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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Sep 02. 2023

조깅하다가 죽을 뻔했다

조금 더러운 이야기도 있으니 주의

작년에 처음 조깅의 맛을 알게 되었다. 뭔가 숨을 헐떡이며 뛴다는 운동 자체가 나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뛰어보니 뛸만했다. 처음 10분은 무지 숨이 가빠오고 힘들지만, 그 임계점만 넘으면 신기하게도 할 만했다. 몇 개월동안 그렇게 매일 새벽 천변길을 따라 열심히도 뛰었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비만 안 오면 뛰는 게 철칙이었다. 너무 새벽 공기가 추워진 겨울날에는 방한 장갑에 방한조끼까지 사서 무장하고 뛰기도 했다.


왜 진작 이 좋은 운동을 하지 않았는지. 뛰다 보면 세상 못 이룰 일이 없을 것 같고, 아이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는 듯했다. 땀에 흠뻑 젖은 후 샤워를 하는 순간에는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성취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듯했다. 지역 마라톤 대회까지 출전해 볼까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그땐 달리기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하지만 내 몸은 나의 새로운 운동을 시기라도 한 듯 브레이크를 걸었다. 예전에 한창 고생했던 혈관염이 도졌다. 딱히 아프거나 통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다리에 벌겋게 올라와서 퍼져있는 피부염들은 보기 싫었다. 이십 대 때부터 이 증상으로 병원에도 갔지만 독한 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거 아니면 일단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고 했다. 이 따위 병 때문에 어렵게 시작한 달리기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계속 조깅을 강행했다. 염증은 무섭게 더 퍼져나갔다. 결국 일주일만 쉬어보자고 나 자신과 타협했다.


신기하게 며칠 쉬니까 좋아졌고 혹시 또 달리기를 하면 도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며칠을 쉰다는 게 몇 달이 되고, 아침 조깅을 그만둔 게 벌써 반년이 넘어갔다. 다시 시작해야지 하면서도 귀찮고 피곤하다는 생각에 계속 미루기만 했다. 마음을 좀 먹으면 장마가 시작되고, 폭우가 온다든지 자꾸 방해요소가 나타났다.


이대로 미루면 평생 다시 못 뛸 것 같다는 생각에 큰 마음먹고 옷장 구석에 두었던 운동복을 눈에 보이는 곳에 꺼내두었다. 내일 아침엔 기필코 나가서 뛰리라. 한동안 계속 오던 비도 그쳤으니, 지금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적기야. 난 다시 뛰고 말테야.


굳은 다짐을 하고 잠이 들었고, 신기하게 알람이 울리기 직전 눈이 떠졌다. 고민하지 않고 일어나 운동복을 입고 곤히 자고 있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뛸 때는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핸드폰도 두고 애플워치만 착용하고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나오니 새벽 공기가 상쾌했다. 집 밖을 나오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천변은 아침부터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전히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나와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다들 부지런하네. 그래도 거의 걷기 운동하는 사람들 위주다. 여기서 나처럼 뛰는 사람은 단 10명에 한 명 정도뿐이다.


느린 속도로 걷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제치고 빠른 속도로 달리는 기분은 왠지 짜릿했다. 이거 뭐 매일 아침 달리기 운동 한 사람 같구먼. 몇 개월 쉬었어도 아직 내 몸은 크게 뒤처지지 않았어! 아직 늙지 않았다고! 휴우 기분 최고였다. 이 좋은 달리기를 여태 왜 쉬었는지, 다시 병이 도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야지 다짐했다.


1킬로미터 정도 뛰었을까, 숨이 가파르고 호흡이 힘들어지긴 했다. 원래 이 정도 타이밍에 좀 힘들긴 했지. 이 고비만 넘기면 좀 나아질 거야. 3-4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러너스하이까지도 느낄 수 있으니 좀만 참자.


그때부터 몸이 좀 이상했다. 예전에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날에도 호흡이 가파르긴 했지만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는데 도저히 뛸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뛰더라도 중간에 쉬거나 걸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도. 저. 히. 뛸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멈췄다.


그리고 걸었다. 이상하다. 걷지도 못하겠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왔던 길을 일단 되돌아가기로 했다. 작전상 후퇴다.


1.5킬로미터 뛰어왔으니 집 방향으로 돌아가는 건 금방이다. 너무 오랜만에 뛴 거라 몸에 무리가 갔나 보다. 천천히 걸어서라도 집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 이런 생각이 든 순간 갑자기 나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걸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숨이 안 쉬어진다. 내가 왜 이러지?


