 끝에 동네에 새로 생긴 우동집이 떠올랐다. 저번 주에 자전거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동집에 들러 아이의 최애메뉴인 돈가스를 하나 주문해서 먹었는데 세상 행복해하던 아이였다.

옳거니, 오늘은 돈가스로 꼬셔봐야겠다 싶어서 아이에게 살짝 제안해 봤더니 흔쾌히 받아들인다. 8,500원짜리 돈가스 사주고 가베 수업 거부증을 사그라들게 했으니 이건 남는 장사일까 계산해 보았다. 주중에는 웬만하면 바깥음식 먹이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편인데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우리 동네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 우동집은 굉장한 인기다. 어딜 가나 한 번쯤 볼법한 평범한 분식집인데 위치도 괜찮고 새 가게라 깔끔해서인지 평일 저녁에도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은 꽉 차 있어서 웨이팅을 해야 할 정도다. 아이는 한껏 들뜬 발걸음으로 우동집을 향해 들어갔고, 키오스크에 가서 돈가스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아직 저녁밥시간이 안되어서인지 저번에 왔을 때보다는 한가했다.


가운데 넓은 테이블에는 동년배의 아주머니들 4명 앉아 왁자지껄 떠들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기다란 테이블과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가 놓여 있어서 원하면 혼밥 하기에도 편한 구조의 테이블이 있었다.

그 작고 좁지만 기다란 테이블에 두 명의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꼭 자기가 스스로 키오스크 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기를 원하는 아이의 비위를 맞춰주며 옆에 서서 바닥나기 직전인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보려고 본건 아닌데 옆을 슬쩍 쳐다봤는데 작은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두 명은 누가 봐도 엄마와 아들이었고, 아들은 자세히 길게 보지 않아도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들은 흔히 임신 기간에 초음파 기형아 검사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종류의 유전적 질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키오스크 주문을 마시고 포장한 돈가스가 나오기까지 15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이런 순간을 가장 심심해하는 아이는 식당 내부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니면서 메뉴판에 있는 음식들을 분석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나는 그 모자의 반대편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중앙에 앉아 시끌벅적 수다를 나누면서 즐겁게 식사 중인 아주머니들과 다르게 그 엄마와 아들은 조용하게 식사하는 중이었다.


별달리 할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기가 본다고 할까 봐 이럴 땐 아이 앞에서 스마트폰도 잘 보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편이다. 자꾸 음식을 먹고 있는 엄마와 아들의 뒷모습에 눈이 간다.


각자 우동 하나씩 시키고 가운데에 김밥이 한 줄 놓여있다. 뒷모습으로 봤을 때 엄마는 60대 후반에서 70대인 듯하고 아들은 20대 후반이거나 그 이상일수도 있을 것 같다. 얼굴을 언뜻 봐도 알 수 있는 어려움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과는 다르게 몸가짐과 옷차림이 굉장히 깔끔했다. 요즘 날씨에 걸치기 좋은 적당히 얇은 두께의 네이비 재킷에 면바지 그리고 가죽 구두가 눈에 띄었다. 엄마가 신경을 많이 써준 걸까 아니면 아들 스스로 저렇게 잘 차려입은 걸까 궁금해진다.


엄마와 아들은 거의 아무 대화 없이 묵묵히 앞에 놓인 우동을 먹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처럼 열심히, 그리고 조용히 먹는다. 그들에게서 뭔지 모를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엄마는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키우면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내고 잘 견뎌온 걸까. 저 정도 나이가 되면 나도 이제 체념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게 될까. 함부로 남의 인생을 상상하고 재단하는 나 자신이 우스웠지만 한 번 그들의 삶을 상상하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다.


어떠한 고난과 고통을 겪었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엄마와 아들이 나란히 앉아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기엔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지만 지금 저들의 삶이 얼마나 평안한가도 전혀 알 수는 없다.


그 순간 그 엄마와 아들이 그저 보기 좋았다.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받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왜 열심히 살기만 했는데 아무 죄 없는 나에게 이런 불행이 주어졌는지 궁금해하고 의문시 여겼던 그 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마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 아이와 함께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돈가스를 먹으러 와서 같이 음식을 나누어먹고 행복해하며 맛있게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게 아닐까 싶다. 다른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나에게 주어진 이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자.

같이 돈가스를 먹는 지금이 나와 내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봄날의 순간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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