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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난 후 변화

내가 더 다정해졌다고 한다

by 레이첼쌤

남편의 일터에 직원이 개인사정으로 퇴직하고 여직원 자리가 비었다. 괜찮은 직원 구하기가 보통일이 아니라 남편은 진작부터 이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 구한 직원들은 하나같이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특별한 학위가 있어야 하는 일도 아닌 관련 직종 경력만 있으면 쉽게 적응할 수 있는데도 어리고 당차보이는 직원들은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 보였고 열심히 하려는 태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연히 업무 습득 속도도 느렸다. 우리가 우연찮게 그런 사람들만 만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를 받던 남편은 새 직원 선발을 당분간 포기해 버렸다.


이러한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나라도 시간 날 때 잠깐이라도 가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오전 몇 시간이라도 가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쪽 일에 관한 한 전혀 문외한이라 처음부터 배워야 하지만 중요한 업무 빼놓고 잔심부름이나 자질구레한 일이라도 해줘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어쩌다 보니 남편 업장에서 두세 시간 동안 바로 곁에서 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그전에도 한 번씩 와본 적은 있지만 볼일이 있거나 해서 잠깐 들르는 식이었지 이렇게 두 시간 이상 상주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편이 퇴근할 때마다 파김치가 되어서 힘들고 스트레스받았다고 토로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공감하지는 못했다. 불쌍하고 힘들었겠다는 마음은 분명 들었지만, 내가 남편이 하는 일을 지켜본 적은 없기에 그랬던 것 같다. 겉으로는 그래 피곤하지, 힘들었겠다 말했지만 속으로는 "나는 너 일할 때 놀기만 했니, 나도 일했고 애보고 살림하느라 힘들고 지쳐, 육아와 살림이 얼마나 힘든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지?"이런 식이었다.


내가 출근할 때는 그런 마음이 더 심하게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남편보다야 워킹맘이 더 힘들지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암암리에 해왔던 것 같다.


도와준답시고 갔지만 내가 제대로 일을 모르니 실수연발에 하는 일은 제대로 없었고 결국 곁에서 남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말할 수 없이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저 많은걸 머릿속에 다 외우고 있는 거야? 대단하네."

"집에서와는 달리 저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도 있었네."

"어떻게 저렇게 빨리 일 처리를 하는 거지, 오 몰랐던 모습이야."

"바쁠 땐 정말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정신없구나."

"프로페셔널하네. 빈틈이 없고 꼼꼼하네. 저렇게 완벽주의였어?"


결국 마지막에 든 생각은,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고생하는구나."였다.


처자식이 없었어도 자신의 직업이니 일은 물론 했겠지만, 가장이라는 무게와 책임감이 있기에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휴가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퇴근하고 집에서 마주하는 모습은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일, 즉 목이 다 늘어난 잠옷을 입고 먹고 마시고 자고 씻고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을 보다가 직장에서 본인 일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봐도 남편이 저런 생각이 들까? 하긴 일의 종류와 성격이 워낙 다르니 비교불가지만.


처음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온 그날 저녁에는 남편이 짠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 집에 먼저 왔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우리 남편 정말 고생 많구나. 왜 여태 몰랐을까."


아무리 공부 잘해서 어렵사리 전문직이 되었어도 그 일이라는 것이 책임이 많이 따르기에 결코 쉽지도 않고 남들이 말하는 그저 탄탄대로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탄탄대로도 본인의 노력과 인내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늘 퇴근하고 지친 얼굴로 오는 남편에게, 오늘 하루는 아이가 얼마나 내 속을 썩이고 애가 떨어지게 만들었는지 먼저 토로하는 게 급선무였고 빨리 밥 먹고 아이랑 십 분이라도 더 놀아주기를 바랐다. 왜 다른 남편들처럼 좀 적극적으로 아이랑 진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잘 놀아주지 못하는 건지 속으로 불평했다.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야 아이의 부족한 사회성도 언어 자극도 올라오는데 그걸 몰라주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하기도 했다. 항상 아이 걱정만 하는 나 자신이, 내 마음이 우선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퇴근한 남편이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기라도 하면 나도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토라져있었다. 내가 옹졸했다.


남편은 요 며칠 내가 자기 일하는 걸 보더니 조금 달라졌다고 했다. 갑자기 더 다정해졌다고 한다. "네가 드디어 남편 얼마나 고생하는지 눈으로 보고 알게 됐구나." 하면서 말이다. 나는 애써 부정했지만 속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동안 나는 나 힘든 거에만 정신이 팔렸는지,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면 현관문으로 나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진심으로 고생했다고 말해주지 않았는지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제는 퇴근하는 남편에게 현관문으로 뛰어가서 고생했다고 안아주고 힘들었으니 나한테 업히라고 부엌까지 업어다 주겠다고 오버스럽게 행동했다. 왜 이러냐고 하면서도 싫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진작 좀 이렇게 해줄걸, 고생했지, 힘들었어 말하는 거,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아주 예전에 어디선가 아내가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남편의 모습을 직접 보고 오열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봤던 기억이 났다. 항상 일에 대해 말로만 듣다가 막상 노동의 현장에서 땀 흘려가며 일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아내는 감정이 복받쳐 올랐고, 방송에 그 모습이 집중적으로 나왔다.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남편에게 더 다정해졌을 뿐 아니라 이 사람을 더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나에게 큰 실망감을 줄 정도의 실수를 하고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껴서 이혼 생각까지 했지만, 그 일조차도 이제는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하루종일 일에 얽매여 있다 보면 스트레스받고 힘이 들기도 하고 아내는 매일 아이 걱정만 하고 본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니, 일탈하고 싶었겠지 하는 마음이 든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실망감이긴 하지만, 뭐랄까 그에 관해서도 조금 더 관대해진 기분이다.


만약 지금 남편이 너무나 꼴 보기 싫고 밉다면 일하는 곳에 가서 한 번 봐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두가 나처럼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가까이 일하는 걸 보기 어려운 직업도 있지만, 보고 나면 뭔가 달라진다. 굳이 수산시장처럼 몸으로 일하는 피 튀기는 노동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어떤 일이든 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배경사진 출처: tvN 드라마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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