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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l 06. 2023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식 자랑하는 엄마

네, 그 사람이 나였네요

어릴 적 내가 큰 시험에 합격하거나 상을 받았을 때면 친정엄마는 여기저기에 전화를 돌리며 자랑하기에 바쁘셨다. 주로 친척들과 친한 지인들 위주였지만 가끔은 생판 처음 보는 신발가게 사장님 같은 사람에게도 갑작스럽게 물어보지도 않은 자식 자랑을 하기도 했다. 친한 사람들이야 이해를 한다지만, 오지랖도 적당히 해야지 왜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렇게 부끄럽게 자식 얘기를 하는 건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꼭 그러고 나면 엄마에게 한소리 하면서 적당히 하라고, 사람들이 겉으로만 축하하는 척하지 속으로는 욕한다고 훈수를 뒀다. 친정엄마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내 자식 자랑한다는데 무슨 상관이 야는 식이었다.


어렸을 적 봤던 그런 엄마의 모습을 이번에 나에게서 발견하는 순간이 있었다. 아이가 어렵게 피아노 대회를 준비했고 생각지도 못한 큰 상을 받게 되었다. 다른 누구보다 아이 스스로에게 엄청나게 귀하고 큰 경험이 되었고, 발달 장애를 가졌지만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지닌 행사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족들 모두 축하해 주었고, 동네엄마들을 포함한 주변 지인들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아이가 잘했는데 엄마인 나까지 덩달아 축하를 받으니 정말 어깨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으쓱해지는 기분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모범생에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싹 쓸어 오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의 심정이 이런 걸까? 거의 처음 경험해 본 아이의 대회 수상에 나도 몹시 기쁨이 컸다. 왜냐하면 그 준비의 과정이 아이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나도 같이 스트레스를 받고 우는 애를 어르고 달래며 끝까지 레이스를 함께했기에 수상이라는 결과가 더 달콤하게 다가왔다. 피아노 대회 상도 이러할진대, 유명한 경시대회에 나가 수상하거나 정말 국가대표를 키워낸 엄마들은 얼마나 자식이 자랑스러울까 그 마음은 감히 상상도 안될 정도다.


뒤늦게 아이의 수상 소식을 알게 된 엄마들이 축하를 전할 때면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으쓱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뿌듯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OO엄마, 이번에 피아노 대회에서 준대상 받았다면서요? 피아노 학원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언제 그렇게 준비했대. 축하해요."


"그러게요. 준비 과정이 정말 힘들었는데 막상 큰 상 받으니 아이도 저도 정말 뿌듯하긴 해요."


정해진 멘트처럼 저런 답변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덤덤한 척했지만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가는 내 표정까지는 더욱 감추기 힘들었다.


아직 큰 대회를 경험해보지 않은 또래 친구들도 많기에 아이의 수상 소식은 다른 엄마들에게 놀라운 소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발달상 어려움으로 센터에 다니는 걸 알고 있는 엄마들은 더 놀란 눈치였다. 애가 느리고 문제 있는 줄 알았는데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았다고 하니 의외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번달 아이 약을 처방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 한 달이 어찌나 자주 찾아오는 것 같은 느낌인지, 올 때마다 참 마음 무거운 곳이지만 이번 달은 아이 없이 혼자 오니 그나마 부담감이 덜했다. 늘 미리 예약을 하고 병원에 가지만 정신과에 다니는 환자가 이토록 많은 건지 원장님 두 분이 운영하는 작은 규모의 정신건강의학과인데도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아이의 이름을 말하고 접수해 놓고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오늘은 어린이나 청소년들보다 성인 환자들이 더 많다. 혼자 속으로 저 사람들은 겉으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과연 어디가 아픈 걸까 생각해 본다. 멍하니 사람들 쳐다보다가 이내 쳐다보고 있는 걸 들킬까 봐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여기에 오면 왠지 핸드폰도 집중이 안된다. 평소 즐겨보던 SNS도 브런치 글도 읽기 싫어지고 쇼츠 영상도 다 재미없다.


