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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n 12. 2023

엄마의 욕심으로 얼룩진 피아노 콩쿨

그럼에도 수상의 기쁨은 큽니다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피아노와 태권도 학원을 보냈다. 평범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 코스에 다니게 될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아이는 의외로 잘 해내주었다. 단, 태권도는 1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사범님도 친절하고 잘해주는 분이셨지만, 기본적으로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회성이 없는 아이에게 태권도장은 학교 이외에 또 다른 스트레스만 안겨주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내 욕심이었음을 인정하고 태권도는 끊어주었다.


그래도 피아노는 군말 없이 다니는 편이었다. 나도 매일 가는 학원이 한 군데쯤은 있기를 몹시 바랐고, 피아노는 이론 시간만 빼면 개인 연습은 각자 연습실에 들어가서 하니 아이들과 부딪힐 일도 많이 없어서인지 큰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 듯했다. 피아노에 보내고 몇 개월 되지 않아 아이가 절대음감이란 걸 알게 되었고, 피아노 자체보다는 음악 이론 공부를 상당히 좋아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전 세계적인 활약 소식이 전해졌을 땐 피아노를 진로로 정해볼까 하는 당치도 않은 꿈을 품기도 했다. 그 꿈이란 전적으로 아이의 의사가 아닌 나와 남편의 짧은 착각에서 착안되었던 것이다.


주의력이 약한 아이들은 특히나 무엇을 하든지 금방 질려하는 특성이 있기에, 뭐 하나를 하더라도 진득하게 오랜 기간 해주기만 하면 고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진로가 되든 취미가 되든 그건 나중에 아이가 선택할 일이고.


지난 겨울 피아노 학원에서 상반기 피아노 콩쿨대회 신청을 받는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막 체르니 100을 들어간 아이가 무슨 콩쿨이야 싶어서 처음엔 무시했는데, 점점 내 마음속에서 한 번 시켜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피아노학원 가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을 정도로 나름 성실하게 다녀주기도 했고, 자존감이 낮은 아이인 만큼 큰 상은 바라지 않더라도 무대 경험을 한 번 해보면서 자신감도 한껏 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피아노 콩쿨이 뭔지도 잘 모르고 아무 개념이 없는 아이에게 상기된 목소리로 "대회 한 번 나가볼래? 너무 멋질 것 같아."라고 몇 번 물어본 뒤 덜컥 대회 신청을 하고 말았다.



이제 체르니 100 들어간 원생이 대회 신청을 하니 원장님도 약간 놀라는 눈치였지만, 내가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후라 아이가 손가락 힘이 약한 편이지만 한 번 시켜보겠다고 하셨다. 6월이 대회인데 3월부터 슬슬 준비 기간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기존에 하던 이론과 실기 진도를 하면서 대회곡도 같이 치기만 했다.  전보다 연습 시간에 몇 십분 늘어났기에 아이도 별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문제는 본격적으로 대회 연습에 들어갈 때부터 시작됐다. 보강 레슨이 들어가서 주 3회는 두 시간씩 대회곡만 오롯이 연습해야 했고 나중에는 토요일 오전까지 나가서 두 시간 연습해야 했다.


아이는 이 기간을 너무나 힘들어했다. "피아노 대회 괜히 신청했어, 취소해 줘, 안 할래."라는 말을 수 천 번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힘들었는데, 사실 아이를 달래면서도 별달리 명분이 없다는 게 내가 가진 아이러니였다. 애초에 아이가 대회 나가고 싶다고 먼저 말한 것도 아니고, 원장님이 아이에게 소질이 있으니 이번 대회 데리고 나가고 싶다고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었고, 돌이켜보면 순전히 내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아이가 진도도 쭉쭉 나가는 편이고 조금 좋아하는 것 같으니 냅다 신청해 버린 것이다.


"네가 먼저 나간다고 했잖아, 그러게 처음에 왜 나간다고 했어?!"라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으니 아이를 달랠 때마다 나는 해줄 말이 별로 없어서 궁색했다. 잘해보자, 잘할 수 있을 거야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구슬리는 나 자신을 여러 번 마주했다.


대회를 목전에 앞둔 어느 날 아이는 눈이 시뻘게져서 집에 오자마자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원장 선생님이 이렇게 치면 대회 나가서 꼴등 할 거래, 원장님은 나만 미워해, 나한테 자꾸 큰 소리로 화내. 엄마 너무 힘들어, 대회 취소해 줘... 엉엉.."


안 그래도 피해의식이 큰 아이라 누군가가 자기에게 조금 화를 내거나 목소리가 달라지면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adhd 약 부작용인지, 아이의 기본 성향인지 모르겠지만 그 문제로 의사 선생님께 상담까지 받은 적이 있다. 보통의 아이들도 연습하다가 선생님께 혼이 나거나 지적을 받으면 울기도 하겠지만, 내 아이는 더 크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더 상처받고 못 견뎌하며 힘들어한다. 한 마디로 연약하디 연약한 유리멘털을 가진 아이다.


내가 참 욕심을 부렸나. 이렇게 마음이 여리고 멘탈이 약한 아이를 데리고 대회를 내보내겠다고 했으니. 후회가 밀려왔다.


