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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Oct 31. 2023

자, 현실 조언 들어가실게요

어느 오지라퍼에 관한 이야기

가족같이 지내는 친한 언니의 아이가 특성화중학교에 합격했다. 국제중학교처럼 특목고 같은 개념으로 입학시험을 거쳐 학생들을 선발하는 학교였다. 중학교 입시에 관심 있는 학부모들에게는 꽤 유명학 중학교라서 입학하려면 상당히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입학전형도 1차 서류전형과 2차 면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언니도 처음에는 당연히 집 근처 중학교로 진학시킬 예정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의 강력 추천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저학년 때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임원을 했고, 학생회 활동 경력도 있어서 아주 유리할 것 같다고 조금만 준비하면 승산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기대반 설렘반으로 그냥 한 번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준비했는데 1차 서류 전형부터 쉽지 않았다.


자기소개서와 추천서를 한 번 점검해 달라고 부탁을 받아서 보게 되었는데, 양식이 거의 특목고 입학 원서와 일치했다. 이런 내용을 초6이 써내야 한다니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대학교 입시 준비는 교사로서 지도해 본 적이 있지만 중학교 입시도 이렇게나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미 아이의 부모와 아이가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쓴 자기소개서를 보고 약간의 조언만 첨가해주었다. 자기소개서의 틀과 방향이 어떤 식으로 가야 하는지, 그 중학교에서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쓰라는 다소 추상적인 조언밖에 해줄 수 없었다.


솔직히 중학교 입시는 겪어보지 않아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입시 지도는 한 두해 경험해 보았기에 내가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핵심만 짚어주었다. 지인의 아이도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지만 준비 과정을 거치면 거칠수록 정말 진심으로 그 학교에 입학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고 했다.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진지하게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최대한 진솔하고 간결하게 스스로에 대해 담담히 적어보라는 것뿐이었다.


언니는 자꾸만 다른 대도시 학군지 아이들은 대단한 학원에서 컨설팅받고 올 텐데 본인의 아이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없는 처지라서 더 걱정이 된다고 했다. 정말로 대치동 버금가는 그런 학원에서 이렇 자소서를 다 봐주고 컨설팅해 주는 게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걸 내가 직접 받아본 적도 없고, 친한 사람들 중에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도 없다. 만약 돈으로 자기소개서를 살 수만 있다면, 능력 있는 부모들은 그렇게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백번 들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컨설팅 따위 부러워말라고 위로했다. 자기소개서나 추천서는 정말로 아이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써야 하는 것이고, 추천서도 정말로 이 아이를 잘 아는 선생님이나 주변인이 써주는 것이지 돈 주고 컨설팅받아서 합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퍽이나 순진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입학 전형을 다년간 치러본 교사라면 자기소개서를 보면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고도로 단련된 어떤 전문가의 개입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정말로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스스로 써낸 자기소개서인지.


아이의 담임선생님과 아이를 잘 아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수십 번의 수정과 퇴고를 거쳐 1차 서류를 완성해서 제출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친한 언니 남편의 사업에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부부가 엄청난 위기를 겪는 와중이었다. 아이의 1차 합격소식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되었다.


2차 준비 과정은 아이나 엄마나 더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아이는 큰 실수 없이 치렀다고 했다. 면접 과정에서 처음에 버벅댄 게 조금 마음에 남지만, 큰 아쉬움 없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대답하고 온 것 같다고 했다. 최종 합격 발표날에는 나도 그 아이 엄마라도 된냥 긴장이 되고 떨렸다. 친한 가족의 입시도 이렇게 떨릴진대, 내 아이가 그런 큰 입시를 치른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모두의 바람과 기도가 이루어진 건지, 최종 결과는 합격이었다. 정말 잘 된 일이었다. 아이도 부모님의 최근에 겪은 집안 문제로 말은 못 해도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자기 할 일을 해내주었다는 게 참 대견했다. 그날만큼은 정말 온 가족, 친척들과 합격의 기쁨을 누리라고 말해주었고 나도 아이의 합격에 아주 조금은 일조를 한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중학교 합격도 이렇게 기쁜데,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면 얼마나 기쁠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언니는 그날 하루종일 축하전화와 메시지를 받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며칠 후에 합격의 흥분과 격한 감정이 조금 가라앉히고 언니와 만나게 되었다. 언니는 특별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주변 사람들 중에 누가 정말 찐인지 아닌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먼저 말한 것도 아닌데 동네 인근에 아이의 합격 소식이 금방 퍼져서 하루 종일 전화연락받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아이 친구 엄마와도 통화를 하게 되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처음에는 격앙된 목소리로 축하해 줘서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그런데 한 두 마디 축하의 말을 전한 뒤에 갑자기 그 엄마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말투가 진지하게 바뀌더니 한 말은 이거였다.