길바닥에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신선한 새벽 공기에 힘을 얻은 늦여름 모기가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모기의 공격을 느끼면서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일어나서 천천히 걷자. 천근만근인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걸었다. 열 걸음도 못 가서 또 주저앉았다. 걷기는커녕 아예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다. 이대로 쓰러질 것 같다.


정신줄을 붙잡기 위해 사투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핸드폰도 두고 와서 집에 연락할 수도 없는데 어찌 됐든 집까지는 걸어가야 해. 빠른 걸음으로 가면 10분도 채 안 될 거리를 걸어서 돌아가는 게 나에게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지상과제가 돼버렸다. 걸을 수가 없다. 앉아 있는 것도 괴롭다. 대짜로 눕고 싶다. 그래도 여기서 누우면 안 될 것 같은데.


갑자기 배가 아파온다. 어젯밤에 생리가 터졌다. 생리 기간엔 약간 빈혈 증세가 있는데 빈혈 증상일까? 생리 첫날엔 보통 컨디션 난조라서 가만히 있어도 아프고 피곤한데 그냥 쉴걸. 차라리 생리 끝나고 달리기를 시작할걸. 왜 난 무리해서 오늘 아침에 꼭 나와야만 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가만있자. 배가 슬슬 더 아픈데 생리통이랑 또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읍. 미친 듯이 변의가 느껴진다. 어떡하지. 느껴본 사람만 안다. 생리통과 복통이 어우러져서 배가 콕콕 쑤시면서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듯한 아무튼 말로 표현 못할 그 느낌. 당장 화장실에 가고 싶다. 그런데 화장실에 갈 힘도 없다. 왜냐면 못 걷겠으니까.


저기 눈앞에 공원용 간이 화장실이 보인다. 백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나는 도저히 못 걷는다. 걷는 게 아니라 앉아 있는 것도 힘든데, 누가 나 좀 업어서 데려가준다면 그 앞에 무릎 꿇고 감사하며 찬양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화장실까지 갈 힘도 없어서 그냥 근처 수풀 어딘가에 들어가서 처리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휴지가 없는 게 지금 문제냐. 죽을 것 같은데.


어찌어찌해서 내 마지막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서 간이 화장실까지 당도했다. 옆에는 신나는 댄스 음악을 틀어놓고 에어로빅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그들의 흥겨운 댄스가 지금 나의 상황과는 너무나 정반대라서 웃프다. 겨우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나왔다. 온몸이 죽을 것 같은데 당장 이거 하나가 해결돼서 기뻤다. 그래 복통을 해결했으니 이따위 어지럼증이야 이겨내고 집까지 걸어갈 수 있어.


다시 힘을 내서 걸어보았다. 이제 집까지 거의 다 왔다. 우리 아파트가 내 눈앞에 보이는데 오늘따라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애써 걸어보려 했지만 나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나온다. 어쩌다 이렇게 몹쓸 몸에 컨디션이 돼버린 건지.


남편이 델러와 줬으면 좋겠다. 밖에 운동하러 나간다는 말도 안 하고 나왔는데, 핸드폰도 두고 나왔는데. 연락할 수도 없고 답답하다. 앞으로 조깅할 땐 핸드폰 필수다. 현대인이 핸드폰을 두고 외출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여유롭게 걸어가며 운동하는 사람들 틈에 고개 숙이고 주저앉아 있다. 다들 쳐다보는 것 같지만 쓰러지지는 않았기에 과하게 운동하다가 잠시 쉬는가 보다 하고 지나가는 듯하다.


도저히 혼자서는 못 가겠어서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남편에게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기에 한창 집중하고 계신 인상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제가 너무 어지러워서 못 걷겠는데, 집에 전화 한 통만 해주세요...ㅜㅜ"


아주머니는 친절한 분이셨다. 나의 상태를 엄청 걱정해 주시면서 번호를 부르라고 하시더니 전화를 걸어주신다. 본인도 빈혈과 어지럼증으로 아파본 적 있다면서 이럴 수 있다고 침착하라고 하신다. 근데 남편이 전화를 안 받는다... 네 번, 다섯 번을 걸어도 안 받으니 답답하다. 갑자기 속이 불편해지더니 헛구역질까지 하다가 결국 구토까지 나왔다. 이런 나를 보시던 아주머니가 우리 집 주소를 물어보시더니 남편이 전화를 안 받으니 집 앞에 가보시겠다고 한다. 먼 거리도 아니니 금방 다녀오겠다고. 이런.. 내가 천사를 만났구나.


