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부 이야기
1억이라는 돈은 그 부부에게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그들의 고향인 수도권 변두리 작은 도시에 시부모님이 마련해 준 많지 않은 돈으로 아파트를 하나 장만해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식을 할 때 이미 여자의 배가 부른 상태였다. 임신을 해서 결혼을 하게 된 건지, 임신을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할 결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난 지 6개월 만에 선임신 후결혼을 하게 되었다. 친정 식구들은 임신하고 결혼을 하게 된 막내딸을 못내 안타까워하면서도 아직 젊었고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예비 사위를 보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남자는 허우대가 좋아서 키가 크고 건장한 체력의 소유자로 얼굴도 그만하면 준수한 외모였다. 하지만 학벌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었으며 그것도 말단 사원이었다. 여자는 발레를 전공하고 대학 졸업 후 학원 강사를 잠깐 하다가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둘은 사이가 좋았는지 결혼과 동시에 큰 아이를 출산하고, 곧바로 연년생 동생까지 낳게 되었다. 여자는 육아와 살림을 하느라 근 몇 년 정신없이 바빴고, 남자는 열심히 회사일 하며 육아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남자는 회사일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규모도 작고 가족 일가친척이 운영진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라 연봉은 괜찮았지만 심리적 압박이 심했다. 그에 대한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날이 많아졌고, 회식 핑계로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날도 늘어났다.
여자는 여자대로 연년생 남매를 키우면서 육아로 늘 지쳐있었고 둘은 자주 싸웠다. 남자가 술에 취해 새벽녘에 귀가할 때면 밤새 다툼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집안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여자는 자주 이혼 이야기를 꺼냈고 더러는 친정식구들이 와서 여자를 달래주는 날도 있었다.
이직을 결심한 남자는 나름대로 더 나은 조건의 회사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일이 좋게 풀리게 되었다. 연봉도 더 많아졌을 뿐 아니라 이전 회사에서만큼 심리적 스트레스도 덜해졌다. 둘의 사이는 조금씩 나아졌고, 경제적 여유도 조금 생기게 되어 이사를 계획했다. 신혼집은 초등학교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었는데 바로 옆에 초중학교를 끼고 있는 괜찮은 아파트로 평수까지 넓혀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여자도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고 예쁘장한 외모라 재취업이 용이했다. 안정된 직장도 아니고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아이들 키우느라 집에만 있던 여자에게는 일한다는 것 자체가 힐링이었고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얻기도 했다.
외벌이로 가장의 무게를 느끼던 남자도 여자가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은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둘은 틈만 나면 자주 싸웠는데 주된 이유는 남자의 술자리 회식 때문이었다. 밖에만 나가면 도무지 연락이 되질 않고 새벽녙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는데 옷에서는 진한 향수냄새가 진동을 했다. 여자는 점점 더 남자를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의부증 증상을 보일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지게 되었다.
엄마, 아빠가 큰 소리로 다투는 날이면 아이들대로 또 스트레스를 받았다. 큰 아이는 그나마 일찍 철이 들고 어른스러워져서 혼자 나름대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는데 작은 아이는 아직 어린 탓에 그러질 못했다. 아빠가 회식 있다는 연락이 오는 날이면 엄마 못지않게 둘째는 손을 벌벌 떨며 긴장하고 잠을 못 이루었다. 아빠가 오면 분명히 엄마랑 또 큰 소리 내며 다투게 될 거라는 생각에 아이는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결국 학교 생활과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아이의 이상 행동과 원인을 알 수 없이 자주 발생하는 두통과 복통 증상으로 온갖 병원을 데리고 다녀봤지만 원인 미상이었다. 둘째 아이는 결국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고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약까지 복용하게 되었다. 여자도 아이의 약을 처방받으러 간 김에 본인도 약을 처방받아먹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이루는 일도 너무나 어려워졌다.
