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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pr 19. 2023

내 아이를 좋아한다는 여자친구가 생기다니

사회성 느린 아이 발달 기록

방과 후 수업을 다녀온 아이가 갑자기 나에게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엄마, 서준이가 그러는데 한가희가 나 좋아한대."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아이가 무심히 내뱉은 이 문장을 오롯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나는 몇 가지 면에서 아이가 말한 이 짧은 문장을 가지고 깊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다음과 같다.


첫째, 아직은 또래와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고 믿고 있는 내 아이가 방과 후 수업에서 "서준"이라는 다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방과 후는 과학로봇을 수강 중인데, 다른 아이들처럼 방과 후 수업에 가서 친하지만 다른 반이라서 일과시간에 만나기 어려운 친구들을 만나 놀고 친목을 다지는 목적이 전혀 아니다. 아이는 오로지 그냥 그 수업이 재미있고 관심 있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데에만 의미를 두고 있지 방과 후 수업에 가서 다른 반 친구들이랑 다른 학년 형, 동생들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장난을 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저 그 시간의 과제를 해내고 그다음 진도를 나가는 데에만 급급할 뿐이다. 그런 아이가 방과 후 수업시간에 굉장히 외향적이고 수다스럽고 낫낫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 서준이라는 친구와 수업 내용이 아닌 다른 여자친구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충격이지만.


둘째, 내 아이는 여자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는 남자아이다.

작년에도 이런 종류의 글을 쓴 적이 있긴 한데, 고슴도치도 제 어미 눈에는 이쁘다고 내 자식이까 잘생겨 보이고 훈남으로 보이는 극히 엄마의 주관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내 아이가 못난 외모는 아니다. 옷과 신발도 신경 써서 깔끔하게 입히는 편이고 그 외 몸가짐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해서 밖에 내보내는데 여자아이들에게는 인기가 통 없다는 사실이 조금 속상했다. 속상하다기보다 약간 의아했다는 감정이 더 맞는 말인 것 같은데, 내가 봐도 초등 저학년 여자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남자친구는 키도 크고 얼굴도 깔끔하게 생긴 데다가 운동신경이 매우 좋고 장난기보다는 다정함을 지닌 스타일이었다. 그 필요조건에 내 아이는 해당사항이 없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아마 여자아이들과 그다지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작은 일에 울거나 부족한 사회성으로 인해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는 것이 여자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내 아들은 호감형으로 자라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은 그런 스위트한 훈남으로 자랄 거라는 내 기대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순순히 접어야만 했고, 정말로 그런 부분에 대해선 아무런 기대도 바람도 없이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방과 후 수업의 그 말 많고 성격좋기로 유명한 남자친구 서준이가 갑자기 우리 집 같은 동 옆 라인에 사는 한가희라는 여자친구가 내 아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전해준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기억해서 집에 와서 나에게 들려주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의 감동을 받았다. 친구와 뭔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그 말을 기억하고 전달해 주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너무나 반가웠다. (느린 아이를 키우는 것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사소한 일에 감사하게 된다는 법이다)


하지만 아이에게서 이 말을 듣고서도 나는 정말로 믿기지 않아서 며칠 후에 동네에서 서준이를 마주쳤을 때 다시 한번 더 직접 물어보았다.


"서준아, 정말로 한가희가 우리 OO이 좋아한다고 말했어?"

"네, 정말이에요. 우리 반 교실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요."


가희라는 친구랑 내 아이는 다른 반이기도 하고 딱히 함께 논 적도 없고 같은 동에 살기에 등하교 시간에 몇 번 마주친 것뿐인데 언제 내 아이에게 호감을 가진 걸까. 너무나 궁금해졌다.


아이도 누군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그 여자친구에게 관심이 가는지 가희를 우연히 만나면 굉장히 의식하는 듯했다. 하지만 가희에게 가서 직접 너 우리 아들 좋아하니,라고 묻는 건 정말 오지랖인 것 같아서 간신히 자제했다. 그저 지나가다 마주치면 이전보다 더 반갑게 인사만 했다. 가희는 내 아들을 정말 좋아해서 자기 반 친구들에게 공언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에서 마주치면 생콩 한 표정으로 들릴 듯 말 듯 작게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비록 내 아이와 제대로 놀고 소통해 본 적은 없지만, 그저 호감을 가져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신기하던지.





코로나가 거의 종식되니 학교 체육대회도 정식으로 운영되어서 학부모들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며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담임 선생님, 친구들과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다른 엄마들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가기는 어려운 자리였다. 오전에는 약기운으로 집중력이 올라오니까 선생님 지시에는 잘 따르고 집중력은 괜찮을 것 같지만, 사회성이 부족해서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끼지 못하는 모습만 보게 될까 봐 많이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각오했던 것보다 아이는 반 친구들 사이에서 그다지 소외되거나 외톨이처럼 겉도는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겉모습이긴 하지만 옆의 남자친구와 한 두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뒤에 친구가 건들면 웃으면서 반응하기도 했다. 언뜻 겉으로만 봤을 때는 "아무 문제없는 아이"처럼 보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느린 아이들이 보통 그렇듯 내 아이도 감각통합수업을 장기간 받아야 할 정도로 대근육과 소근육 발달이 원활치 않아서 힘들었고 아직도 운동신경이 많이 향상되지 않았다. 한창 치료받던 시기에는 달리는 포즈도 조금 특이하고 어색했다. 지금은 달리는 포즈는 많이 자연스러워졌지만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아이는 자신이 운동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운동회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결국 5명씩 하는 달리기 시합에서 무려 4등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5등을 차지한 아이가 달리다가 신발이 벗겨져서 어쩔 수 없이 꼴등을 하게 되었고 그 덕에 아이는 꼴찌를 면했다.


초2밖에 안 되었어도 운동 잘하는 남자아이들은 체육대회에서도 눈에 띄었다. 달리는 포즈도 어찌나 멋지고 빠른지 얼굴에 승부욕이 가득해서 진짜 남자다운 면모가 보이기까지 했다. 그 녀석들은 여자친구들에게 인기도 많다는 걸 알고 있다.



이번 주 센터 수업 피드백에서는 게임에서 지면 못 견디고 울거나 하는 행동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벌칙을 받거나 본인에게 불리한 상황이 펼쳐지면 받아들이기 힘겨워한다고 했다. 그리고 게임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걸리지 않은 사람을 나머지 친구들과 눈빛 교환을 나누면서 이제 타깃을 저 친구로 하자고 암무적 동의하에 진행할 수도 있는데 그런 미묘한 상황에 대한 눈치가 아예 없는 편이라고 했다. 이런 면을 길러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런 복잡 미묘한 사회적 상황에서의 눈치를 도대체 부모가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이건 다분히 또래들과 계속 부딪히고 함께하면서 길러나가야 하는 영역인 듯한데 말이다.


보통 아이들은 인위적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언어, 인지 발달과 함께 자연스럽게 발달되는 사회성이 언어 지연과 주의력 부족으로 늦어지다 보니 억지로 1,2년 지연된 채 억지로 끌어올리기가 이렇게나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아이도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그런대로 오롯이 마주하고 극복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개미 눈물만큼이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오늘 하루도 긍정의 마음 한 스푼을 나에게 주입해주고 싶다. 느리지만 아이는 자란다,는 말은 정말 진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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