"저, 이제 현실 조언 좀 들어갈게요~?"


언니는 별생각 없이 이어지는 그 엄마의 말을 들었고 통화 끝에는 고맙다고 알겠다고 하고 잘 마무리하고 끊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고 한다.


현실 조언 좀 들어갈게요,라는 말 뒤로 이어진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아이가 합격한 그 특성화 중학교가 물론 평판이 좋긴 하지만 워낙 선발 모집된 아이들이라서 엄청나게 뛰어난 실력을 갖춘 학생들만 온다, 그러니 아이도 입학까지 남은 몇 개월기간 동안 만만치 않게 준비를 해야 한다, 자기 아는 사람의 건너 아는 사람이 그 학교를 보내는 엄마가 있는데 애가 너무 힘들어해서 그만두고 다시 일반중학교에 보내네 마네 하며 고민하고있는 판국이다, 학교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서 따로 학원을 보내면서 선행 뺄 생각은 엄두도 못 내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계획을 잘 세우셔야 한다는 둥, 한참을 일장연설을 하고 끊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 그 사람 또라이 아냐?"


평소 딱히 우아하다거나 나긋나긋한 말투는 쓰지는 않지만 내가 내뱉는 말들 중에 금기시하는 게 있다면 욕이나 비속어다. 말을 예쁘게 하진 않아도, 듣기에 거슬리는 욕 같은 건 사용하지 말자는 게 내 신조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또라이"이라는 다소 상스러운 말을 뿜어내고 말았다. 그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말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먼저 튀어나간 것이라서 막을 새도 없었다.


만약 자녀를 먼저 그 학교에 보내본 경험이라도 있다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아이 입시를 경험해 본 선배맘이라면 합격의 기쁨을 누려야 할 날에 찬물을 끼얹은데 대해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가겠다. 설령 정말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 현실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면 그날은 좀 참고 얼마 후에 만나서 찬찬히 이야기해도 됐을 말들이다.


그 후로 이어진 이야기를 더 듣다 보니 이제야 상황파악이 좀 되는 듯했다.

그분은 처음 그 중학교 입학 준비를 한다고 말한 순간부터 그 엄마는 좀 못마땅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자기도 그 학교 조금 관심이 있긴 한데, 아이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주변 지인들을 통해 알아봤더니 크게 좋을 것도 없고 졸업생들이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더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준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구구절절 그 학교에 원서를 넣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언니가 그분을 만나고 나면 항상 왠지 모르게 우울해지고 뭔가 기가 빨리는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늘 부정적인 기운이 강했더랬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결국에는 부정적인 이야기로 끝이 나다 보니 그분 주변에 점점 사람들이 인연을 끊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분의 아이도 교우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고 언니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위로를 구한 적이 많아서 항상 도와주려고 했다. 주변에서 좀 아니라고 해도 애써 감싸고 실드 쳐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이번 일로 왠지 모르게 많이 실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나야 직접 그분을 만나뵙 적도 없고 건너 들은 이야기라 뭐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일면식 없는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축하만 해줘도 모자랄 합격 발표자 날에 찬물을 끼얹는 "현실 조언" 발언은 조금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친한 언니는 자기 주변 지인 중에서 누가 진짜 내 사람이고, 아닌지 좀 갈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 정말로 진실된 관계는 상대방이 잘 되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분의 축하하는 마음도 비록 조금은 진심이었겠지만 질투의 마음이 더 커져버려서 순간 조절이 안 되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자식 일 앞에서는 더더욱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내 아이도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내 아이도 준비했다면 그 학교 정도는 합격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혹시 그런 상황에서 이런 마음이 내 가슴 한편에 찾아오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축하해 줄 수 있는 배포를 길러야겠다. 나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질투에 사로잡혀서 실수할지도 모르니까. 먹는 나이만큼 내 마음의 크기도 같이 부지런히 키워서, 어설픈 오지라퍼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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