남자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게 문제였지만, 일에 대한 책임감은 투철했다. 회사일은 완벽하게 해냈고 능력을 인정받아 연봉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고공행진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괜찮았지만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유명한 건설사에서 아파트를 시공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분양 홍보 자료를 살펴보니 새로 조성될 공원까지 끼고 있고 시에서 도로 사업까지 계획하고 있어서 전망이 좋아 보였다. 큰 고민 없이 청약을 넣어보기로 했고 계약 당시에 지역주택조합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주변에서도 지역주택조합원으로 새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사람들이 꽤 있었고 입주 전까지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있다 들었지만 결국엔 다 잘 풀려서 입주해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분양 일정에 맞춰 계약금과 중도금을 내기 시작했다. 2차 중도금을 내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남자는 좀 찝찝함을 느꼈다. 코로나와 부동산 시장 하락세로 미분양이 된 건 이해하겠는데 아직 공사 자체도 시작되지 않아서 뭔가 불안했다. 게다가 지역주택조합이라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미 1억 가까이 돈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냥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여자에게 이런 마음을 이야기해 보았다. 여자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일축했다. 남자에게 왜 이렇게 소심하고 걱정이 많냐며, 우리가 부동산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청약받아서 중도금 내고 있는 건데 뭘 걱정하냐고 쏘아붙였다. 그러면서도 약간 걱정이 되긴 했는지 다시 한번 계약서와 분양 정보를 꺼내서 정독하고 알아보았다.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고 그들은 다시 한번 자금을 마련해서 2차 중도금을 냈다. 2억 가까운 돈이었다.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시행사는 공사 시작 일정을 계속 뒤로 미뤘고 사무실에 연락을 해도 잘 받질 않았다. 미분양 상태가 지속되었고 돈이 부족했는지 공사를 시작할 수도 없는 사태였다. 자세히 알아보니 그간 조합원들에게 받은 돈은 홍보며 직원 월급이며 이래 저래 쓰느라 다 공중분해 되었고 공사가 시작될지도 미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남자와 여자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다른데 투자할 능력도 관심도 없어서 오롯이 적금 부어가며 천만 원, 이천만 원 모은 돈이었다. 무슨 시세 차익을 노리고 부동산 투자를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완공되면 이사를 가서 실거주할 목적으로 청약을 한 것이었다. 시행사에서 조합원 대상으로 설명회를 하기에 가보았지만 별다른 대안도 없었고 게다가 입구에 등치 좋은 깡패들이 수십 명 위압적인 포스로 서있었다. 건설사는 다 조폭 끼고 한다더니 정말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더 큰 충격은 지금까지 부은 돈을 다 잃는 건 당연하고, 시행사에서 은행에 대출받은 금액에 대한 이자가 조합원들에게 부과된다는 사실이었다. 적으면 몇 천, 많으면 몇 억이 되는 돈을 이자로 분담해야 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게다가 이제 와서 조합원을 탈퇴하고 싶어도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급하게 변호사를 선임하고 알아봤다. 그 돈 아까워할게 아니라 더 큰 피해를 막으려면 지금이라도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는 게 급선무였다. 발 빠르게 일 처리를 해야만 했다. 본업을 내팽개쳐두고 둘 다 이 일을 처리하느라 몇 날 며칠을 끌려다녔다.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고 시공사에 소송까지 걸게 되었다. 이자에 대한 부담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 들어간 계약금과 중도금은 승소한다고 해도 다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몇 억원이 들어갔는데 이제는 백만 원만 돌려받아도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자는 스트레스로 더 매일 술을 마셔댔고 여자는 하고 있던 파트타임 일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양가 집안이 부유해서 도움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여자의 높은 교육열로 아이들 사교육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고 있는데 생활비를 줄일 수도 없었다. 공부를 꽤 잘하는 큰 아이는 영어 수학 학원은 당연하고 바이올린 개인 레슨에 승마 수업까지 받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원 중 어느 하나도 줄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공부 잘하는 첫째는 그 여자의 자존심이자 미래였다.
몇 날 며칠을 신경이 날카로워져 서로를 탓하고 법적 처리에 대한 논의로 다투느라 지친 남자와 여자는 어느 날 밤 술 한잔 하면서 좋게 생각하자고 다짐한다. 이자에 대한 빚을 지지 않은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또 어디 길가에 나앉을 정도의 상황은 아니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있으니 감사히 여기자고 애써 자위했다. 최고급 외제차 한 대 샀다 치고 훌훌 털고 잊어버리자고 생각하니 또 그리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아픈데 없으니 아직은 더 버텨보기로 한다. 남자와 여자는 몇 억을 잃고도 정신승리로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가끔 떠오르는 커다란 돈의 액수가 그들의 마음을 훅 밀고 들어와 괴롭힌다. 하지만 어쩌랴,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