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부 이야기
그 여자는 명품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20대에 처음으로 구찌 쇼퍼백을 샀을 때 잠 못 이루던 설렘을 여전히 기억한다. 대학 때 유행하던 MCM은 명품이라 부르게 조금 애매한 브랜드이기에, 그 구찌 가방이 여자의 공식적인 첫 명품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후엔 몇 년에 한 번씩은 명품 가방을 사게 되었다. 마크 제이콥스, 알렌산더 왕, 끌로에, 지방시 가방 등을 하나씩 사모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육아에 전념하면서 한동안은 명품이라는 이름의 딱딱한 가죽가방보다는 천으로 된 기저귀가방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아기가 기저귀와 분유를 슬슬 떼고 어린이집을 갈 때 즈음, 여자의 눈에는 슬슬 다시 명품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도 그 여자 못지않게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꼭 명품을 좋아한다기보다 돈을 쓰는 소비 행위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자기 취향과 소비 패턴이 분명했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감당할만한 경제적 능력도 갖춘 편이었다. 여자가 문화센터에 애 데리고 다니다가 친해진 엄마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 이야기 따위를 하면 허세 부리지 말라고 일축하기보다는 한 번쯤 검색해 보고 살 수 있는 여력이 되는지 확인해 보는 남자였다.
그렇게 해서 여자는 평생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샤넬백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샤넬백을 샀을 땐 어찌나 감격에 겨웠던지 수십 번 인증숏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오백만 원 넘는 가방을 들게 되어서 너무나 영광스러웠고,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자기를 더 쳐다봐주는 것 같았다. 샤넬 로고가 영롱하게 박힌 작고 부드러운 가죽의 단단한 그 가방은 여자에게 꽤나 소중한 재산처럼 느껴졌다.
최고의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의 가방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더 욕심부릴 것도 없었다. 아주 가끔 생일이나 이벤트가 있을 때 남자가 사주는 명품 신발에 만족했다. 한동안은 아이 키우며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고 남자와 여자 둘 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옷이나 액세서리 소비보다는 집과 차에 대한 투자를 우선시 여겼다.
코로나가 한창 세상을 들썩거리게 하면서 보복 심리의 소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을 못 가니 그에 대한 소비가 국내 백화점 명품 매장으로 향한다는 기사들이 올라왔다. 샤넬보다 더 좋은 브랜드가 있나 싶었는데, 에르메스라는 더 비싸고 고급스러운 브랜드가 점점 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여자도 에르메스가 우아하고 멋있어 보이긴 했지만 감히 넘사벽이라 생각했다.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그 브랜드는 돈이 있어도 사기 힘들었다. 백화점에 가면 웨이팅은 기본이고, 정말 사람들이 많이 선호하는 백 종류는 구매 실적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들었다. 그 브랜드 내에서 상대적으로 대중 입장에서 접근 가능한 가격의 가방 몇 가지는 더 구하기 힘들었다. 들어오는 족족 몇 초만에 팔려나간다고 했다.
명품백 살 돈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에르메스를 들고 있어서 그 여자만 없으면 안 된다든가 하는, 당장 에르메스 백을 들어야만 할 이유도 없었으니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살 필요도 없었다. 여자도 욕심내지 않았다. 자기 주제를 알고 적정한 소비를 할 필요가 있다며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말자며 마음가짐을 다지곤 했다.
어느 날 지인들과 술자리에 나갔던 남편이 새벽이 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는 밤새 기다렸다. 결국 남자는 아침나절이 다 되어서야 아직 술이 덜 깬 몰골로 현관에 들어섰다. 외박이었다.
그 일로 몇 날 며칠을 싸우고 울고 불고 이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밤새 어디서 무얼 했느냐며 생각만 나면 여자는 남자를 다그쳤고 처음엔 미안해하던 남자도 받아주다가 나중엔 되려 더 화를 내기 십상이었다. 감정이 사그라들면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라며 실수였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여자에게 빌기도 했다. 한 번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봐주고 넘어가기로 했다.
불과 그 사건이 채 잊히기도 전에 몇 달 지나지 않아 또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여자는 또 울며 불며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쳤고 남자는 또 빌었다. 이혼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아이 데리고 외국으로 갈 테니 기러기아빠 하면서 혼자 즐기고 살라고 협박했다. 돈이나 꼬박꼬박 붙이고 혼자 좋아하는 술 실컷 마시고 여자 끼고 놀면서 즐기라고 그게 소원이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항상 큰 싸움이 벌어지면 그렇듯, 처음 며칠은 싸우다가 점점 싸움에 지쳐 대화가 없어진다. 그들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화 없이 일주일을 보냈다. 일주일이 이주일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나눠야만 하는 최소한의 대화만 한채 만채 하며 지냈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여자는 이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자식을 생각하면 한 번 더 참는 게 나아 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놔봐도, 남편이 바람나서 외간 여자랑 살림 차린 것도 아닌데 이혼은 아니라고 남자들 살면서 다 그렇게 한 두 번 속 썩인다고 모른척하고 넘어가라는 조언이 많았다. 여자는 결혼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혼자 외롭게 살았으면 살았지, 결혼해서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고 상처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이 흐르니 처음의 그 상처받은 감정도 점점 무뎌져 남자와도 한 두 마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남자는 어느 날 퇴근길에 커다란 주황색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별말 없이 너 주고 싶어서 샀다며 여자에게 건넨다. 그 순간 여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며 설렌다. 백화점에서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려도 사기 어려운데 어떻게 구했냐고 남자를 다그친다.