점점 더 심각해져 가는 나를 뒤로 한 채 급하게 우리 집 쪽으로 향해서 뛰어가시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눈앞은 더 캄캄해지고 어지럽다. 나 오늘 이대로 죽는구나 싶다. 안되는데 더 살아야 하는데. 더 살자고, 건강하게 살아보자고 새벽부터 운동 나온 건데 나 왜 이러고 있지.


아주머니는 우리 집을 제대로 찾아가셨을까. 언제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차라리 119에 실려가는 게 더 나으려나.


저 멀리 남편의 형체를 한 남자가 급하게 걸어오는 게 보인다. 구세주가 왔다. 이제 이 몹쓸 육신을 어서 집으로 옮겨다오. 집안 어디라도 좋으니 현관문 앞이라도 내 집에서 철퍼덕 누워있고 싶은 마음뿐이다.


맛이 간 내 상태를 보더니 남편은 바로 나를 둘러업는다. 어느덧 출근시간이 다 되었는지 아파트 단지 사이로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쳐다보든지 말든지 내 몸을 남편에게 맡겨버렸다. 이럴 땐 쓰라고 있는 거구나 남편이라는 사람은. 쓸만하네.


집에 오자마자 거실에 대짜로 누워서 울기 시작했다. 아들을 향해서 남편을 향해서 울었다.


"엄마, 운동하다가 진짜 죽을뻔했어. 갑자기 앞이 안 보이고 너무 어지러웠어.. 엉엉."


아들은 놀라서 엄마 아프면 안 된다고 온몸을 주물러주고 안아주고 같이 울어준다. 남편이 챙겨주는 수분보충용 음료를 마시니 조금 살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어지럽지만.


2년 전에도 이와 딱 비슷한 증상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집에 있을 때였다. 급하게 당일 병가 신청을 하고 몇 시간 누워서 안정을 취하니 그래도 살만했다. 그런데 밖에서 이 증상이 나타나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다시는 운동이고 뭐고 밖에 나가서 달리기 하지 말라며 강하게 경고한다. 체력도 약한 애가 무슨 조깅이냐고 그것도 기본이 받쳐주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그냥 하던 요가나 하라고 한다. 뉘에뉘에. 말 잘 듣겠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일터와 학교로 떠나고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한 시간 정도 누워있으니 좀 살만하다. 일어나서 걸어보았다. 아까는 걷는 것조차 고통이더니 지금은 걸을만하네? 살았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신 차리고 씻고 아침에 내 손이 닿지 않아 엉망이 된 집을 정리했다.


아까 나는 왜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궁금했다. 이번에는 원인을 제대로 알고 싶다. 남편은 왜 챙겨주는 철분제를 꾸준히 먹지 않냐며 화를 냈다. 솔직히 생리 기간 아니면 어지럼증이 자주 있지는 않아서 한 달에 두세 번만 먹는다. 그래, 병원에 가보자.


의사 선생님도 내 증상을 듣고 혈압을 재보시더니 저혈압인건 확실하다고 한다. 피검사를 해보고 빈혈 수치가 낮으면 철분제를 먹는 것 외에는 별다른 처방이 없다고 한다. 보통 기립성 저혈압은 앉았다 일어섰을 때 어지러움을 느끼는 증상인데 나는 조깅하다가 그랬다고 하니 갸우뚱하신다. 속으로 진짜 죽을 뻔했는데 생각했다.

혈압이 이렇게 낮은 분들은 유산소 운동 말고 근력 운동이 낫고 평소에 음식을 좀 짜게 먹는 게 좋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 저체중에 속하는 편이니 운동과 식단을 잘 관리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내 생각에도 저혈압과 빈혈을 동반한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으로 인해 아팠던 것 같다.


유산소운동을 하면 안 된다고 하니 당분간 달리기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다. 행여나 또 마음이 바뀌어서 운동한다고 밖에 나가면 남편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다.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해진 얼굴에 새파래진 입술을 보고 적잖이 놀라긴 했나 보다.


운동을 할 때에도 주제파악이 필요한가 보다. 나이도 먹을만치 먹었겠다, 내 몸이 감당할만한 종류의 운동을 해야 뒤탈이 없다는 걸 이번 경험으로 깨닫게 됐다. 달리기를 하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지고, 건강해지는 기분도 들고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당분간 깨끗이 포기해야겠다.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아 적당한 선에서 해야지. 길바닥에서 객사하고 싶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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