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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치료를 받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초1 사회성 그룹 치료 이야기

by 레이첼쌤

7세 유치원 담임선생님께서 상담 때 아이 그룹 치료를 받게 해 보심이 어떻냐고 제안해주셨다.

코로나로 센터 수업도 멋대로 그만뒀던 나는 그제야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급하게 발달심리센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요즘엔 어느 동네를 가든 발달상담센터, 상담심리센터, 언어심리센터, 언어발달상담센터 등과 같은 간판이 흔히 보인다. 관심이 없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아이로 인해 이 분야에 대해 발을 들이기 시작하니 세상엔 이런 종류의 센터들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만큼 발달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많다는 걸까? 나 어렸을 적에도 이런 센터들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내가 어려서 몰랐던 건지 그때는 이런 센터가 없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언제부터 발달 문제를 겪는 어린이들이 늘어나게 된 걸까 문득 궁금했다. 아니, 발달 문제를 겪는 유아동은 과거에도 많았지만 이 전공분야가 충분히 알려지지도 않고, 사람들도 무지했어서 조금 문제가 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아이를 양육한 거였는지 아니면 발달 문제를 겪는 유아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나면서 수요가 늘어나서 발달 센터들이 생겨나게 된 건지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지방광역시에도 이렇게 흔하다면 전국적으로도 무수히 많은 발달 센터들이 있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 많은 센터들 가운데 우리 아이에게 맞는 곳이 어디일지 알아보는 것은 엄마의 또 다른 과제로 주어진다. 나는 이런 걸 적극적으로 알아보는 성향이 아니라 맨 처음에는 검사받았던 정신건강의학과 옆에 연계되어있는 센터로 자연스럽게 다니게 되었다. 1년 반 정도 다녔는데, 약 15분 거리로 우리 집에서 거리상 멀지는 않았지만 워킹맘이었던지라 퇴근 후에 집에서 이모님과 하원해있는 아이를 데리고 챙겨서 센터에 오가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토요일 수업도 다니긴 했지만, 토요일은 주말이라 센터가 터져나갈 듯 복잡해서 주차도 힘들고 수업료도 더 비쌌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센터를 알아볼 때에는 가장 우선시한 것이 우리 동네에 있어야 하고 도보 거리이면 더 금상첨화일 것 같았다. 알아보니 동네에 가까운 거리에 3개 정도의 센터가 있어서 근무하느라 직접 가보지도 못하고 전화 통화로 센터장님과 상담 후에 결정한 곳이 지금 다니게 된 센터이다.


하늘에서 복을 내리셨는지 내가 7세 또래 그룹수업이 가능하냐고 문의했을 때 원장님도 지금 그룹수업을 하나 짜서 시작하려던 참이라고 하셨다. 게다가 이 센터는 내가 알아본 곳 중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웠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바로 있는 학원 상가 건물에 있다. 겉보기에는 간판도 낡았고, 작아 보였지만 원장님도 인상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룹 수업 선생님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룹 수업에 두 분의 선생님이 들어오시는데 한 분은 조금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성향이라면, 다른 한 분은 정말 밝은 에너지가 넘치고, 적극적이고, 열정 가득하시다. 젊은 20대이신 것 같은데 어린 사람 특유의 열정도 있다고 해야 하나. 아이들을 정말 예뻐하고, 수업 내용도 아이들 수준을 최대한 고려해서 알차게 준비하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건 함께하는 또래 멤버들이다.

개별치료보다 사회성 그룹 수업을 받는 게 더 힘든 이유는 우선 비슷한 수준의 언어와 인지능력을 갖춘 또래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나이대도 같으면 더 좋고, 성별 문제도 있고, 성향도 고려해야 한다. 센터에 다니는 아이들이니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소통 능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 정도가 경한지 중한지도 중요한 척도다. 유치원 선생님이 제안하기 전까지 나는 사회성 그룹 치료에 대해 조금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래도 정상 발달? 의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하는 게 그래도 낫지 내 아이도 부족한데, 부족한 아이들끼리 모아놓고 뭔가를 한들 무슨 발전이 있겠느냐는 오만한 생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 아이에게 이 그룹 치료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아이는 부모, 가까운 어른이나 사촌 형아들 외에는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하지 못했다. 유치원에서는 선생님 이외에 아이들과 소통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고 학습 시간에만 그럭저럭 따라가고 있었다.


원래 원활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순서가 이렇게 확장된다고 한다.

