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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Oct 24. 2023

나, 총균쇠 읽은 여자야

이대 나온 여자는 아니고요

몇 년 전부터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는 나의 위시리스트였다.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못 읽고 있는 책들이 몇 있다. 박경리의 <토지>라던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같은 책들 말이다. 교양인이나 읽을법한 이런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책들은 어지간하면 시도를 하기 어렵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좌절했던가. 읽는 내내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로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짧은 나의 식견과 부족한 문해력으로는 이해하기 여간 어려운 책이 아니었다.


평소에 주로 읽는 책들은 마음먹고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투자해서 읽으면 이삼일 내에 끝낼 수 있는데 이런 "교양서"들은 좀 더 긴 기간을 잡아야 한다. 시간적 투자도 필요하거니와 인내심도 만만치 않게 요구된다. 읽다 보면 내가 왜 지금 현실과 이렇게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이해하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건지 심심차 않은 "현타"와 맞닿뜨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언제까지나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균쇠>의 두께를 보고 한 번 더 놀랐지만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데에는 몇 시간이나, 며칠이나 걸릴까 궁금했다. 그래, 이렇게 두꺼운 책을 써낸 사람도 있는데 한 번 읽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 깊은숨을 몰아쉬고 천천히 읽어 나갔다.


사실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될 때쯤에도 이 책이 재조명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부터 한 번쯤 꼭 읽고 싶었는데 결국 이제야 접하게 된 것이다.


<총균쇠>는 왜 인류사에서 더 잘 사는 국가와 민족이 생겨나고, 힘이 없고 약해서 강탈당하고 빼앗기는 민족이 생기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여태 내가 살면서 이런 심오한 문제에 대해 이토록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한 번쯤 왜 나는 힘이 약한 나라에 태어났을까, 다음 생에는 키 크고 날씬한 북유럽 금발미녀로 태어나고 싶다 정도의 얕은 생각은 해본 적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그 질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방대한 자료와 논리와 분석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해 주는 서술 방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유럽인들에 의해서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북아메리카보다 남아메리카는 발전의 속도도 더디고 더 잘 살지 못하는지, 왜 중국이 점차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유럽과 미국이 대세가 되었는지 반박할 수 없는 이유를 알려준다. 


그 중심에는 바로 총, 세균, 그리고 철이 있었다. 원주민 수만, 수십만 명을 스페인 사람 몇 백 명이서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총과 말 덕분이었다. 원주민은 총이라는 신식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더 충격적인 건 원주민을 말살시키는 데에 총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것이 구대륙에서 몰고 온 세균감염이라는 것이다. 신대륙에는 전혀 없었던 전염병이 구대륙에서 이미 내성이 생긴 유럽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전파되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다. 인류사에서 세균이 일으키는 "전염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엄청나게 변화한 것처럼 옛날 옛적에도 전염병이라는 게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더욱 신선했던 사실은, 인류의 발전이 결국 다 환경 덕분이라는 것이다. 유럽이 아프리카보다 더 잘 살고, 중국이 잘 나갔던 것도, 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아프리카나 뉴기니 지역에서 아직도 수렵 채집을 하며 살고 있는 소수 민족들이 유럽의 백인들보다 지능이 낮아서, 머리가 안 좋아서, 유전적으로 열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기원전 시대부터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수렵 채집보다는 농경을 선택하고, 동물을 가축화하고, 풍부한 식량을 확보하면서 사회가 발전하고 그에 따라 국가가 형성되었다. 문명이 생기고 국가제도가 도입되려면 우선 충분한 식량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인구 증가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전 대륙 중에서 이러한 농경에 적당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 몇 군데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유럽과 동아시아 일부 국가가 발달하게 되었다. 


앞서 발달한 유럽이 결국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정복하면서 국가를 건설하고 신흥 강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문자의 발명 부분을 읽을 때에는 우리나라 세종 대왕의 "한글"도 꽤 자세히 언급해 주어서 상당히 반가웠다. 어려운 한자가 아닌 우리 한글을 발명해 주신 세종대왕님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새삼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나라도 지형과 위치의 특성상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일본과 함께 한자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한자자격증 시험을 보게 할 정도로, 아직 국어에서 한자의 위상은 상당히 높다는 데에 인정한다. 


솔직히 읽는 내내 너무 어려워서 때려치우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네라고 느꼈던 부분도 엄청나게 많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바쁜 인생에 내가 이 책과 씨름하고 있는지 수십 번의 현타가 왔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내고 싶었다. 오기일 수도 있고, 발악일 수도 있다. 그간 나름 꾸준히 책을 가까이하고 읽으면서 독서인이라고 자부했는데 부끄러울 정도로 나의 형편없는 문해력과 마주해야 했다. 


완독 하는데 열흘 가까이 걸렸다. 하루에 기본 두 시간은 읽는 데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아이 픽업해 주고 차에서 기다리는 틈에도 읽었다. 무슨 시험 앞둔 사람처럼 이해가 안 되어도 그냥 읽어 나갔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이런 내가 우스운지 뭐 하려고 그런 어려운 책을 붙잡고 끙끙대고 있냐고 비웃는 남편에게 "이거 서울대 필독도서거든."라고 응수했다. 


다 읽고 나니 그래도 엄청난 뿌듯함이 나를 감싸는 기분이다. 어디 가서 자랑할 데도 없으니 브런치에 자랑해야겠다. 


저.. <총균쇠> 읽은 여자예요. 비록 지식인도, 교양인도 아니지만. 사실 절반도 겨우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읽은 건 읽은 거랍니다.. 온갖 재밌는 릴스와 쇼츠로 시간 보내기 좋은 요즘 같은 세상에 징그럽게 두꺼운 책 읽느라 좀 고생했거든요. 그래도 당분간은 인문학 서적보다는, 좀 제 수준에 맞는 책으로 힐링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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