예약을 하고 왔는데도 대기 시간이 30분이 넘어가지 슬슬 지루해지고 짜증이 나서 남편에게 기다리기 힘들다고 톡을 보냈다. 그리고는 눈 감고 머릿속이나 정리하기로 했다. 한 달에 한 번 보는 진료인데, 아무리 약만 처방받아 가는 게 거의 주목적이라고 해도 원장님이 한 두 마디씩 아이의 상태에 대해 질문하고 조언해 주시기 때문에 나와 아이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나도 아이에 대한 최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 드려야 원장님도 알맞은 처방과 조언을 내려주실 수 있다는 생각에 이번 달 아이의 특이사항과 문제 행동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혀를 날름거리는 일종의 틱이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 최근에 더욱 심해진 등교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약간의 고민 끝에 피아노 대회에서 상 받았다는 이야기도 해볼까 싶었다. 필요 없는 이야기 같지만 때로는 아이의 발달 과정에서 이런 희망적인 이벤트도 언급해 주는 게 진료 기록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대기 50분 만에 드디어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숙연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원장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신다.


"우리 OO이, 저번달에 피아노 대회 나간다고 했는데, 잘했어요?"



나는 순간 굉장히 놀랐다. 내가 저번 달에 왔을 때 피아노 대회 이야기를 했었나? 그것조차 기억 못 하고 있었는데 기록해놓으셨나 보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환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네, 원장님. 우리 OO이 준대상 받았어요."


"어머나, 준대상이면 큰 상 아니에요? 정말 대단하네요. 잘했네."


생각보다 큰 리액션에 나는 나도 모르게 폰을 꺼내서 아이의 대회 영상을 찾아 원장님께 보여드리고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나서도 수백 번, 수천번 혼자 봤던 그 영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의사 선생님께 보여드릴 때 나는 너무나 벅차고 감동이 한 번 더 올라왔다.


굳이 동영상까지 왜 보여주는 거야, 하는 반응이 나올까 봐 순간 고민스러웠는데 원장님은 안경까지 찾아 쓰시면서 자세히 처음부터 끝까지 보시면서 정말 잘했다고, 대단한 일 했다고 박수까지 치시며 칭찬해 주셨다. 아이랑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시면서 아쉬워하시기도 했다. 


몇 년간 이 분을 만나고 있지만 그렇게 다정하고 친절한 느낌이 드는 의사 선생님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친절한 말투를 쓰시지만, 나와 상담할 때는 전문적이고 이성적인 느낌이 더 크고 내가 듣고자 하는 정보를 전달해주시려고 할 때가 대부분이다. 말투는 친절하지만 뭔가 인간적으로서는 사무적이고 냉철한 의사 선생님의 느낌이 훨씬 더 강했다.


그런 분 앞에서 아이의 대회 동영상을 보여준 나 자신도 놀랍고, 그것에 크게 반응하시면서 칭찬해 주신 원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영상까지 보여주면 너무 자식 자랑하는 오지라퍼인가?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어렸을 적 내 친정엄마가 했던 것처럼, 굳이 묻지도 않은 자식 이야기를 앞장서서 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 입장에서도 본인이 치료하는 환자가 늘 문제행동만 일삼고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만 나누는 것보다 가끔은 이렇게 자랑할만한 소식도 접하면 더 좋지 않을까?


소기의 목적인 약물 처방을 받고, 다음 달 진료 날짜를 잡고, 다음엔 아이와 되도록 같이 오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병원을 떠났다. 아이 영상까지 보여준 건 오버였을까 싶었지만 이내 그런 마음은 접기로 한다. 


항상 아이 때문에 움츠러들고 숨기고 싶고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서 주눅 들었던 나 자신을 뒤로하고, 이번만큼은 한 번쯤 자식이 잘한 일로 자랑하는 엄마가 되어보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는 엄마라는 뻔뻔스러움과 약간의 낯두꺼움도 아주 가끔은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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