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연애시절 남자친구였을 때부터 자기야라고 부르곤 했다. "자기야"라는 말이 낯간지러울 수도 있지만 그 시절 나는 그 호칭이 그다지 부끄럽거나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낯간지럽기도 하지만, 자기야라는 말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생각보다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장동료라든가, 동네 언니들이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부를 때 자기야 혹은 자기가 이랬잖아,라고 편하게 쓸 때도 꽤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친구에게 "오빠"라고 부를 수도 있고 그럴 때도 있었지만 지극히 현실남매 격인 친오빠가 있기도 하고 격의 없이 지내는 대학선배들도 다 오빠라고 부르니까 왠지 사귀는 사람에게 오빠라고 부르기는 싫었다. 나만의 이러이러한 이유로 사귀는 사람에 대한 애칭은 "자기"라고 정했던 것이다.
결혼한 이후로도 특별히 부를 일이 있으면 남편을 줄곧 자기야라고 불렀고 애정이 있을 때건 없을 때건 별생각 없이 쓰던 호칭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남편에 대한 최악의 호칭은 자식 이름을 따서 "누구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 엄마 세대에서 자주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남편을 너무 제삼자화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오로지 자식의 아빠로서만 불려지는 느낌이 들어서 싫었다. 나이가 더 들어도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남편에게 OO아빠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 같다.
주말에는 하루종일 같이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서로 예민해질 때가 간혹 있다. 저번 주말에는 그 정도가 평소보다 더 심했다. 주말이기에 평일보다 좀 더 편하게 늦잠 자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집은 9시, 10시까지 늘어져 자지는 않는다. 해봐야 아이도 평소보다 3,40분 정도 더 자고 일어나는 편이고 나도 8시 전후로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든 책을 읽든 평일보다 여유로운 아침을 즐긴다.
남편도 워낙 늦잠 자는 성미는 아니라서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든가 아이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는 편인데, 그날따라 몸이 안 좋은지 더 많이 잤다. 호흡기 질환으로 목이 불편했던 것 같아서 더 쉬라고 내버려 두고 그 사이에 일어난 아이를 위해 반찬 두어 가지를 만들어서 아침밥을 해먹이고 집안일을 했다. 남편은 10시가 넘어서도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전까지는 아빠 자라고 아이도 떠들지 못하게 조용히 시키면서 배려해 주었는데 왠지 10시가 넘어가니 슬슬 짜증이 났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알겠는데 그럴 거면 어젯밤에 일찍 자든지 할 것이지, 밤늦게까지 스마트폰 보는 것 같더니만 오전 내내 이렇게 자버리다니.
더 화가 나는 건 이렇게 늦게 일어나면 아이와 나는 아침밥을 먹고 다 치운 상태인데, 배가 고플 터이니 또 따로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애 챙기고 나 챙기는 것도 바쁜데 밥까지 또 따로 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아이의 성화에 겨우 일어난 남편은 본인도 좀 겸연쩍었던지 따로 배고프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주전부리를 몇 개 꺼내서 먹길래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오전은 어영부영 지나가버리고 아이랑 둘이 외출할 일이 있어서 나가게 되었다. 그 사이 남편은 집에서 두어 시간 또 쉴 수 있게 되었다. 아이랑 집에 올 시간은 늦은 점심때였는데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밥을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았다. 나는 별 생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며 서로 어떻게 할 건지 묻기만 하는 식이었다. 집에서 쉬고 있었으면 점심 어떻게 할지 아이디어라도 생각해 놓을 것이지 외식을 할 건지 배달시킬 건지 나에게 정확히 오더를 내리라는 식이다. 나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어서 별 의견이 없어서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대뜸 나에게 "신경질 좀 그만 내라"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지?" 정말 의문이 들었는데, 내 말투가 좀 귀찮다는 식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부분은 인정. 마음속으로 점심 메뉴는 집에서 쉬고 있는 네가 좀 결정해라,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마음이 말투에 묻어났던 것 같기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이가 먹을만한 메뉴로 배달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나에게도 부드럽게 대하길래 우리는 별 말없이 괜찮은 분위기에서 밥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도 오후 내내 뭔가 남편이 마음에 들었다가, 꼴 보기 싫었다가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랑 공연 보러 가는데 둘이 가도 될 것을 왜 꼭 나까지 데리고 가려고 하는지, 아이가 혼자 놀고 있는데 옆에서 유튜브 쇼츠에 푹 빠져서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는 건지, 불만이 한없이 올라오기도 했다가 아이랑 좀 잘해주는 것 같으면 다시 기분이 풀리는 식이었다.
하루종일 혼자 삐졌다가 혼자 풀렸다가 반복하는 내 꼴이 우습기도 했는데, 그날따라 유독 나는 더 예민했다. 아침부터 뭔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줘서 꼬인 채로 시작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고 그날의 마지막 설거지를 마칠 때는 왜 나는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설거지 단 한번 해준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는 남자랑 살고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되면서 슬슬 다시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다. 다행히 설거지를 마칠 쯤에는 아이 비위에 맞춰서 뭔가를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또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저녁 집안일을 거의 마무리하고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 싶을 때쯤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로 공진단 한 포를 꺼내서 먹으려던 참이었다. 나 혼자 쪽쪽 빨아먹기는 좀 그래서, 남편을 불렀다.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불렀다. "자기야~"
나의 자기야 부름에 뭔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혼난 학생이 된 표정도 아니고, 자기가 뭘 또 잘못했나 반성하는 표정도 아니고, 뭔가 알 수 없는 깨림칙한 표정이 되어 다가오더니 하는 말.
"왜 또 나 뭐 잘못했어? 나는 네가 그렇게 부르면 무섭더라."
"..."
영양제 혼자 먹기 그래서 같이 먹자고 부른 거라고 나의 순수한 의도를 피력했더니 그제야 안심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포 받아먹는 남편.
내가 하루종일 자기를 감시한다고 느낀 걸까.
연애 때는 오빠라고 부르는 것보다 자기야라고 불러주는 게 그렇게 좋다면서 애교스럽다고 그러더니, 이제 10년 넘게 살고 나니 자기야라고 부르면 무섭단다.
어쩌다 나는 자기야라는 말로 남편에게 겁을 주는 악처가 됐을까.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주말 내내 아이랑 잘 놀아주는지, 집안일은 눈곱만큼이라도 좀 도와주는지 계속 감찰하는 비사감처럼 굴었던 것은 아닌가 살짝 반성해 본다. 그래봤자 평일의 집안일과 육아의 99퍼센트는 내가 전담하지만, 주말만큼은 조금 퍼센트를 낮춰서 80퍼센트 정도만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이기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평일의 나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까.
이런 내 입장과 속마음을 남편에게 대놓고 피력해 봤자 어차피 돌아올 말은 나는 그럼 평일에 펑펑 놀았냐, 일하느라 얼마나 힘들고 고된데라는 반응일 게 뻔하니까 말로 내뱉지는 않는다.
다음 주말에는 좀 덜 삐지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하루종일 내 눈치만 보느라 주말이 힘들었다고 토로할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