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첼쌤 Jun 09. 2023

사회성, 기계적으로 학습한다고 덧나니

ADHD 아이 키우기

저번주는 재량휴업일에 현충일까지 더해지니 단기방학이라도 불러도 좋을 만큼의 4일간의 연휴였다. 5월을 해외여행에 국내 호캉스에 연달아 보내고 나니 일말의 죄책감이 들어서 어디 근사한 곳으로 여행 갈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웬만한 계획 없이는 시간이 영 흐르지 않을 것 같은 4일간의 연휴를 아이를 데리고 뭘 할지 고민만 하다가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버렸고 결국 시작되고 말았다.


나름 이런저런 소소한 계획을 세워보았다. 아이가 친한 친구가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만나자고 약속하고 만날 수 있는 상태라면 이렇게까지 걱정이 안 될 것 같다. 사실 초2정도 되면 이제는 엄마들 간의 미리 합의와 약속하에 만나서 같이 놀이터나 체험 시설에 데리고 가는 게 별 의미가 없어진다. 대다수가 스마트폰이 있으니 자기들끼리 만날 약속을 하고 만나서 놀이터에서 한두 시간 신나게 놀다가 들어온다. 내 아이의 사회성도 티 안 나게 아주 조금씩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 또래 수준과는 비할바가 아니다. 그래서 연휴가 되면 어디 여행을 가버리던지, 가족과 끈끈하게 시간을 때울만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동네 놀이터에 나가봤자 놀 친구가 딱히 없어서 왠지 모르게 속상하고 서글퍼진다.


내 인맥을 활용해 약속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 인맥이 안되면 나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동갑내기 아이를 키우는 친구네와 키즈카페 가기, 반에서 그나마 한 두 마디 대화를 나누는 친구 어렵사리 집으로 초대하기 등으로 나름 알차게 보냈다. 동갑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아이가 잘 어울리지 못할까 봐, 상대 친구가 내 아이를 질려하고 재미없어하며 놀기 싫다고 할까 봐 걱정돼서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어른들을 끼고 있었고 길지 않은 시간이라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다.


연휴 기간 동안 한 번은 남편과 친한 지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지인네 가족 아이도 내 아이와 동갑인데 비슷하게 사회성이 부족하고 기타 여러 어려움이 있어서 센터 치료를 받고 있다. 두 아이들을 어울리게 해 주려고 이전에도 몇 번 만나기도 하고 함께 1박으로 여행 간 적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함께 놀지 않았다. 철저히 따로국밥이 되어서 각자 관심사와 꽂힌 것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서로 대화를 한다거나 제대로 된 상호작용을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집 부모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서로 내색은 안 했지만 애들이 잘 놀지 못하는 모습에 더 속만 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의 만남은 조금 달라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서로에게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관심사와 주제가 워낙 한정적이고 각자 강하게 꽂힌 것이 있기에 자연스러운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전에 모습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 아이들만 잠깐 놀게 놔두었는데 놀랍게도 약 10분 정도 둘이 뭔가 대화를 하면서 블록을 조립하면서 놀았다. 평소 같으면 1분도 채 되기 전에 한 명이 울거나 떼를 써서 어른이 달려가 개입하거나 달래주거나 아니면 함께 놀아줘야만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10분 이상의 시간을 아이들끼리 놀아주니 그제야 어른들은 우리끼리 어른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10분이 너무 길었을까. 내 아이가 뭔가 이를 게 있는지 억울한 얼굴이 되어서 나에게 뛰어온다.


나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달래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내 아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지인네 아이가 "내가 미안해, 우리 가서 더 놀자."라고 하는 거다. 그 말에 내 아이도 금세 분했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는지 "괜찮아, 알았어."라고 대답하며 계속 놀이를 이어갔다.


그 아이가 말한 미안해라는 말도, 내 아이가 대답한 괜찮아라는 말도 굉장히 기계적으로 들렸다. 엄마, 아빠한테 배운 대로, 센터에서 학습한 대로 적용하는 듯한 느낌이 다분히 들었다. 이런 상황에선 미안해라고 말하는 거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말하는 것 같았다. 사회성을 기계적으로 학습해서 적용하는 모습이 바로 이런 거라고 볼 수 있을까.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서툴고,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지인 가족도, 그리고 우리 부부도 아이들의 그런 모습에 상당히 놀라기도 하고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 학습적으로라도, 기계적으로라도 배워가면 되지."


보통의 아이들이 유아기에 자연스럽게 체득해야 할 사회성이 어떤 이유로든 늦어지고 놓쳐버렸으니 인위적으로라도 알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서 학교라는 공간에서, 여타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할 기관에서 모나지 않게 어울리면 되는 것 아닌가.


지인의 아이도, 그리고 내 아이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일말의 희망을 보았고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나서 아이들 서로 놀 수 있는 기회를 더 주자고 하면서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더 어렸을 때 몇 번 만났을 때에는 아이들이 놀 때마다 누구 한 명이 울던지 떼를 쓰던지 사단이 나서 상황을 정리하느라 황급히 헤어졌고, 만남이 있은 후엔 항상 각자의 아이의 행동 때문에 민폐를 끼친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사과하거나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받곤 했다. 가까운 지인 사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도, 친한 친구 관계도 아니기에 서로의 아이의 선 넘는 행동이 늘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을 한 번씩 만나게 되는 이유는 그나마 만나면 서로의 애환을 알고 있기에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아도 서로가 공유하는 마음의 끈이 약하게 있음을 느낀다.


남편은 이번에 만남의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이가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위축되고 소심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같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너무 안타깝더라고." 그의 말에 모두가 심히 공감하는 분위기의 정적이 잠시 흘렀다.


그 부부도 둘 다 내로라하는 학벌에 어딜 가도 자랑할만한 직업까지 갖춘 사람들인데, 발달 문제를 겪는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가지로 힘들어서 심리 상담과 부부상담치료를 받으며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내 생각엔 본인들은 어려서부터 워낙 잘났고 똑똑해서 알아서 자기 삶을 개척하면서 열심히 성과를 내며 살았는데, 갑작스럽게 닥친 자녀의 발달 문제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나나 내 남편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만나면 연민의 감정을 느껴서인지 몰라도 왠지 편하고 부담이 없다.


주변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알고 가까이 지낸다는 게 상당히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리고 서로를 더욱 응원하게 된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그 집 아이도, 우리 아이도 한 뼘 더 성장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만나서 둘이 별 탈 없이 노는 시간이 15분 정도로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은 1억 넘는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