<엄마 - 아빠나 형제 - 가까운 친척 (할머니, 할아버지) - 자주 보는 이웃 - 또래>


또래와의 상호작용이 가장 고차원적인데 그 이유는 어른들이나 형아 누나들이야 아이가 하는 말을 답답하더라도 조금 참고 기다려줄 수 있고, 표현이 미숙하더라도 척하면 척 알아듣고 받아주는데 또래는 그렇지가 않다. 상대방 또래 아이도 같은 나이대라 언어 표현적으로 완벽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도 어렵기 때문에 아이가 하는 말이 서툴고 답답하면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유치원에서 만나는 정상 발달의 또래와 소통이 어려우니 센터에서 억지로라도 비슷한 수준의 친구와 주 1회라도 만나게 해서 전문 선생님의 지도 하에 마음 편히 소통을 시도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정말 운 좋게도 이 센터에서 2명의 또래 남자 친구들과 함께 그룹 수업을 받게 되었고 2명 다 내 아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각기 세부적인 진단명은 조금씩 다르나, "사회성 부족"이라는 이슈는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고 언뜻 보면 센터를 안 다녀도 되지 안 나는 느낌이 들 정도의 아이들인데 자세히 보면 조금 느리다는 걸 알아챌 정도로, 경계에 있는 아이들이라고 하면 더 맞겠다. 한 친구는 도움반으로 입학시키려고 알아봤으나 인터뷰에서 대답을 잘해서 떨어졌으니 말이다.


내가 더욱더 이 그룹 수업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한 이유는 친구들 엄마들과의 친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첫 해에 막 이 수업을 시작했을 때에 나는 센터 대기실에서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좋은 일도 아니고 애가 느려서 센터에 온 주제에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눌 의지도 생기지 않았고, 항상 퇴근하고 피곤에 지친 상태에서 갔기 때문에 에너지도 바닥이었다. 의자에 앉아 눈 감고 있거나 하염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곤 했다. 가끔 아이에 대한 걱정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겉도는 정도였다. 그런데 수개월이 흐르고 점점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새 이 센터 대기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엄마들과의 시간을 기대하는 나를 발견했다.


느린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엄마들과의 대화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나의 걱정과 관심사를 공감하기도 당연히 힘들 것이고 나도 아이 상태를 정확하게 오픈하지 않았다. 마음 터놓고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이 몇 있긴 했지만 아이에 대한 나의 깊은 마음속 진지한 고민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물론 다들 마음 터놓고 지내기에 좋은 사람들이고 성격도 나와 잘 맞는 편이고 육아 이야기만 하지 않기에 더 신나고 재미있을 때도 많다. 다만 여기서 "발달이 느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내 자아는 잠시 숨겨두어야 한다. 우리 아이가 조금 사회성이 느리다는건 인지하고 있지만 고맙게도 다들 내색하지 않고 되려 도와주고 배려해주려는 사람들이다.


이 센터 대기실에 와서는 느린맘 엄마라는 내 자아를 솔직히 내보이며,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한창 대학병원 진료예약을 알아보고, 검사를 받으러 다닐 때 엄마들 각자가 진료 봤던 대학병원과 소아정신과 교수님들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는 단톡방까지 만들게 되었고 가끔 센터 수업 외에 따로 아이들끼리 만나서 노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물론 다들 사회성이 부족한지라 엄마들 개입 없이 자연스럽게 노는 이상적인 장면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잠깐씩은 어울리기도 한다. 한 엄마는 굉장히 차분하고, 따뜻하고 여성스러운 성격에 요리도 잘하고 남 챙겨주는 것도 좋아해서 매번 만날 때마다 간식이나 먹을거리를 손에 쥐어준다. 또 다른 한 엄마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어서, 아이 병원 검사도 백방으로 알아보고 다양한 종류의 검사도 받고 여러 교수님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아이의 어려움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이게 쉬운 일 같지만 지방광역시에 사는 우리는 서울 수도권 지역에 위치한 병원까지 알아보고 예약 잡고 검사하고 결과 들으러 다니는 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통 일이 아니다. 대단한 건 두 명 다 워킹맘이라는 사실이다. 일까지 하면서 이 모든 걸 해내는 게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이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들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겪은 불행과 시련 중에 자식으로 인한 고통이 그 무엇보다 가장 쓰라리고 아프고 견디기 힘들었다. 왜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식으로 인한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 건지. 처음에는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인생이 원망스러웠는데, 센터 엄마들과 친해지고 나서는 왜 이토록 열심히 살면서, 생에 최선을 다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는 건지 마음이 심란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 아이와 더불어 함께 수업을 듣는 이 아이들도 같이 좋아지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대학병원 진료 보러 간다고 하면 걱정되고 조심히, 무사히 잘 다녀오기를 바라게 되고, 진료 결과가 실망스러웠다고 하면 나도 같이 마음이 아프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더 크고 위대한 마음이지만 나는 테레사 수녀만큼의 그릇은 못 가진 사람이라 내 주변에서 직접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자식으로 인한 고통을 덜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많이 성장하는 기분이다. 이기적이고, 내 생각밖에 못했던 내가 내 자식 이외에 남의 자식까지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사회성 그룹 치료 수업 덕분에 만난 인연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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