냉랭했던 둘의 분위기는 어느새 사그라들고 가방을 조심스럽게 언박싱하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유심히 구경한다. 남자는 웃돈을 주고 판매한다는 리셀러샵에서 어렵게 구했다고 설명한다. 여자는 어쩌면 중고차 한 대 값보다 더 비쌀지도 모르는 그 가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보고 또 보고 또 닳도록 들여다본다.
거짓말처럼 이 가방 하나에 남자에 대한 실망감, 원망, 배신감 같은 게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그들 살림이 몇 천만 원짜리 가방을 마음 놓고 살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이미 환해진 표정으로 남자를 애써 다그친다.
막상 그 유명하고 엄청난 값어치의 백이 자기 가방이 되었지만 여자는 들고나갈 데가 없음을 실감한다. 가끔 백화점에 가긴 하지만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주로 다니는 데는 아이 등하원이나 동네 마트가 전부다. 꾸미기 좋아하고 소비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나기 어렵다. 동네엄마들을 카페에서 자주 만나긴 하지만, 그다지 명품에 큰 관심이 없다. 그런 분위기에 혼자 그 비싼 백을 들고나가면 너무 오버일 것 같아서 내키지 않는다.
주변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그 가방 자체가 여자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들고 다녀도 자기 가방이 아닌 기분,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기분에 사못 사로잡힌다. 그전에도 명품백은 몇 개 들어봤지만 이 정도로 비싼 몸도 아니었고 들고 다니면서 신줏단지 모시듯 하지도 않았다. 요즘 길거리에서 몇 백만 원짜리 가방은 들고 다니는 여자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에 여자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 가방은 달랐다. 자본주의 사회에 돈만 있으면 아무나 원하는 물건을 사서 가질 수 있다지만 왠지 그 여자에게 그 가방은 사치처럼 여겨졌다.
결국 일 년이 다 돼 가도록 가방을 든 건 다섯 번도 채 되지 않았다. 처음엔 남자도 왜 어렵게 사준 가방을 들지 않느냐고 다그쳤지만 나중에는 아예 포기했다. 그래봤자 여자는 늘 자기가 들던 가볍고 편한 PVC재질의 가방만 즐겨 들었다.
어느 날 밤 여자는 진지하게 남자에게 부탁했다. 저 가방 갖다 팔 수 없느냐고.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살 때는 어떻게 샀지만 저렇게 비싼 가방을 어디서 어떻게 파는지도 모른다고 그냥 들고 다니든지 들기 싫으면 버리라고 화를 냈다.
한 번 팔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여자는 하루라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저기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명품 카페를 알아본 뒤 괜찮은 중고매입업체를 알아봤고 남자에게 알렸다. 처음엔 남자도 내키지 않아 했지만 구입할 때 가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에서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 돈이면 꽤 큰 금액이고 당장 세금 문제로 현금 흐름의 압박을 받고 있는 시기였는데 한층 마음이 편해질 만한 액수의 돈이었다.
둘은 당장 그 가방을 팔기로 했고 일사천리로 업체에 넘겨버렸다. 가장 선호하는 색깔에 사이즈에 상태도 에이급에 가까운 가방이었지만 적지 않은 금액이기에 금방 팔리지 않았다. 한 달 가까이 기다린 끝에 가방은 팔렸고 현금이 통장에 들어왔다. 여자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 이 정도 금액의 가방은 사지 않겠다고.
여자는 쇼핑과 명품을 좋아하고 꾸미기를 좋아하지만, 아무리 유행이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이라고 해도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고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아마 자신이 백억 대 부자가 되어도 그 가방을 다시 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돈만 있으면 누구든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꼭 어떤 "급"이 되어야 대단한 "급"의 백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비 오는 날이나 땅바닥이나 길바닥 벤치 위 아무렇게나 편하게 내던져두기 불편한 가방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로 한다.
벌킨을 떠나보냈지만 여자는 아무런 후회가 없고, 오히려 값어치를 인정받아 그만큼의 현금이 생겨서 더 행복할 뿐이다. "나 벌킨 한 번 들어본 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치면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