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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Oct 25. 2022

네가 애기띠 매고 버스 타고 다녀봐야 정신 차리지

결혼 생활 이야기

최근에 부쩍 친해진 동네 엄마가 있다.

올해 이 분을 알게 된 게 가장 큰 행운이라고 싶을 정도로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즐거운 사람이다.

항상 밝고 에너지가 넘치고 옆 사람을 잘 챙겨주는 등 장점이야 나열하자면 무척 많은데, 다른 무엇보다 말을 재미있게 해서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가 않다. 끊임없이 이렇게 이야기할 소재가 많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다방면에서 아는 것도 많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재밌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에피소드로 무장하고 있는 이야기꾼처럼 느껴진다.


엄마들끼리 있으면 한다는 이야기는 뻔하긴 하다.

아이, 가족, 학교 선생님, 건강, 동네 사람들, 운동 이야기 등을 주로 하는데 남편 흉보는 것도 빠지면 섭섭한 소재이다. 부부간의 속사정과 남편을 향한 말 못 할 불만을 남에게 말한다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걸 알기에, 어느 정도 적당히 선을 유지하면서 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다.

집안일 분배, 육아, 가사 참여 등에 대해 아내로서 갖는 평범한 불평이나 불만족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서로 공감하기도 하고 남편들이란 원래 그런 종자들이야,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참고 살아야지, 이 정도의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날은 어쩌다가 남편들의 허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들이 얼마나 나 잘난 맛에 사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집안일 하나 제대로 도와주는 것 없으면서, 애랑 놀아주지도 않고 누워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에 어디 가서 자기만 한 남편감 찾기 힘들다고, 이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한 번씩 생색내는 꼴이 아주 우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언니의 남편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자존감이 아주 높고, 남편으로서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기시는 그런 분이었다. 나도 그 말에 극 공감하면서 우리 남편도 자기만한 남편 어디 가서 구하기 힘들다는 식으로 늘 말한다고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죽겠다고 했다.


하루는 언니의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지금 나한테 시집와서 이렇게 편하게 누리고 사는 걸 알아야 해. 지금 얼마나 많은걸 누리며 산다는 걸 제대로 알기는 하는 건지. 네가 진짜 차도 없이 애기띠에 애기 안고 시내버스 타고 다녀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쉽다 정말."


나는 이 말에 정말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에게 나 덕분에 편하게 누리고 사는지 알아라고 생색내는 건 알겠는데,

그에 대한 예시가 너무나 황당하고 웃겨서 나는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웃었다.

애기띠 하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녀봐야 정신을 차린다니?

차 없이 아이 데리고 다니는 고생을 겪어보지 않아서 지금 얼마나 많은 걸 누리는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우리 남편 역시 가끔씩 이런 허세성 발언을 하곤 한다.

네가 나 덕분에 이렇게 넓은 집에 살고, 좋은 차에, 명품 가방도 몇 개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


속으로는 "너 아니었어도 다른 좋은 남자 만나서 더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다 이 인간아"라고 생각할지언정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남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날 것 같아 꾹 참곤 했다.

그리고 가정 경제를 위해 성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 하면서 살고 있는 건 맞는 사실이니까 더 기분 나쁜 발언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냥 헛웃음만 짓고 만다.


다른 남편도 마찬가지겠지만 내 남편도 이런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아마 이건 보통 남편들의 자부심 혹은 자존심의 투박한 표현인 것 같다. 남자가 가족을 부양하고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가장의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아내들도 자식 키우고 집안 살림하고 맞벌이까지 하기도 하지만 남편들이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는 내가 생각지 못한 더 무거운 형태로 가장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건지도. 

그 책임을 저버리지 않고 성실히 사는 게 의무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의외로 이 당연한 의무를 저버리는 가장들도 없지 않기에.


남편의 이 속 깊은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다음에 또 이런 발언을 한다면 나는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그럼, 내가 당신 같은 남자 안 만났으면 어떻게 이 좋은 집에 좋은 차 타고 잘 살 수 있겠어. 당신같이 능력 있고 성실한 남자 만나서 내가 호강하는 거지. 내가 진짜 복 많은 여자야."


빈 말이라도 이렇게 받아쳐서 남편의 자존심을 세워줘야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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