원장님과 긴 대화를 나눴다. 피아노 선생님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대회에 내보내려면 어느 정도 곡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실력을 갖추게 하도록 지도하는 게 선생님의 책임이자 임무이고, 그 과정에서 아이의 주법을 고치고 개선시키려다 보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우도 있는데 아이가 너무 울어서 그날은 지도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친구들 혼낼 때보다 훨씬 약하게 지적한 건데 아이가 눈물 콧물 짜면서 울어서 난감했다고 하셨다. 아이고, 네네 하면서 원장님께 아이의 성향을 이해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렸다. 감사하게도 그 후로는 아이에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고쳐야 할 점만 부드럽게 이야기해 주시면서 지도해 주셨다.


대회 직전까지도 자꾸 나가기 싫다고 취소해 달라는 아이를 붙잡고 용기와 힘을 불어넣는 말들을 앵무새처럼 되뇌었지만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마지막에 그나마 나와 아이를 살린 건 아이가 무척 좋아하고 따르는 친척형아들이 대회날 응원하러 와준다는 소식이었다. 멀다면 먼 지역에 사는 조카들이 사촌 동생이 첫 대회에 나가는데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원 스케줄까지 조정해서 와준다고 했다. 할머니도 손주들 데리고 온다고 했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서 아이의 첫 대회를 온 마음으로 응원하게 됐다.


형아들이 와준다고 하니 아이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면서 그때부터 이상하게 더 연습에 진지하게 임하는 듯했다.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드디어 대회 당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예약해 둔 미용실에 가서 아이돌 같은 올백머리도 하고 분주하게 대회를 준비했다. 그 가운데 아이는 평소보다 더 심한 틱 증상을 보였다. 소리를 낸다거나 남의 눈에 크게 띄는 틱은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인데 그날 따라 더 심하게 눈에 띄었다. 자꾸 혀를 날름거리고, 얼굴을 밉게 찡그리며, 침 삼키는 소리를 몇 초마다 한 번씩 냈다.


내가 애를 잡고 있나.


그냥 즐기면서 피아노 배우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데 대회 출전까지 시켜서, 약 부작용으로 틱 증상까지 오는 아이를 어쩌자고 콩쿠르까지 내보내서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인가. 왜 처음부터 잘못된 욕심을 부린 걸까.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행복배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드라마 주인공 오유진은 SNS 인플루언서이고, 아이들 잘 키우면서 행복한 가정을 일구는 가정주부로 나온다. 그러나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심하게 집착하고 완벽함을 추구한다. 딸아이가 영어유치원에서 하는 뮤지컬에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자신의 바람을,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로 꼭 주인공이 돼 보자고 주인공이 되면 너무 멋질 것 같다고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그 다정한 표정 뒤에는 왠지 모를 섬뜩함도 느껴졌다. 그러고는 남몰래 뮤지컬 개인 레슨을 시키면서 엄청난 연습을 시키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 엄마 참 무섭다, 강남 엄마들은 다 아이에게 이렇게 시키나, 엄마가 아이에게 저렇게 자기 욕심을 부리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 보니, 딸에게 뮤지컬 주인공 해보자고 가스라이팅하는 그 섬뜩한 장면의 엄마 모습이 나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나 싶다. 나도 애초에 신청할 때 아이에게 피아노 대회 나가서 상도 받고 하면 너무 멋질 것 같다고, 그러니 우리 한 번 나가보자고 했다. 아이의 의사와 의견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아이가 연습을 힘들어하고 못 견뎌하니 그 모습을 보며 또 스트레스를 받고 왜 애가 멘털이 이렇게 약한 건지 실망하고 있는 나다.


나는 화려한 드라마 주인공처럼 영어유치원이니, 인플루언서 활동 같은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소박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를게 일견 무엇이란 말인가.






피아노 대회에는 학년별로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출전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을까. 그리고 다들 어찌나 멋지게 잘 연주하는지, 우리 아이는 그냥 아무 상이나 하나 준다면 덥석 받아가면 다행이다 싶었다.


아이의 차례가 다가올 때쯤 되니 잔뜩 긴장하고 얼어서 무대에 올라가 실수하고 틀려버리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이 내 온몸을 마비시켰다. 긴 기다림 끝에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서 힘 준 머리를 하고, 진짜 피아니스트처럼 나비넥타이에 정장을 입은 아이가 무대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땀이 나고 숨이 막혀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짧은 곡 하나가 연주되는 시간에 세상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나 수능 볼 때도 이렇게 떨렸었나?


아이는 큰 실수 없이 연주를 끝냈고 꽃다발을 들고 다 같이 기념사진 촬영하면서 성황리에 끝이 났다.


몇 시간 후에 나온 결과는.. 생각지도 못한 큰 상이 었다. 아이가 해내주었구나.


울면서 대회 안 나간다고 떼쓰고 화를 내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장하고 대견하고 그저 고맙다. 온 가족에게 수상 소식을 알리며 아이를 칭찬하고 안아주고 엄지 척을 수 백번 날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으로 다짐한다. 다시는 대회에 데리고 나가지 말아야지.


아이가 먼저 하고 싶다고, 너무 나가보고 싶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도전해보고 싶다고 하는 거 아니면, 절대 내 멋대로 신청하지 말아야지. 대회 경험과 수상보다 중요한 건 내 아이의 마음의 편안함이니까. 나와 내 아이의 소중한 일상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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